7월 15일, 무더운 여름날에 장대 같은 빗줄기를 헤치고 시작된『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PIFan 2004)』가 22일 폐막되었다. 23일과 24일에도 깜짝 상영과 심야상영이 이어졌기 때문에 정확히 영화제가 끝난 것은 25일 아침. 이 열흘 동안 "사랑, 모험, 환상"이라는 주제로 관객들에게 소개된 작품은 32개국 261편(장편 83편, 단편 178편)에 이르며, 1회(1997년) 때의 27개국 111편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난 숫자이다. 물론 영화 애호가들의 관심과 참여는 그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늘어났다.
서울 근교, 경기 지역에 자리한 국내 유일의 판타지 영화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의 중요도는 훨씬 높아진다. 이는 두 말 할 것 없이 우선, 서울/경기 지역의 인구가 우리나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의 지리적 이점 때문이고(영화제에 참여한 관객의 숫자는 대략 6만명 이상이다.), 또 판타지라는 영화제적 특성이 영화제를 따라 움직이는 영화 마니아들을 주요 관객으로 흡수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올해로 8회를 맞아 성황리에 막을 내린 것이다.
부천은 판타지의 천국 판타지는 호러, SF, 스릴러 등의 장르적 특성이 강한 영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이런 장르들이 영화계에서는 비교적 덜 대중적인 하위 영화로 치부되어 왔기 때문에,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는 자칫 영화 마니아들끼리만 통하는 영화제가 될 위험 부담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기간
동안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발굴해 낸 영화들의 목록을 보면 그런 걱정은 모두 사라진다. 네오펑크 사무라이극 <사무라이 픽션(Samurai Fiction, 1998)>, 국내 호러 영화의 수작 <가위(2000)>, <소름(2001)>, 판타스틱 로망스 <아멜리에(Le Fabuleux destin dAm?lie Poulain, 2001)>, 독특한 소녀 성장물 <슈팅 라이크 베컴(Bend It Like Beckham, 2002)> 등이 모두 이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거나 관객들의 관심을 새롭게 유도해낸 작품들이다. 상영되는 영화의 대부분이 호러와 스릴러의 성격을 가졌거나 아이디어로 승부된 단편들 위주이지만, 확실히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는 대중성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 대중성을 토대로, 종전의 하위영화였던 판타지 영화의 세계에까지 관객들의 관심을 확장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유일한 경쟁부문인 부천초이스(장편)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것은 우리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한 류승완 감독이 무협영화에 바치는 오마쥬이기도 한 이 작품은 평범한 순경이 자신의 몸에 흐르는 무술인의 기운을 발견하고 그 최고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으로 국내에선 이미 극장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이 밖에 8회 부천영화제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받은 것은 일본 영화 <녹차의 맛(The Taste of Tea)>과 <제브라맨(Zebra man)>, 일본 애니메이션 <이노센스(Ghost in the Shell 2 : Innocence>, 제니스 조플린을 위시한 70년대 록 뮤지션의 활동을 담은 락 다큐멘터리 <페스티벌 익스프레스(Festival Express)>, 그리고 부천초이스 단편작들. 이 외에도 총 52회에 걸쳐 이뤄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세계 각국의 영화 스텝들이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 참여한 소감을 피력했는데, 시체사랑을 테마로 독창적인 영화 영역을 확보한 <네크로맨틱>의 감독, 요르그 부트게라이트(독일)는 내 영화가 이렇게 좋은 극장에서 상영될 날이 올 줄 몰랐다는 말로 위트 섞인 감상을 대신하기도 했다. 요르그 부트게라이트는 성적인 강박관념을 시체사랑이라는 극한적인 설정을 통해 기존의 모든 관념과 통례를 파괴하고 모반하는 영화를 찍어온 감독으로, 이번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특별전 형식으로 9개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필자도 처음 그의 영화를 보았을 땐 10분 만에 극장 밖으로 뛰쳐나온 작품이지만, 영화제의 화끈한(?) 성격을 표출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전으로 짐작된다. 또 호주의 몇 개 안되는 좀비 영화라며 자신들의 영화 가치를 피력한 스피어리그 형제 감독은 전 재산을 쏟아 부은 장편 좀비 영화 <언데드>로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감독들이 자신들의 컴퓨터로 직접 CG 까지 만들었다는 <언데드>는 전형적인 좀비 영화의 틀에 SF적 경향을 섞은 것으로 완성도보다는 팝콘을 먹으며 즐기기에 좋은 작품. 그리고 지난해에 이어 또한번 마련된 <쇼브라더스 회고전>은 강대위 등의 홍콩 무협스타 방문으로 나이 지긋한 중년들이 사인을 받기 위해 극장에 대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었는데, 지난해에 비해 관객들의 관심이 줄어든 것이 뚜렷하다. 이유는 홍콩 쇼브라더스 제작사의 대표작들-호금전과 장철 감독의 대표작-이 이미 한 차례 작년에 상영되었기 때문. 차라리 이보다는 부천국제영화제가 처음 시도한 복원 상영으로 유현목 감독의 <춘몽>이 큰 관심을 모았다.
