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과 다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같다. 올 여름 최고의 흥행작인 영화 <설국열차>와 만화 <설국열차>의 관계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듯 하다. <설국열차>는 원작에서 큰 토대만 가져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거의 모든 것이 다르다. 사람을 얼어죽게 만드는 추위를 뚫고 영원히 달려가는 열차라는 설정은 같지만, 그 외의 이야기는 겹치는 캐릭터조차 없어 보인다. 영화의 주인공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부유한 자들이 모여있는 1등칸부터 열차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인 꼬릿칸으로 나뉘어진 열차 안의 신분제도를 전복하기 위해 혁명을 시도하는 이야기는 원작의 1부에 해당한다. 그러나 만화에는 영화처럼 열차 전체를 관리하는 총리(틸다 스윈튼)도 없고, 칸마다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보안책임자 남궁민수(송강호)도 없다. 혁명에 가담한 다른 캐릭터조차 없다.
<설국열차>에서 원작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매 칸마다 급격하게 환경이 변하는 열차의 설계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좁은 공간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방치되듯 사는 꼬리칸부터 1등칸 사람들을 위한 퇴폐적인 위락 시설까지, 열차 안에 있는 다양한 칸의 모습이 영화 속에서도 상당부분 등장한다. 특히 어둡고 염세적인 분위기의 꼬리칸과 중간 관리자들이 있는 곳을 지나 바하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이 흐르며 화사한 풍경이 등장하는 식물원 칸의 모습은 <설국열차>의 전환점이 되는 장면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설국열차>는 그 칸과 칸을 이동하는 방식을 전혀 다르게 그린다. 원작에서 대규모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은 1등칸 사람들을 향해 저항한 뒤, 내부의 조력자의 도움과 여러 사건을 계기로 얻어 엔진이 있는 열차의 맨 앞까지 나아간다. 반면 <설국열차>에서는 꼬리칸 사람들 전체가 혁명에 가담한다. 혁명을 위해 한 칸 한 칸 전진할 때마다 열차의 앞머리에서 내보낸 더욱 강력한 적들이 나타난다. 칸마다 다른 방식의 전투를 벌이는 액션은 <설국열차>의 흥행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때로는 총격전이 벌어지고, 때로는 어둠속에서, 그리고 도끼와 칼이 퍽퍽거리거나 슥삭 거리며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액션이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칸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그만큼 쉽게 다른 스타일의 액션과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는 것은 <설국열차>가 상업적으로 가진 장점이다. <설국열차>의 이런 전개 방식은 원작과 달라지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설국열차>는 커티스를 중심으로한 꼬리칸 사람들의 혁명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간다. 커티스의 세력들이 한 칸 한 칸 앞으로 나아갈수록 희생자는 늘어가고, 혁명을 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피로감도 커진다. 사실상 <설국열차>의 혁명은 커티스 단 한 사람만이 열차 맨 앞까지 가는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원작은 <설국열차>와 다른 방식으로 혁명에 접근한다. 원작은 장마르크 로셰트와 자크 로브가 그린 1부, 쟈크 로브의 사후 장마르크 로셰트와 뱅자맹 르그랑이 함께 만든 2부로 나뉘어진다. 1부는 <설국열차>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꼬리칸에서 시작한 사람들의 봉기가 엔진실까지 가는 이야기라면, 2부는 두 번째 설국 열차의 등장과 함께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1부에서 엔진실까지 도착한 주인공은 설국 열차의 운행을 맡기로 결심하고 마지막 인류에 대한 짐을 짊어진다. 2부는 사실상 그 뒤의 이야기로, 인류는 설국열차 안에서 자원을 확보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다. 어느 정도 자가 생산이 가능해지고, 산아 정책을 통해 인구도 제한한다. 그만큼 설국열차의 환경은 과거와 달라졌고, 1부처럼 1등칸 세력이 꼬리칸을 억압하는 구도가 아니다. 사람들은 열차 안의 세상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열차의 수뇌부도 대중을 적절히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열차 안에는 대중을 즐겁게 할 위락 시설도 있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줄 종교도 있다.
