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는 애달프다. 혼자 몸으로 바람을 가르며 달려야하는 이 운동은 이상하게도 블루스비가(悲歌)처럼 구슬픈 느낌을 자아낸다.
달리기는 현존하는 고통이다. 달리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라. 거의 날 죽여 달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 달리지 않는가. 결승 테이프를 끊은 뒤 아주 잠시 간 미소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의 달리기에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달리고 또 달릴 테니까.
항상 의문을 가져왔다. 진정 달린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겐 충분한 보상이 되는 것일까. 혹은, 정말로 완주하고 난 뒤의 기쁨이 그의 심장과 허파가 견뎌야 했던 모든 고통을 싹 잊어버리게 할 만큼 커다란 것일까. 달리는 자의 성취감을 미루어 짐작해보려 노력해봤지만, 나에겐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에 너무 찌든 탓일 수도 있겠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서 달리기는 돈 안 되는 스포츠의 대명사다. 자본주의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는 스포츠 계에서도 달리기는 그렇게 높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축에 끼는 마이너 오브 마이너 장르다. 그대여,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육상 대회나 전국 체전에 단 한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는가. 가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텅 빈 관중석의 그 숨 막힐 듯한 적막을.
선수들은 그 고요를 이겨내고 얼굴을 구겨가면서까지 끝끝내 달리고야 만다. 얼마 전 김국영 선수가 육상 100미터 한국 신기록을 10.07초까지 단축했다. 이거, 정말이지 기적과도 같은 성과다. 한국에서 있을 수 없는 대사건이 벌어졌다고 보면 된다. 손흥민이 프리미어리그에서 30골 정도 넣은 것과 거의 비슷하다. 이 기록으로 김국영 선수는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그가 올림픽에서 선전하길 바라고 또 바란다.
사람들은 보통 달리기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들 말한다. 진실로 맞는 말이다. 중학교 시절 언제나 두려운 건 1,000미터 오래 달리기였다. 그 괴로움을 미리부터 직감하고서는 제발 앞으로의 4분이 스윽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늘을 향해 수도 없이 빌곤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뜻대로 되겠는가. 마치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던 그 지난한 악몽들이 지금까지도 거의 블루레이급으로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에 비하면 100미터 따위는 (기록에 상관없이) 누워서 떡먹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내 기록은 중학교 시절 14초 초반 대였다. 생긴 것과는 달리 많이 느리진 않았다는 얘기다.
달리기가 장사 안 되는 이유, 아마도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길이가 길어질수록 달리기는 스포츠의 가장 중요한 특질인 극적 카타르시스와 결별한다. 멀리서 바라만 봐야하는 관객의 입장에선 그만큼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 없다. 길이가 길어질수록, 그러면서 달리기가 인생의 근사치에 가까워질수록 달리기는 돈을 벌기가 힘들어진다. 해외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그렇다.
왜냐고? 아니, 매일 매일이 고된 사투인 ‘헬조선’에서 스포츠가 인생과 비슷해진다니, 그걸 사람들이 좋아하겠는가 말이다. 나는 “스포츠가 곧 인생이다.”거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따위의 말만큼 우리를 취하게 하는 거짓말도 없다고 확신한다. 장담컨대, 그건 스포츠니까 가끔씩 벌어지는 기적 비스 무리한 것일 뿐이다. 노력은 당신을 배신할 수도 있고, 어쩌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이 예측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 있다면, 노력이 당신을 배신할지 안 할지 결코 예측할 수 없다는 점뿐이다. 고로, 우리 삶이 스포츠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고 여기는 쪽이 정신 건강에 훨씬 이롭다. 그대여. 현실이라는 연표 위에 굵직한 존재감을 남기는 인생을 꿈꾸는가? 그건 그냥 맘 편하게 스포츠 스타들에게 맡기시라.
