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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의 <재미랑>과 <재미로>

건물은 <재미랑>, 길은 <재미로>, 이 얼마나 정겨운 이름인가. <재미랑>의 전시공간이야 전통적인 접근법이지만, <재미로>, 걸어가는 길 곳곳에서 만화를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길을 활용하여 전시를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닐까.

2015-01-27 한상정
날씨는 아직 차가운 겨울이지만 그래도 햇살은 따뜻하게 보였다. 이 부분을 적극 마음에서 강조하면서 늘어지고 싶은 마음을 추슬러 명동으로 진출했다. 사실 처음 이 계획을 들었을 때부터 정말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한번 제대로 살펴볼 짬이 없었다. 오늘에야 드디어라는 기대감으로 명동으로 향했다. 건물은 <재미랑>, 길은 <재미로>, 이 얼마나 정겨운 이름인가. <재미랑>의 전시공간이야 전통적인 접근법이지만, <재미로>, 걸어가는 길 곳곳에서 만화를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길을 활용하여 전시를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만화전시공간일 것이다. 광범위하고도 의미 있는, 그러나 아주 어려운 형식의 만화전시일 것이다. 가장 커다란 어려운 점은, 길은 일반적인 전시공간처럼 제한된 공간이 아니라 열려 있다는 것이다. 종종 미술관에 대한 비웃음으로 사용하곤 하는 ‘백색의 큐브’, ‘예술품의 묘지’ 같은 용어들이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보아야 할 대상에 집중할 것,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모두 제거시킨 안정화된 공간이 전통적인 전시공간이라면, 길거리라는 공간은 결코 같은 방식으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눈과 비, 바람, 햇빛 같은 자연적 요소의 위협을 받고, 주변에 어떤 상업적 공간이 있느냐 같은 인위적 요소들에 따라서도 크게 좌지우지된다. 만약 하나의 길 양편으로 모두 구둣가게들이 늘어서 있다고 해보자. 이 거리는 자연스럽게 구두거리가 될 것이다. 만약 만화가게들이나 만화서점, 만화출판사들이 들어서 있다면? 만화거리를 조성하는데 어려운 점이 확 줄어들 것이다. 이 거리의 주인들이 만화가, 만화 편집자나 기획자, 출판사 대표, 만화가게 아저씨나 만화서점 아줌마로 구성되어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만화의 거리다. 이들이 이곳은 만화가게요, 이곳은 출판사요 하고 소개하는 간판이나 쇼윈도만 제대로 활용하더라도 그곳엔 만화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 그런 장소는 없다. 따라서 모든 만화의 거리는 인위적으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공기관의 계획과 지원에 따라 인공적으로 조성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인공적인 구축의 차원에서 보자면, 자연적 요소와 인위적 요소들이 모두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어떤 공적 관리자도 365일 이 거리에 존재할 수는 없다. 거리의 주인들이 직접 이 거리를 관리하지 않는다면, 거리의 주인들이 만화를 아끼고 사랑하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마음이라도 가지지 않는다면, 이 거리를 재미가 넘쳐나는 만화의 거리로 만드는 것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보인다. 어떻게 하면 거리의 주인들이 직접 이 거리에 애착을 가지게끔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욕을 먹어온 대형건물 앞 환경조형물과 같은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여하간 무척 필요한 일이지만 힘든 사명을 누가 건사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힘내기를 당부해본다. 

지하철에서 나와 처음 만나게 되는 재미로의 바닥(사진1). 다른 도로와 약간의 색의 차이를 두고 바닥에 몇 가지 도안물들을 두껍게 발라두었다. 이왕이면 더 재미있는 이미지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라는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점점 더 <재미랑> 쪽으로 올라갈수록, 만화거리 조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라는 생각이 맞아떨어지고 있음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재미랑>이 2013년 12월에 개관했으니 이제 막 1년 정도가 지난 셈이다. 몇 달 전에 보았던 몇 가지 이미지들이 교체된 걸로 봐서 <재미로> 역시 약간씩 리뉴얼을 하는 것 같기는 하다. <재미로>의 곳곳에 유명한 만화작품들에서 나왔던, 만화 애독자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만한 문장들이 회색의 네모난 기둥에 인쇄되어 있다. 노란 색의 필기체 문장이라면 옆면에는 흰 고딕체로 작가와 작품명이 적혀 있다. 기둥의 위쪽에는 통일적으로 분홍색으로 재미로라는 글자와 바람개비 그림이 등장한다. 개별적 아이디어로는 아주 좋았다. 웬만한 애독자라면 만화 속의 명대사 하나쯤은 기억을 하고 있을 것이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이런 대사들을 읽어보는 것도 재미로의 놀 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재미로 초입 바닥.JPG
2. 재미로.JPG
3. 재미로-신일숙.JPG
1. <재미로> 초입 바닥                           2. <재미로> 정경 1                               3. <재미로> 정경 2 
 
