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원로 만화가 장은주는 6,70년대 서양 소녀 일색의 순정만화 작품들이 지향해온 장르적 시류에 따르지 않고 독창적인 한국적 여성 캐릭터와 그림체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었던 한국 만화계의 보석 같은 존재이다.
그녀는 데뷔작 ‘장미의 눈물’에서 독창적인 캐릭터뿐만 아니라 독특하고 이국적인 시공간과 공주와 왕자, 그리고 마녀의 딸까지 등장시키는 입체적인 로맨스와 서사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소녀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암울했었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어린이 만화 독자들을 위한 작품들은 대개 어려운 가정에서 고난을 극복하는 가족 중심의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었었다. 하지만 장은주가 추구하는 독창적인 소재로 인해 당시 순정 만화의 판도는 좀 더 다채로운 방향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만화에 빠져 살았던 새침데기 소녀 ‘북해도 고춧가루’
장은주는 일본 규슈에서 출생하였으며 2남 3녀중 장녀이다. 광복 직후에 부친의 가업을 따라 귀국하여 경남 동래에서 열두 살까지 유년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상경했다.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었던 그녀는 최상권의 ‘삼태성’,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 리’같은 만화를 보고 자랐다.
장은주가 개방적인 가풍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가족들은 만화 대본소에서 빌려 온 만화에 빠져든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여느 공부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만화 취미를 응원해주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부모님이 다투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버지 곁에 바싹 붙어 안마를 해 드리면서 그녀가 재미있게 읽었던 ‘철가면’이나 ‘홍길동’ 같은 이야기를 각색해서 들려드리곤 하는 남다른 재주도 있었다고 한다.
속마음은 여리고 다정다감한 장은주였지만 내성적인 성격으로 친구들과는 잘 사귀지를 못했는데, 친구들 사이에서는 ‘새침데기’로 알려지고, 쌀쌀맞은 아이라 해서 ‘북해도 고춧가루‘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은주의 그림 솜씨에 매료된 친구들은 예쁜 그림으로 가득한 그의 연습장을 얻어 가려고 그의 책상 주변으로 늘 긴 줄을 섰다. 공부를 하다가 무심결에 긁적였던 낙서들임에도 친구들 눈에는 너무 예쁘고 수준 높은 그림이라 서로 가져가고 싶어 해서였다. 심지어 장은주의 낙서가 있는 연습장을 빼앗아 가는 대신, 새 연습장을 주고 가는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연습장 걱정 없이 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자주 자리에 누워있는 시간을 주로 만화를 즐겨 보았는데, 어느 날은 문득 자신이 직접 만화를 그려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당시 소녀들 사이에서 인기 만화가였던 이창훈의 작품을 좋아했고 그의 캐릭터도 마음에 들어 독자 투고를 시작하게 되고 투고 요령 안내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은 먹으로 그려야 한다’는 상식도 배우게 된다.
책을 좋아해서 독서량이 꽤 많았던 장은주는 자신이 읽었던 책 속의 내용 중에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어 다양한 캐릭터와 플롯으로 각색하는 것을 좋아하였었는데, 가족들 모두가 그녀의 얘기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다른 만화가들처럼 프로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경험을 하며 배웠다면 체계적인 작법과 다양한 테크닉을 익혔을 터인데, 기성 만화가의 그림을 모사하거나 영화 스틸이나 잡지 화보의 인물 사진을 보며 독학으로 연습한 장은주로써는 캐릭터의 등신 설정에 대한 개념조차 갖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표지를 그려 놓고 보면 그림이 이상한 것 같아 다음 페이지에 좀 더 잘 그리려고 수정을 해 보지만 그려 놓은 그림마다 이상하게 보여 또 고쳐서 그리다 보니 나중에는 그림들이 모두 롱다리 캐릭터로 변해 버리곤 했다.
‘원고는 확대해서 그려야 한다’는 기본적인 테크닉도 몰라서 단행본 크기 그대로 원고 사이즈를 정해 드로잉 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림을 잘 그려서가 아니라 그 당시에는 만화가가 드물었고, 특히 여류작가가 귀해 장은주는 출판사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으며 본격적인 만화가의 길로 입문하게 되는데 그때에 얻은 필명이 “로즈마리"였다.