1부에서 사람들은 한정된 자원을 갖고 갈등한다. 이 때문에 열차 앞 쪽에 탄 사람들이 열차 뒷 부분을 잘라내려고도 한다. 반면 2부에서는 모두가 어느 정도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정치인들은 대중을 속이기도 하고, 영웅을 앞세워 이미지를 조작하기도 한다. 또한 열차 바깥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끊임없이 불어넣기 위해 선발대를 조직하기도 한다. 1부가 자원의 고갈을 두고 부딪히는 시대, 또는 전쟁처럼 폭력과 폭력이 부딪치는 세계를 보여준다면, 2부는 현대 사회의 정치와 사회의 이야기를 다룬다. 1부가 근대 사회에서 전세계적으로 벌어진 계급 갈등, 또는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반영했다면 2부는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경제적 풍요가 찾아오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사회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셈이다.
<설국열차>는 1부를 근간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되, 기묘하게 2부의 이야기를 함께 수용한다. <설국열차>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모든 자원이 유한하다는데 있다. 열차 안의 모든 자원은 하나 둘씩 ‘멸종’ 되어간다. 1등칸 사람들이 꼬리칸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은 그래야 그들이 나눌 자원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는 한정된 자원 안에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세상사에 대한 축약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커티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문제 해결로 혁명을 생각하고, 혁명을 이루면 꼬리칸 사람들도 현재보다는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러나, 그 혁명은 사실상 조작된 것이었다. 꼬리칸의 정신적 지도자 길리엄(존 허트)은 열차의 설계자인 윌포드(애드 해리스)와 내통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늘 적당한 선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끝 맺는다. 혁명으로 1등칸과 꼬리칸의 사람들이 적당히 죽으면 남은 자원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커티스가 혁명을 결심한 것은 길리엄의 순교자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열차가 출발했던 초기에 길리엄은 꼬리칸 사람들이 극심한 서로를 잡아 먹자 자신의 팔을 내놓았다. 이런 지극한 희생은 커티스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커티스는 자원이 한정된 상태에서 그것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혁명의 정신적 지주였던 길리엄마저 윌포드와 내통했다. 애초에 혁명은 자원 고갈과 분배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셈이다. 혁명은 쇼였고, 혁명이 오히려 엔진실부터 꼬리칸까지 이어진 열차의 계급 구성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모두가 행복한 정치체제는 없다. 누군가 희생되고, 그 희생을 통해 모두가 조금 더 나은 생활을 보장 받는다. 과거 길리엄이 혼자 했던 희생을, 이제는 열차의 시스템이 대중 일부를 교묘하게 희생시키는 시스템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커티스에게 혁명을 일으키게 한 억압적인 통치방식이 약육강식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면, 길리엄과 윌포드의 밀약은 약육강식을 정치적으로 풀어낸 셈이다. 원작은 1부와 2부를 시대적인 순서에 따라 배치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정치 제도가 바뀌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설국열차>는 우리가 혁명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윌포드가 말한 것처럼 “모두가 각자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있다”는 기득권이 만든 환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만약 엔진실까지 도착한 커티스가 열차를 이어받아 이끌어달라는 윌포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꼬리칸에서 엔진실까지 가서 1인자가 된 그는 꼬리칸에게 희망의 상징처럼 여겨지며 혁명이 완수됐다는 환상을 심어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원작이 한정된 자원 안에서 어떻게든 사회를 끌고 가려는 현대 정치 시스템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설국열차>는 결국 그것이 기존의 체제를 공고히 하게 되는 비관적인 전망을 담는다. <설국열차>가 왜 이런 비관적인 전망을 담는가는 이 영화의 결말이 드러낸다. 윌포드는 열차가 영원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열차의 부품은 끊임없이 닳아가고 있었다. 그 소모품을 어린 아이들이 기차의 엔진실 내부로 들어가 기계 대신 일하고 있었다. 열차 안의 식량같은 것들 뿐만 아니라 열차 전체가 결국 한정된 자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 지구가 당면한 문제와도 같다. 지구는 얼핏 보면 한 없이 광활한 자원을 쓰는 것 같지만, 결국 한정된 자원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최근 제 3세계 어린이들을 값싼 임금으로 착취하는 문제가 끊임없이 불거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설국열차>는 이 부분에 대한 문제를 열차에 빗대 다룬 셈이다. 자원은 유한하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착취하며 살아간다. <설국열차>는 그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반면 <설국열차>의 원작은 2부에서 우리가 이 한정된 자원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를 다룬다. 이 차이는 원작과 영화가 발표된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작의 1부가 발표된 것은 1984년이었고, 2부는 2000년에 발표됐다. 1984년은 냉전 체제에서 전세계적으로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계급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혁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반면 2000년은 냉전 체제가 붕괴된지 10여년이 지나고,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진 대신 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과거와 달리 누가 적이고 동지인지도 불분명하고, 무엇이 답인지조차 알 수 없다.