그러나 사진 2와 사진 3을 보면, 필자가 마음이 무거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컷 예쁘게(?) 만들어 둔 만화 관련 이미지와 오브제들은 이 거리의 삶들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사실 이러한 배달전단지나 오토바이, 공사 중 패널, CCTV가 있으니 쓰레기를 투척하지 말라는 경고, 입간판, 입간판 위의 귤껍질과 음료, 그 위로 보이는 각종 음식 메뉴는 이 거리의 생활이다. 이들은 사진 2 위쪽의 바람개비나, 사진 3처럼“삶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얻는다”라는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대사의 맥락과는 참으로 멀다. 이러한 부조화가 과연, 예측불허였을까? 외국인을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 입간판도 세우고, 음식메뉴도 사진으로 외국어 설명까지 커다랗게 붙여둔 이 가게주인은, 자신의 가게 앞에 이러한 대사가 적힌 회색기둥이 선다고 생각이나 했을까? 그 사람이 좋아하는 문장일까? 숱한 문장들 중, 이 문장을 선택했을까? 왠지 답변은 부정적일 것 같다. 모든 대사들이 그 대사들의 뉘앙스와 무관하게 똑같은 필체로 인쇄되어 있는데, 어느 가게 앞에 자리 잡게 할 것인가를 신경 쓰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도로도로 골목길>이 조금 생활밀착형과 가깝겠다고 느껴졌지만, 여전히 초입길은 좀 어눌하게 느껴졌다(사진 4). 재미로가 이 거리를 생존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들과 함께 융합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재미로 자체로 흥미를 끌어들이긴 힘들지 않을까.  



4.JPG
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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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로도로 골목길> 초입                     5. <네달만 애니센터> 외관                      6. <재미랑> 외관  

계속 걸어가다 보니 <네달만 애니센터>라는 건물이 보였다(사진5). ‘어라? 이건 뭔지? 얼마 전에 봤던 <두달만 만화가게>랑 비슷한 콘셉트인가?’ 하고 들어가 봤더니, 아이들과 엄마들, 독자들이 와글와글 모여 클레이를 만들고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공사 기간인 네 달 동안만 서비스하는 공간이란다. 잠깐 둘러본 뒤 다시 <재미랑>으로 향했다. 건물 외양(사진6)은 재미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는데... 앞에 서 있는 저 조형물 커플은 음... 여하간 입체물 조형은 예산과 관리가 많이 필요한 것 같다. 자신 없으면 손대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7.JPG
7. 박소희의 계동
 
