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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만화의 신기원 <열혈강호>, 20년 발자취

<열혈강호(熱血江湖)>(전극진 글, 양재현 그림)를 한마디로 정리해보자면, ‘1990년대 이후 한국만화의 역사’, 그 자체라 해도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1994년 5월에 연재를 시작해 2014년 11월 말 현재 단행본 권수 64권, 단행본 누적 판매부수 500만 부 이상, 누적 연재횟수 460여 회, 연재기간 20년 등 수치화된 기록들이 그러한 대표성을 단적으로 뒷받침해준다.

2014-12-30 김성훈
<열혈강호(熱血江湖)>(전극진 글, 양재현 그림)를 한마디로 정리해보자면, ‘1990년대 이후 한국만화의 역사’, 그 자체라 해도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1994년 5월에 연재를 시작해 2014년 11월 말 현재 단행본 권수 64권, 단행본 누적 판매부수 500만 부 이상, 누적 연재횟수 460여 회, 연재기간 20년 등 수치화된 기록들이 그러한 대표성을 단적으로 뒷받침해준다. 일단, 열거한 데이터만으로도 다른 어떤 작품도 범접하기 힘든 내공을 보여주는 셈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념비적인 숫자들의 나열에도 불구하고 분명 계량화시키지 못하는 가치 또한 존재한다. 가령 ‘한국 출판만화의 마지막 대작’과 같은 의미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 안에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웹툰의 활황 속에서도 묵묵히 출판만화의 자리를 지켜온 자존심도 함께 하고 있으니, (현재의 웹툰 독자가 아닌) 이른바 ‘잡지시대’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진성 만화독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협객’과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제는 전설로 불리우기에도 마땅한 그 이름, <열혈강호>의 ‘강호제패기(江湖制覇記)’를 돌아보자.

20년 시간이 쌓아올린 내공

1994년 5월 만화전문출판사 대원에서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남성독자를 타깃으로 삼은 이른바 ‘영(Young)지’로서 <영챔프(Young Champ)>를 창간한다. 허영만, 김수정, 지상월 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만화가들의 작품이 나열되는 창간호 표지 한켠에 <열혈강호>라는 생소한 작품 하나도 자리잡고 있다. 아마 누구도 당시에는 이 작품이 향후 20년 동안 ‘연재’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시작부터 기존 무협장르가 지닌 고정된 틀을 깨뜨리며 파격적인 연출을 보여준 <열혈강호>는 이른바 ‘신무협’ 혹은 ‘코믹무협’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며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인기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주었고, 단행본 판매는 밀리언셀러로 이어진다. 첫 연재 후 수 년의 시간이 흐른 1999년, 한 일간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로 당대 <열혈강호>의 의미를 짚어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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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라는 초히트작이 한일 두나라 만화계를 제패하고 있던 94년 5월, 국내 만화잡지 <영챔프>에 새로운 무협만화가 연재되기 시작했다. 어리숙하면서 엉뚱한 주인공, 그러면서도 화려한 액션으로 무장한 이 작품은 순식간에 강호를 평정해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상을 지키면서 모두 180만 권이 팔렸다.” - 한겨레 신문 1999년 5월 11일 ‘열강-용비 지존을 다툰다’(구본준 기자) 중에서

요컨대, 1990년대 후반 당시, <열혈강호>는 이미 어지러운 한국 만화계를 평정한 불세출의 작품으로 자리잡았던 셈이다. 1999년 12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올해의 베스트셀러 국산 만화 빅3’에서도 “일본만화의 공세 속에 우리 만화의 자존심을 지킨 올해의 베스트셀러 국산만화 빅3”로서 <오디션>, <힙합> 등과 함께 <열혈강호>를 꼽고 있어 그러한 시대적 상징성을 뒷받침해준다. 그 이후로도 10여 년의 시간 동안 한결같이 만화독자들을 만나왔으니,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하나의 타이틀이 꾸준히 연재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점에 대해 만화평론가 박인하는 다음처럼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배경이 중국처럼 보이나 중국은 아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무협물들과는 달리 <열혈강호>는 단지 ‘옛날 옛적’이라는 가상의 시대만이 존재한다. 둘째, ‘무’와 ‘협’을 한 몸에 체현하고 있는 주인공이 아니라 ‘무’도 떨어지고 ‘색’을 밝히는 주인공이 그려지고 있고, 주인공 한비광은 <열혈강호>의 코믹한 전개를 끌어내는 핵심적 요소로 작용한다. 셋째, 무협만화의 고전적 작화스타일에서 벗어나 연재 당시 일본만화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트렌디한 작화 스타일을 채용했다.” - 중에서