원작의 2부인 ‘선발대’와 후속편인 ‘횡단’이 사회의 복잡한 모습들을 다루는 이유다. 열차 안은 과거에 비해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지만, 대중은 열차의 수뇌부가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에만 열광한다. 또한 정치인들은 열차를 유지하기 위해 열차에 대한 비밀을 자신들만이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설국열차>의 원작은 시대별로 세상을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보여주는 셈이다. 그런데, 영화로서의 <설국열차>는 2013년에 발표됐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고, 동시에 지구의 자원 고갈은 환경문제와 함께 전 지구적인 이슈다. <설국열차>가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시대적인 변화를 각각의 이야기로 보여주는 대신 커티스가 일으킨 혁명을 각자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으로 풀어낸다는데 있다. 커티스가 꼬리칸 사람들에 대한 처우에 분노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과거 한국에서도 있었던 민주화 운동, 거슬러 올라가면 프랑스 혁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커티스의 혁명은 윌리엄과 길포드의 내통에 의해 정면으로 부정당한다. 혁명이 사실은 혁명이라는 것. 또는 혁명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커티스 같은 사람이 맞딱뜨린 새로운 세상의 법칙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커티스는 물론 윌포드와 길리엄도 어쩔 수 없는 자원 고갈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설국열차>의 연출자 봉준호 감독도 이에 대한 어떤 대답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구의 자원 고갈은 지금 전 세계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다. 다만 <설국열차>는 단순하지만 인상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가진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많은 대중문화 콘텐츠에서는 계급 갈등이 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곤 했다. 지난해 흥행한 영화 <레미제라블>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혁명을 성공한다 해서 자원 고갈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길리엄이 꼬리칸 사람들이 극도의 배고픔에 시달리던 시절 자신의 팔을 내놓아 먹게 한 것은 숭고한 희생인 동시에 한정된 자원 안에서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는 현실 인식이기도 하다. 윌포드는 그 희생을 혁명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쓴다 해도 열차 안에서 가장 약한 꼬리 칸의 어린 아이가 자원 고갈을 막는 수단이 되는 것은 변함 없다. <설국열차>는 영화 한 편에서 <레 미제라블>로부터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 다시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처럼 지구 전체의 기근과 착취에 대한 문제를 동시에 다룬다. <설국열차> 후반에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뒤엎는 윌포드의 증언과 커티스가 혁명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중요한 이유다. 같은 사건이지만,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풀이된다.
<설국열차>가 영화를 본 관객들이 끊임없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한 것은 이런 관점의 다양성 때문일 것이다. <설국열차>는 원작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개하되, 원작에서 다루고자 했던 사회 체제의 문제에 대해 2013년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원작의 2부처럼 단지 현실 정치 시스템의 문제 제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있는 근본적인 자원문제에 대해 고개를 돌릴 때가 된 것이다. 물론 봉준호 감독 역시 자원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혁명의 진실을 알고 윌포드의 논리에 완전히 설득당한 것처럼 보였던 커티스가 엔진실에서 착취 당하는 아이를 보고 다시 마음이 바뀌는 것은 감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이야기하던 작품이 갑작스럽게 분노에 대한 촉구를 유발하는 흐름은 어색해 보인다.