8.JPG
 

 
8. 원수연의 삼청동 

  
  <재미랑> 지하와 2층은 기획전시공간이고, 1층은 만화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곳, 그리고 3층은 만화관련 전문가들을 위한 네트워크 공간이다. 4층은 일종의 만화방이다. 앉아서 보거나 신발을 벗고 마루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날씨가 따뜻하면 옥상으로 나갈 수도 있다. 이번 전시는 <서울특별시 재미路 골목길>의 2부 전시이다. 박소희와 원수연이 전통적인 만화가에 가깝다면 하재욱은 만화 이외의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이고, 최형내는 실험적 만화를 보여주는 작가이며, 김태중은 미술 쪽에 더 가깝다. 원래 전시의 기획 의도는 이 다양한 작가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서울의 특정한 골목길을 해석하여 제시하게끔 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지하로 내려가면 처음 마주치는 것은 박소희의 공간이다. 처음엔 그녀가 무엇을 한 것인지 두리번거리다가 약 6장의 계동 풍경을 자신의 만화 콘셉트와 연결시켜서 그렸다는 것을 파악했다. 한복지나 보자기 등의 이미지가 계속 프로젝트로 돌아가고 있어서, 잠시 이런 작업에 박소희가 참여한 것인가 궁금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다지 커다란 상관이 없었다(사진 7). 원수연의 삼청동 공간은, 좀 당황스러웠다. 색칠용 책을 하나 묶어놓고 그 중 두세 가지 그림들을 출력해놓고, 색연필을 두고, 원수연 작가와 함께하는‘세상의 하나뿐인 명작 만들기’? 이 공간에 삼청동에 대해 본인이 작업한 것이라곤 두세 장의 배경 합성에 주인공들을 얹혀둔 것 정도에 불과한 것 아닌가. 나머지 삼청동 풍경사진들을 본인이 찍었다는 것인지,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대답이 나오진 않았다. 전시기획자들, 얼마 없는 콘텐츠들을 활용해서 이 공간을 채우느라 쉽지 않았겠다. 모든 만화가들이 그렇진 않겠지만, 연재 일정에 쫓기는 만화가들과 함께 무엇인가 기획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9. 최형내.JPG
9. 최형내의 성북동 

11. 김태중.JPG
10. 김태중의 황학동


10. 하재욱.JPG
11. 하재욱의 안암동 

2층 전시공간으로 올라가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 최형내의 성북동 거리(사진9), 너무나 가기 싫은 자세로 각 거리들을 걸어 다니는 인물의 모습은 성북동 골목만이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까지 함께 불러준다. 눈에 확 들어오는 채색들과 그에 어울리는 글씨체, 사춘기 스타일의 과거들, 골목길의 구체적인 모습들은 시각만이 아니라 이야깃거리도 동시에 이곳에 불러내준다. 자기도 모르게 킥킥대게끔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그 옆엔 김태중의 황학동이 있다(사진10). 이런 저런 별 희한한 것들이 있는 별세계, 황학동에 가보지 않아도 어떤 이미지일지 대략 떠오른다. 황학동의 고물상처럼, 못 쓰는 물건들이 있다면 새로운 용처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단다. 거리의 특성이 작가의 작업 특성과 완전히 들어맞고 있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하재욱(사진11). 한쪽 벽면엔 은행나무길의 모습들이 수필스러운 가벼운 스케치와 글들로 채워지고 있다. 프랑스의 상뻬가 떠오른다. 그러고도 다 보여주지 못한 감성들은 디지털 화면으로 계속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액자들이 너무 아래쪽까지 배치되어 있어서 무릎을 꿇지 않으면 읽어내기 힘든 배치라는 점이 좀 힘들었다. 최형내와 김태중이 전시공간 안에서 서울의 골목길을 살려내는 방식이 아주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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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화장실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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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4층 만화방 베란다.JPG 
13. 널브러져 만화보기                                             14. 4층 만화방 베란다 


<재미랑>의 기획전시는 재미있는 점들이 있었지만, 이런 제한된 전시공간의 방식으로는 <재미로>를 정말 재미있는 만화의 거리로 만들어내기는 아주 어렵다. 뭐 어쩌랴. 한술 밥에 어찌 배가 부르리. 이제 시작인걸. 그래도 <재미랑>의 화장실 문과 안내문, 갖가지 안내문들은 재미있었다. 이런 디테일이 살아 있는 공간이 너무 예쁘지 않은가(사진12). 특히 화장실문을 당기라고 영어로 Pull이라고 해놓고 글자를 당기는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4층으로 올라가서 신발을 벗고 뒹굴며(사진13) 만화책을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혼났다. 협소한 것이 흠이라면 흠. 이런 작은 공간이라도 좀 더 많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면, 바깥세상이 시원하다(사진14). 이 곳에서 바라보는 재미로의 풍경이 좀 더 만화스러워지길, 그러기 위해 좀 더 이 길의 삶들과 밀착되기를. 그런 날이 머지않아 도래하기를 기원한다. 그래야 만화 속의 세상만이 아니라, 세상 속의 만화가 될 수 있을 거니까.  
필진이미지

한상정

만화평론가
인천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