‘이창훈’, ‘김용도’, ‘박수산’, ‘조원기’, ‘이범기’ 같은 남성 만화가들이 순정만화 장르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고 있었으며, 여성 작가로는 엄희자를 비롯하여 송순히, 민애니 정도의 작가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장은주는 자신이 독자투고까지 하며 팬심 가득 우러렀었던 만화가 김용도를 출판사 활동을 통해 만났는데, 알고 보니 나이가 동갑이라 무척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장은주의 만화계 입문을 도운 출판사 광문당의 대표는 그녀의 작가적 역량을 키울 기회를 주기 위해 김용도 화실의 문하생 생활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7,8명이나 되는 남자들 틈에서 함께 일하는 것이 왠지 거북하여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출판사에서 알게 된 여성 만화가 민애니의 화실에 놀러 간 장은주는 문하생까지 두고 체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민애니의 프로다운 면모를 보고 무척 부러워하기도 했다.
결혼 후 한때 건강 문제로 한동안 작품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장은주는 여러 출판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꾸준히 받고 있었는데, 1968년부터 작업을 다시 재개하여 내놓은 작품이 바로 “천사의 꽃바구니"였다. 명작동화를 모티브로 삼아 재구성한 ‘천사의 꽃바구니’를 시작으로 ‘새벽별의 노래’ ‘밀림의 공주’ 등 주옥같은 장은주 특유의 서정적인 작품들이 발표된다. 특히 ‘천사의 꽃바구니’는 1977년 월간잡지 ‘소년생활’에 다시 연재될 정도로 대중으로부터 사랑받은 작품이다.
장은주의 만화를 보고 독자들의 팬레터가 쏟아졌는데, 자신이 구상한 스토리를 만화로 그려 달라는 독자들뿐만 아니라, 그의 문하생이 되겠다며 찾아오는 학생들을 돌려보내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한다.
자신의 그림과 맞지 않은 그림이지만 극화체 만화에 소질이 있어 보이는 남자 문하생 지망생에게는 궁합이 맞을법한 다른 작가에게 소개해 주기도 했는데, 그 때 찾아 온 지망생들 중에는 지금 우리 만화계에서 유명해진 만화가도 더러 있다고 한다.
6, 70년대의 만화 단행본은 요즘과 같이 장편이 없고 ‘상권’ ‘하권’으로 나뉜 두 권짜리, 길어야 ‘상중하’ 세 권으로 끝나는 작품을 그려야 했었기 때문에 작가들은 다양한 장르의 만화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를 찾아야 했다.
장은주 특유의 시대 흐름을 뛰어넘는 서사구조는, 10대부터 꾸준히 구축해온 그녀 자신만의 세계관 덕분에 발표하는 작품마다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요즈음 유행하는 게임이나 DC, 마블류의 판타지 세계관 전략을 그녀는 일찌감치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로봇 만화 붐’을 극복한 악몽 같았던 80년대 순정 만화계
건강 문제 외에는 별다른 슬럼프 없이 활력 넘친 창작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던 장은주였지만 순정 만화에 나오는 남자 캐릭터에 대한 아쉬움은 늘 끊임없는 고민의 대상이었다. 소녀만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모두 너무 여성적인 캐릭터라, 이 패턴에서 벗어난 남자다운 캐릭터를 그려보기 위해 수많은 국내외 작품을 참고로 하며 남성 캐릭터를 바꾸려고 무던히 노력을 했지만 뜻대로 표현을 하지 못한 것이 늘 아쉬운 점이었다.
문하생 생활을 거치면서 실전 경험을 쌓아 데뷔한 다른 만화가와는 달리 독학으로 만화 공부를 한 장은주는 순정만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눈과 눈동자의 표현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순한 눈동자도 처음엔 무언가 빠진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나름대로 예쁘게 그리려고 노력하다 보니 장은주 만화 특유의 눈동자가 나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 캐릭터의 옆모습이 예쁘게 나오지 않아 인체 데생 참고도서를 비롯하여 국내외 다른 만화가들의 캐릭터를 보며 습작도 많이 해보았지만 특별히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찾지 못해 포기를 한다.
1980년대는 독자들이 순정 만화를 외면하는 악몽 같은 침체기였다.
당연히 출판사마다 비상이 걸렸고, 이런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출판사와 작가들은 독자들의 관심에 맞춘 장르를 개척하며 변신을 시도한다.