특히 그 해결책이 남궁민수(송강호)처럼 만약의 가능성을 믿고 열차를 부수는 것은 대안 없는 선택처럼 보인다. 폭파한다고 해서 바깥 세상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를뿐더러, 폭파로 인해 열차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기 때문이다. <설국열차>는 혁명과 사회 시스템에 대해 현실적으로 접근하다 엔딩에 이르러 정서를 바탕으로 비약한다. 엔딩이 어딘가 허무해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에게는 딱히 다른 선택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400억의 제작비가 든 작품에서 커티스가 윌포드의 자리를 이어받고, 그가 윌포드처럼 열차를 통치하는 엔딩을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누가 어떻게 열차를 지배하든 자원 고갈의 문제는 변화 없는 상황에서, 결국 아이들은 착취당할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역할이 바로 거기까지, 우리가 어떻게든 이 문제를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운동권에 몸담았던 경험을 영화에 종종 반영한다. <괴물>에서는 과거 운동권이었다가 변절한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하고, <설국열차>에서 길리엄과 윌포드의 내통은 학생운동의 리더와 형사가 시위의 수위를 어디까지 할지 결정하는 전화통화를 한 것에 힌트를 얻었다. 그가 겪은 청년 시절은 표면적으로 아군과 적군이 뚜렷하게 나뉘어져 있었고, 이기느냐 지느냐의 여부가 중요했다. 그러나 그가 영화 감독으로 겪은 세상은 무엇 하나 뚜렷한 것이 없었다. 그의 데뷔작 <플란더스의 개>는 어떻게든 정교수직을 따내야 하는 지식인의 적나라한 모습이 있었고, <괴물>에서는 무고한 시민이 국가 시스템에 의해 희생당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괴물>은 추운 겨울이 오고, 한강 건너편 어딘가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추운 겨울을 배경으로 <설국열차>가 온 것은 흥미로운 우연이다. 추운 겨울과 함께 단지 혁명만으로는, 싸우는 것만으로는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들이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만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고, 시스템을 지배하는 자들은 세상은 다 그런거라며 여기에 수긍하고, 시스템 안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을 챙기라고 말한다. 심정적으로 수긍할 수는 없으나 눈 앞에 놓인 상황은 이성적으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자원 부족으로 인해 착취당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설국열차>는 90년대와 2000년대, 다시 2010년대에 계속 대중적인 영화를 통해 사회를 말해온 감독의 고민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설국열차>는 원작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원작처럼 고갈되는 자원과 사회 시스템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상반된 결론을 끌어낸다. 원작은 2부에서 진실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정치인들은 대중을 기만하며 자신들만이 열차에 대한 핵심적인 비밀을 안고 있다. 그들은 대중이 진실을 알면 미쳐 버릴거라는 이유로 수많은 진실을 은폐하고, 대중이 정치에 큰 관심을 갖지 않도록 만들기도 한다. 또한 동시에 열차 바깥의 세상이 이제 살 수 있을 만큼 따뜻해졌는지 시도해보기도 한다. 2부에서 열차를 지배하는 세력은 꼬리칸의 사람들을 떼어내던 1부의 승객들과 달리 어느 정도는 공생을 도모하는 셈이다. 하지만 <설국열차>에서는 그것이 모두 불가능한 일이고, 우리는 누군가 착취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원작과 영화의 완벽하게 다른 결론은 여기서 비롯된다. <설국열차>는 결국 열차 안, 또는 지금의 시스템 안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아예 시스템 바깥으로 나가보자고 말한다. 남궁민수는 가장 과격한 방식으로 열차 안의 삶을 끝내버렸다. 하지만 열차 바깥이 견딜 수 있을 만큼 따뜻해졌다는 추측은 맞았고, 인류는 열차 위의 삶을 벗어나 드디어 새로운 시대를 열기 시작한다. 반면 원작에서 모든 희망은 거짓된 것이었다. 정치가들은 희망을 찾아 열차 바깥으로 선발대를 보냈지만, 그들 앞에는 그 어떤 것도 없는 추위 뿐이다. 정치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가짜 희망을 만들어내며 열차 안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 뿐이다. 한 쪽은 살기 위해 진실을 속이고, 다른 한 쪽은 살기 위해 우리가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쪽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고,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은 결국 결과로 판명나는 것 밖에 없다.
다만 <설국열차>가 원작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 것은 그만큼 우리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위기가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대, 또는 2000년대 초에는 우리가 지혜를 모아 지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2013년 현재, 자원 문제는 전 세계 모든 국가의 고민 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동시에 과거와 다를바 없는 약소국, 약자에 대한 착취도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국열차>는 어쨌건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원작은 열차 바깥의 세상은 비관적이었지만 그 안의 세계는 그나마 나아졌다. 반대로 <설국열차>는 열차 바깥에 희망이 있는 대신 그 안의 세계는 명백한 한계를 보여줬다. 스토리로 볼 때 <설국열차>는 희망으로 끝맺음하지만, 이것을 세상에 대한 은유로 볼 때는 비관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설국열차>의 영화와 만화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기묘한 역설인 셈이다. 지금을 받아들이면 다가올 미래를 견뎌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스템을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