사운드 필름의 유실로 지난 40년간 한번도 재상영된 적이 없는 <춘몽>은 영화음악가 조성우 씨가 유실된 후반 10분여의 음악을 새로 작곡하여 추가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일본의 소프트포르노 시나리오를 각색해서 옮긴 <춘몽>은 유현목 감독의 표현주의적 실험성이 강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뒤 전라 장면이 촬영되어 법정공방이 일어난 작품이며 세계 영화계의 모더니즘적 경향을 국내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제목인 <춘몽>은 일장춘몽의 춘몽.) 타임머신을 타고 4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라는 유 감독의 말처럼, 시대와 장르, 국경을 초월한 판타스틱 영화제의 고장, 부천은 세대를 아우르는 판타지 영화 천국이 되어 국내 관객들에게 새롭고 과감한 모험을 던져줌으로써 무더위를 잊게 만들어 주었다.
아쉬운 부천, 그러나 절대 추천영화.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아이디어와 재치로 세계 영화계의 일부분을 이끌어 가는 판타지에 일반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 대부분이 일본 영화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가 참여한 32개국 가운데 60 이상이 정보가 미흡하여, 참여한 나라의 수나 작품수가 결코 다양성을 확보해 주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제에서의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은 극장 개봉과는 사뭇 달라, <녹차의 맛>, <이노센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제브라맨>, <키사라즈 캐츠 아이> 등은 표를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고, 이 가운데 특히 영화 마니아들의 갈채를 받은 <제브라맨>은 올해 국내 극장가에서 호러영화로 정식 개봉된 <착신아리>의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신작. 평범한 초등학교 교사가 어린 시절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TV물 제브라맨의 옷을 만들어 입었다가 점차 각성하여 진정한 제브라맨으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세상을 구해내는 온갖 맨들이 보여준 히어로적 특성을 일본답게 구성해낸 코미디이다. 장르에 관계없이 한 해 5-6편의 영화를 연출하며 B급 영화계의 최고 감독으로 입성한 미이케 다카시의 또 다른 시도를 볼 수 있다. 이 밖에 시쳇말로 꽃미남 열풍으로 불리고 있는 여성 팬들의 남자배우 선호 기준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녹차의 맛>,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키사라즈 캐츠 아이>. 이 영화들에 등장하는 일본 남자배우들의 면면은 잘 만들어진 영화의 감동과 함께 여성 관객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제 열흘간의 판타스틱 한 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작품 선정과 개발, 소개의 아쉬움이 눈에 띄게 드러난 해였지만 그 판타지 세계에 들어가는 관객들의 발걸음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발걸음을 이끌어낸 것은 결코 참가국과 작품의 수가 아니다. 단 몇 편이라도 확실히 전달되는 잔잔한 감동과 기발한 웃음. 사고와 정서를 환기시키는 영화계 주변부의 새로운 시도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를 기다리는 이유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다음 판타지는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게 될까? 부천이 지금, 2005년을 준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