그 당시에 인기 있었던 장르는 ‘로봇 만화’와 ‘명랑 만화’였는데, 독자들이 찾는 장르의 변화로 만화가들은 생존을 위한 변신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다. 독자들이 찾는 작품 장르를 따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재빠르게 적응을 하며 살아남은 만화가가 있었는가 하면, 자신의 정서에 맞지 않은 독자와 출판사의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펜을 꺾고 전업을 하는 만화가들도 더러 생겨났다.
기계류의 소재를 그리는 것도 싫기도 했거니와 기계의 딱딱하고 차가운 이미지 자체를 장은주는 거부했다. 이런 로봇 만화 붐에 편승하는 걸 포기하는 대신 그녀는 ‘샌디의 첫사랑‘, ’제리의 남자 친구‘ 같은 순정풍의 명랑 만화 창작에 더욱 더 매진한다.
장은주의 스토리 구성법은 철저하게 주인공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이다. 먼저 전체 서사구조를 느슨하게라도 먼저 잡은 다음, 등장하는 인물 설정을 한다. 그런 다음, 등장인물들의 성장하는 과정을 생각하며 만나는 사람을 구상하고 상상하며, 여러 갈등 요인을 만들어 그것들을 모아 이야기를 만드는 철저히 인물 중심의 이야기 구조로 완성된다.
새로운 작품의 구상은 한 작품을 끝내고 휴식을 겸한 명상을 할 때이다.
조용한 성격답게 생각을 하거나 책을 읽다가도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으면 메모해 둔 자료를 활용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1970년대 초에 장은주는 인기 작가들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무리한 원고 작업 후유증으로 인해 관절염을 심하게 앓게 된다. 연필을 들기에도 벅찰 정도의 손 통증으로 고생을 했지만 천직으로 여기며 걸어온 만화가의 길을 멈출 수 없어 한동안 문하생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또 아내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든든한 후원자, 부군 박 선생까지 만화 스토리 작업을 도와주는 등 장은주의 작품 마감을 지켜주기 위해 그녀의 화실은 늘 활력이 넘쳐났다.
순정 만화가 침체기에 들어 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 시절의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이 여러모로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무기력함과 울분 속에서 살던 암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무기력해진 기성세대들의 집단적 정서가 어린이들에게도 전달되어,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엇엔가 짓눌리는 듯한 사회적 분위기에 만화 장르 또한 정서적으로 반응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장은주는 생각한다. ‘고리타분’하고 ‘착하고 조용하기’만 한 순정 만화 주인공이 살아가기엔 좀 부적절한 시대였기에 독자들 또한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고자했던 어린 독자들은 ‘슈퍼맨’ 같은 초인적인 영웅 만화나, 힘 있는 로봇이 등장하는 만화, 개구쟁이 또래 어린이들의 모험 명랑만화를 통해 동시대의 암울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었다.
아직도 만화에 대한 열정으로 심심할 틈이 없어요.
이런 시대적 정서는 다른 장르의 만화에까지 확산되어 만화 출판계 전체의 활력이 가라앉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일본 만화의 해적판들까지 쏟아져 들어오게 되니 우리 만화계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장은주 또한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장은주는 1961년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이 타이틀로는 몇 백 종이 되고, 권수로는 천 권이 넘는다. 그러나 한 때 인기를 구가했었던 동료 여성 만화가들과는 교류가 없다.
1961년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이 타이틀로는 몇 백 종이 되고, 권수로는 천 권이 넘는다. 그러나 한 때 인기를 구가했었던 동료 여성 만화가들과는 교류가 없다.
남성 작가들처럼 서로 만나 세상 이야기도 두루두루 나누고 싶었지만, 이미 작고한 만화가도 있고, 이민을 가거나 몇 십 년 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만화계 공식 행사에 자주 나와 조용히 있다가 늘 얼굴만 보이고 가는 장은주는 이범기, 신문수, 그리고 권영섭과 같은 비슷한 연배의 원로들과는 비교적 친하다.
내성적인 장은주에게 ‘친하다’라는 말은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정도의 친분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범기 선생과는 순정 만화를 오랫동안 같이 했다는 인연과 워낙 다정다감한 분이라 가깝게 지냈고, 신문수 선생과는 잡지에 연재 할 때 단행본 출판사와 다른 업무적 특성에 대해 도움말을 많이 해주신 분으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신문수 선생을 말할 때는 ‘신문’사와 ‘신문’수라는 어휘가 재미있었던지 소녀처럼 깔깔 웃는다.