요컨대, 서사극의 기본적인 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에 있어서 <열혈강호>는 기존의 테마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독창적인 색깔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했다. 그리고 그러한 독창성은 회원 수 5만 여 명의 거대 팬카페(http://cafe.daum.net/lovegangho, 2013년 우수카페로 선정되었다)가 생겨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만화의 전설에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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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한국만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잡은 <열혈강호>가 2014년 20주년을 맞이했다. 기념행사가 다양하게 이뤄지면서 그 의미를 되돌아보는 자리가 여러 곳에서 마련됐다. 일단 그러한 움직임은 이미 2013년부터 시작되었으니, 대원씨아이에서는 회사 홈페이지에 <열혈강호>에 대한 캐릭터소개, 작가소개, 단행본 소개 등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목적으로 하는 섹션(http://yulgang.dwci.co.kr)을 만들어 대작이 걸어온 길을 기렸다. 20주년을 기념한 기념동영상도 제작했는데, 여기에는 글, 그림작가의 사진과 함께 작품의 주요장면과 주요캐릭터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현재 작품이 연재되고 있는 <코믹챔프>에서도 2014년 10호를 ‘열혈강호 20주년 기념호’로 기획하여 주인공인 한비광과 담화린의 모습을 표지주인공으로 삼았으며, 작가들의 인터뷰와 특집기사 그리고 유명 작가들의 축하 메시지도 함께 실었다. 또한 2014년 5월 1일에는 대원씨아이에서 20주년 기념식도 진행했으며, 7월에는 작품의 주인공 한비광과 담화린의 모습을 한정판 피규어로 제작하기도 했고, SICAF2014에서는 특별전시회를 개최했다. 한편, 유명아웃도어 회사에서는 20주년을 맞이해 스페셜 에디션 티셔츠(http://www.northcapekorea.com/northcape/community/colabo.asp)를 발매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홍대 앞의 북새통문고, 건대앞의 코믹갤러리, 서초동 홍비문고, 부산서면의 북컬쳐 등 주요만화전문서점에서 20주년을 기념한 작가들의 인사가 담긴 현수막을 설치해 독자들의 성원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 바 있다.

이처럼 20주년을 맞아 진행된 여러 행사와 이벤트 가운데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은 ‘2014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소식일 것이다. 물론, <열혈강호>가 상을 받은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이미 2002년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에서 인기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오늘의 우리만화상(상반기)도 수상했다. 이러한 수상소식이 작품의 대중적 영향력에 대해 공신력을 더해주는 사례라고 한다면, <열혈강호>의 이름으로 진행된 다양한 가치사슬은 그 영향력이 우리 시대에 어떻게 파급되는지를 증명해보여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가장 눈에 띄는 영역은 게임이다. 온라인 RPG로 제작되어 2004년에 출시된 ‘열혈강호 온라인’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수십 개국에 서비스되면서 글로벌게임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특히, 올해 하반기에 ‘열혈강호 온라인’을 개발했던 엠게임이 중국의 게임회사와 함께 ‘열혈강호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웹게임을 공동으로 개발하겠다는 소식을 발표함으로써 ‘열혈강호’라는 이름이 단지 만화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체 지형에서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열혈강호 온라인’ 외에도 ‘열혈강호 W’(2000년대 초에 출시된 웹게임), ‘열혈강호 2’(2013년에 정식서비스를 시작한 온라인 게임), ‘열혈강호 패검전’, ‘열혈강호무쌍’(이상 2014년에 출시된 모바일 게임) 등 다양한 버전이 출사표를 던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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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열혈강호>가 보여주는 연재 한 회, 단행본 한 권은 모두 한국 만화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작업이 되고 있다. 동시에 ‘열혈강호’라는 이름은 하나의 만화작품이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를 아우르는 키워드로도 자리잡고 있다. 한비광과 담화린의 강호제패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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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만화 칼럼니스트
《만화 속 백수이야기》, 《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들》 저자
http://blog.naver.com/c_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