다시 한 번 강조컨대 스포츠에 인생이 녹아있다는 건 다 새빨간 구라다. 스포츠가 삶의 진실에서 멀어질수록 대개 스포츠는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어 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충심으로 부탁한다. 운동해서 부자가 되고 싶다면 그나마 우리 삶과 닮아있는 달리기는 제발 피해 달라. 나는 지금 당신이 우사인 볼트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변호하자면, 그는 자체 터보 부스팅이 가능한 지극히 예외적인 괴물일 뿐이다.
달리는 길이가 길어질수록 통증이 증가하듯, 인생 역시 살아갈수록 괴로운 법이다. 아직 40년 밖에 살지 않아 확실하진 않지만 주변에서 들어본 바에 의하면 맞는 말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리기가 인생의 붕어빵이라고들 말하나 보다. 아무런 도구도 없이 자신의 몸뚱이로 세상과 대치해야 하는 스포츠로는 달리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혹 신발이 필요하다고 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예전 사람들은 맨발로도 힘차게 땅을 박차고 달렸다. 이 때문에 달리기는 태초의 원시적 순수성을 증명해주는 마지막 좌표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 달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지금껏 인간은 좀 더 빨리 목적지에 닿기 위해 수많은 도구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도구들은 그만큼의 편의와 시간을 제공하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래서 인간은 이제 굳이 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달리는 사람들은 도대체 뭔가. 건강 증진이라는 구체적 목표 하에 달리는 이들이 급속 증가하고 있다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구체적 인식 없이 달리기에 매료돼 오늘도 운동장을 달리고 골목길을 누빈다. 긴 구간을 달리고 난 뒤 찾아오는 희열(혹은 내 건강이 더 좋아졌겠지 하는 뿌듯함) 때문에 달린다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그래도 달리기가 고달프다는 명제는 요지부동의 참값처럼 보인다.
달리기에 어떤 숭고함이 배어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내 몸 속에 엄존하는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온전히 달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달리기는 가장 숭고한 스포츠다. 그러니까, 고통은 달리기의 연료이자 윤활유요, 엔진인 셈이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즐거웠던 달리기가 성장하면서부터는 점점 더 고통으로 변해가는 것도 어쩌면 그렇게 인생을 쏙 빼닮아있는지.
나카하라 유의 만화 <스타트>를 보며 내내 눈시울을 적셨던 것도 그런 까닭 모를 애잔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타트>의 소재는 좀 다르다. 단독 달리기가 아닌 우리에게 많이 낯선 ‘역전 경주’를 다루고 있다. 추측컨대, 보기 드문 육상 만화인 이 작품이 만약 단독 달리기에 관한 작품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큰 감동을 받진 않았을 것 같다. 어깨띠로 ‘연대’하여 달려야만 결승선에 도착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지금도 가끔씩 이 책을 펼쳐보며 훌쩍거린다. 아아, ‘함께 똑같이 고통을 나누는’ 행위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이게 바로 진짜배기 친구 아니겠는가.
이 만화를 처음 접했던 건 만화방에서였다. 나는 대학교 시절 내내 만화방에서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IMF로 집은 쫄딱 망했고, 나는 학비를 벌어야 했다. 그래서 평일에는 과외와 음악 카페 알바를 병행했고, 주말이 되면 만화방으로 가서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헐, 이게 왠일. 만화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만화를 공짜로 볼 수 있는데, 월말이 되면 수고했다고 돈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고부가 가치 아르바이트가 내 주변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그만 깜놀하고 말았다.
<스타트>를 다시 읽으며 그 시절을 추억해봤다. 그 때 내가 원했던 건 현존하는 내 고통에 조금이라도 위로의 말을 던져주는 친구였다. 그래서 그것이 비록 잠시일지라도, 나의 고통이 잊히기를 바랐다. 그 때 나와 함께 했던 몇 안 되는 친구들이 얼마 전 오랜만에 모여 술 한 잔 기울였다. 괜찮은 직장 다니며 다들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게 진심으로 기적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우리는 함께 어깨띠를 매고 인생이라는 트랙을 역전 경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