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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방의 진화

폐인 집합소로 명성과 악명이 자자한 <디씨인사이드>는 실로 많은 인기 캐릭터들을 배출해 왔다. 창조성까지 갖춘 개죽이와 개벽이는 물론이거니와 글마다 이소룡 얼굴을 올리던 악성 덧글쟁이를 캐릭터화한 ‘싱하 형’, 「취화선」의 최민식 씨를 뚝 떼어내 <디씨인사이드>의 유행어인 “아??”을 외치게 한 ‘취화선’...

2006-06-01 서찬휘




폐인 집합소로 명성과 악명이 자자한 <디씨인사이드>는 실로 많은 인기 캐릭터들을 배출해 왔다. 창조성까지 갖춘 개죽이와 개벽이는 물론이거니와 글마다 이소룡 얼굴을 올리던 악성 덧글쟁이를 캐릭터화한 ‘싱하 형’, 「취화선」의 최민식 씨를 뚝 떼어내 <디씨인사이드>의 유행어인 “아??”을 외치게 한 ‘취화선’, 문희준 씨가 오이 세 개만 먹으며 락을 했다는 걸 비꼬면서 탄생한 ‘문군’, 축구 대표팀 이을용 선수가 중국 선수를 응징(?)한 장면을 교묘하게 잡아내 인기를 끈 ‘을용타’, 심지어 <디씨인사이드> 사장인 김유식 씨까지 그 종류가 참으로 다양하다.
셀카(셀프 카메라) 열풍이나 훗날 황우석 사태 등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입증 받고 만 전국민적 이미지 편집 열풍(?) 속에 이들 캐릭터들은 게시판 등을 통해 퍼지는 ‘짤방’[*주1]에 ‘누구나 손댈 수 있는 재창조와 확산’이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기에 이른다.
/* [*주1] 짤방 : ‘짤림 방지’의 약어로 본문 길이가 어떻든 그림을 한 장 이상 넣지 않으면 게시물을 지우는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짤리지(잘리지) 않기 위해 넣던 그림을 지칭. 현재 ‘짤방’은 본문과 함께든 달랑 그림만이든 ‘집어넣는 그림’의 뜻으로 쓰인다. */

하지만 이들 캐릭터들은 ‘실사’에서 온 인상이 워낙 확고했기 때문에 ‘합성 놀이’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원전이 되는 인물에 대한 경외심이나 경멸 등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지만 어디까지나 초점은 이들 인물에 맞춰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개죽이와 개벽이의 경우 사람이 아니라는 점 덕에 좀 더 많이 활용되고, 개죽이는 2D 캐릭터로도 재탄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지만.
짤방이 남의 일러스트를 그냥 올리는 수준이나 여타 인물(또는 동물)의 합성 사진을 활용하는 선을 넘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이 나오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개죽이의 인기가 시들해진 짤방계(?)에 혜성같이 등장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이 있었으니, 이름마저 장절한 「짤방보이」다.

「짤방보이」 원본

1단계 업그레이드

2단계 업그레이드

3단계 업그레이드

4단계 업그레이드

납량특집_1

납량특집_2
「짤방보이」는 <디씨인사이드> 이후 우리나라의 인터넷 폐인들이 모이는 자리로 각광 받고 있는 <웃긴대학(웃대)>의 게시판에 오른 만화 한 편에서 유래했다. 어이없고 썰렁한 개그를 날린 친구에게 웃어주다가 느닷없이 분노의 철권(?)을 먹이는 곱슬머리(리젠트 머리에 가까움) 소년을 그린 만화로, 윈도우즈 그림판으로만 그려 일견 정겨운 허술함(?)을 주는 데다 ‘피 박살 주먹질 장면’으로 이어지는 반전도 꽤 재미있다. 만화가 시선을 끌자, 사람들은 이윽고 마지막 장면만을 떼어 “가드 올려라!” “가드 올려도 소용없다!” “추천하면 가드 내려도 됨♥” 등의 문장을 달아 ‘짤방’으로 애용하기 시작했다.