친척들은 친구도 없이 집안에서만 맴도는 장은주에게 ‘얼마나 심심하느냐’ 걱정을 하지만 심심하기는커녕 너무 바빠서 시간이 모자란다.
부군과 함께 가끔 문구류 가게에서 그림 재료를 사거나 서점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일 외에는 거의 집에서 책을 읽고 원고를 준비하며 바쁘게 산다.
자연 과학 서적을 즐겨 읽고, 신비로움, 우주, UFO, 같은 것에 흥미로워 하고, 만화영화 중에서는 ‘환타지아’를 제일 좋아한다는 장은주는 읽고 싶은 책을 사오기만 하면 며칠을 두문불출 하며 책만 읽고 지낸다.
한 때는 자신의 손주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어날 때까지의 과정을 여성 특유의 감성과 경험, 그리고 끝없는 할머니의 손주 사랑을 담아 작품을 하려고 시놉시스까지 준비 했지만 체력의 한계를 느껴 포기를 했다.
필자의 캐릭터를 보고 눈에 띄는 개성 있는 그림이라고 칭찬하면서 약화체 그림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약화체 만화에 대한 관심은 부군 박 선생의 권유도 있었지만, 장은주 스스로도 귀여운 약화체 캐릭터를 만들고 싶어 책도 사서 참고하며 연습을 해 봤지만 습관적으로 순정체 그림으로 나와 고전을 하고 있는 중이란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던 1973년도 인기작품 ‘나를 아시나요’ 가 2016년에 복간되었다.
‘그 옛날을 그리워하던 이들이 가끔은 보고 싶었을 작품’을 보여 줄 수 있게 해 준 청강만화박물관의 배려에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아직도 옛 필력이 줄지 않는 원로 만화가들을 위한 활동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잊지 않았다.
엄마가 되어서도, 할머니가 되어서도 ‘철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순수한 감성의 장은주 선생.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소녀 독자들에게 가족 중심의 고난을 극복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던 순정만화의 판도를, 이국적인 공간과 다양한 로맨스를 곁들인 과감한 창작 활동을 통해 한국 순정만화의 흐름을 크게 바꾼 만화가로 오래 오래 기억될 것으로 믿는다.
장은주(다원)
일본 규슈 생
1961년 장미의 눈물로 데뷔
1968년 ‘빨간 카네이션’, ‘천사의 꽃바구니’ 외 출간
1969년 ‘밀림의 공주’, ‘작은 아씨’ ‘새벽별의 노래’ 외 출간
1970년 ‘설악의 메아리’ ‘옥비녀’ ‘달래와 버들아씨’ 외 출간
1971년 ‘떨어진 꽃잎’, ‘속죄’ ‘밀사의 딸’ 출간.
1972년 ‘이슬의 정’ ‘해가 지면 언제나’ ‘소녀 나디아’ ‘철없는 약속’ 외 출간
1973년 ‘나를 아시나요’, ‘느껴오는 정’, ‘고향 생각’ 외 출간
1974년 ‘유리 동물원’, ‘꿈’ ‘외톨이 소녀’ ‘겨울 손님’ 외 출간
1975년 ‘아기 사슴’, ‘은하수를 넘어서’, ‘아파트의 합창’ 외 출간
1976년 ‘피노키오의 편지’, ‘도토리 산에서 오다’ ‘빨간 일기장’ 외 출간
성인만화 청춘교실발표
1978년 <소년생활>에 ‘천사의 꽃바구니’, 무지개 궁전 연재
1979년 <소년한국일보>에 철없는 약속 연재
1980년 <여고시대>에 두 마리 백조 연재
<소년소녀>에 안나의 미소 연재
<소년 생활>에 ‘천사의 꽃바구니’ 연재
1981년~ 1994년 ‘이슬의 정’, ‘그대의 찬 손’ ‘내 사랑 크리스탈’ 외 다수 출간.
1994년 아가의 영혼 발표
2001년 서울국제만화애니페스티벌(Sicaf) 특별상 수상.
2005년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만화예술창작과 객원교수.
2012년 그림책 ‘나 변덕쟁이 아냐’ 출간
2016년 ‘나를 아시나요’ 복간본 출간(청강만화역사박물관)
현재
(사)한국원로만화가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