전설의고향

군바리

은하철도999_메텔

북한군

칠판

조금씩 판올림한 그림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짤방보이」는 어느덧 여러 만화나 만화영화, 게임 등의 캐릭터들을 교묘히 패러디한 ‘시리즈’로 탈바꿈했다. 여타 작품들의 캐릭터들이 자신을 나타내는 대사 한 마디씩을 들고 냅다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맥락 따위는 상관도 없고 알 것도 없다. 메텔은 “철아!”(은하철도999)를 외치고 키노모토 사쿠라는 “붐업(네이버에서 재미난 글이나 짤방 그림 혹은 사진에 추천을 하는 행위)을 안 하다니! 봉인 당하고 싶냐?”(카드캡터 사쿠라)를, 신도 히카루는 “신의 한 수다!”(고스트 바둑왕)를 외친다. 시리즈가 이어지다 보니 급기야 짤방보이의 여자친구까지 등장해 사람들을 웃긴다. 자세와 표정만 잡고 한 마디 외치면 ‘짤방보이 풍 누구’가 되니 패러디가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 이 「짤방보이」 시리즈도 조금 기세가 꺾일 즈음 짤방계에는 또 한 편의 대작(?) 시리즈가 몰려오기에 이른다. 이름 하여 「조삼모사」.
한자숙어인 ‘조삼모사’ 뜻을 반전을 섞은 두 칸짜리 만화로 절묘하게 풀어낸 개그는 간단하면서도 깊은 내공을 보여줘 사람들에게 역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윽고 사람들은 「짤방보이」 때와는 달리 그림이 아니라 말 칸 안의 대사만을 바꾸는 방식으로 패러디를 해나가는데 이게 또 장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몇 가지 예시를 보자.
조삼모사 원본(http://www.cyworld.com/kbk74)









「조삼모사」는 본래 절륜한 개그 감각으로 정평이 높은 고병규 씨가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올린 만화다. 「파이팅! 브라더」와 「출동! 먹통X」를 기억하는 이들로서도 고병규 씨의 감각이 녹슬지 않았다는 점에 열광하고 있지만 정작 고병규 씨 본인은 게임 제작사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 만화계로 돌아올 기약은 아직 없는 상태.
고병규의「출동! 먹통X」(코믹팝, 총 1권, 완결)
정작 고병규 씨는 취미로 그린 작품이라고 하고, 팬들 입장에서는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고병규라는 이름이 「조삼모사」류의 작품을 그리는 신인으로 오해를 사는 게 아쉽지만 ― 그래서 신해철과 넥스트, 혹은 이승환을 두고 신인 가수냐고 물었다던 모 아이돌 그룹 팬을 보는 듯한 착잡함에 빠져들지만 ― 다른 걸 다 떠나서도 단 두 칸만 가지고도 이만한 파급력을 이끌어낸 작품의 힘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짤방보이」 시리즈가 게시판에서의 애교(덧글을 달거나 추천을 하라는 요구)에서 캐릭터 패러디의 영역으로 발을 넓혀 나가며 최근 유행하는 ‘연예인 굴욕 시리즈’와 비슷한 ‘망가뜨리기’ ‘뒤집기(전복)’의 잔재미를 선사한다면 「조삼모사」 시리즈는 ‘짤방’ 그림의 주체를 다름 아닌 자기 자신으로까지 확장시켰다는 데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조삼모사」의 주인공은 나, 혹은 자신을 포함한 ‘우리’다. 결정적인 순간에 원숭이들의 입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담는 일종의 자화상인 셈이다.


「짤방보이」와 「조삼모사」가 시리즈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단순히 몇몇 게시판 규정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던 ‘잘림 방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무 그림이나 쓰던 것을 넘어 점차 그 나름대로의 ‘2차 창작’을 가해가는 창조적 경향이 짙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이들 작품의 인기를 단순히 ‘웃겨서’만이라고 보기엔 유행을 타 변천을 거듭해 오는 과정이 제법 의미심장하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적당히 단순하고, 그만큼 좋아하는 캐릭터 혹은 자신(우리)을 대입하기 쉬운 구조이며 ― 「조삼모사」는 대사만 바꾸면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이 되고, 「짤방보이」는 심지어 패러디를 위한 표정 원형 그림도 돌아다닌다 ― 지극히 만화적인(어쩌면 만화이기 때문에 표현이 가능한) 전복과 반전이 주는 은근한 짜릿함이 참으로 백미다. 「짤방보이」 시리즈는 망가지는 캐릭터들 자체가 작품의 인기도를 반영하기도 하고, 「조삼모사」에 이르면 시리즈들이 풍기는 만평 뺨치는 시사성을 읽어나가며 웃음과 함께 씁쓸함 혹은 섬뜩함을 느낄 수도 있다. 심지어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쏟아져 나오는 새 시리즈들은 이미 원본과는 또 다른 작품으로서의 생명력을 (양적으로) 창출해내고 있다.
어쩌면 이들 작품들은 ‘짤방’이라는 인터넷 문화가 만화적 토양을 바탕으로 진화한 독특한 사례로 제법 진지하게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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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vol. 40호
글 : 서찬휘
만화 즐김이. 만화 중심의 대중문화 언론 『만』(http://mahn.co.kr/) 고정 필자, 개발 담당.
만화 이야기터 [만화인](http://manhwain.com/) 지기. 칼럼니스트 겸 프로그래머.

필진이미지

서찬휘

* 만화 칼럼니스트. 
* 《키워드 오덕학》 《나의 만화유산 답사기》 《덕립선언서》 등 저술.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교와 백석문화대학교 출강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