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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준의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14 : 김일소, 신동헌

김일소 1916년 경남 합천에서 출생, 본명은 김한성이다. 일본에서 동경예술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부산 <국제신보> 기자로 입사하였으며 만화가로도 활동하였다. 이로써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역시 한국만화를 개척한 언론 만화가 김동성에 이은 또 하나의 인물이 되었다.

2015-10-26 박기준



김일소
1916년 경남 합천에서 출생, 본명은 김한성이다. 일본에서 동경예술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부산 <국제신보> 기자로 입사하였으며 만화가로도 활동하였다. 이로써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역시 한국만화를 개척한 언론 만화가 김동성에 이은 또 하나의 인물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 그는 학창시절부터 일본 만화에 관심을 갖고 즐겨 봐왔다. 볼 뿐만 아니라 습작을 통해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그는, 1955년 시사만평과 4컷 연재만화 <고추장군>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어린이 캐릭터로 성인 사회를 풍자한 <요미우리 신문>의 <후쿠짱>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고추장군>은 이 <후쿠짱>과 견줄 만한 좋은 작품으로, 어린이 캐릭터 고추장군의 활약상을 연속만화로 날마다 네 컷씩 나누어 그렸는데 두 달간 연재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지방지에 최초로 실렸던 국내 만화가의 4컷만화였다.


5월부터는 ‘이바람 저바람’이란 고정란을 신설, 만화 만문도 게재하였고 ‘시시비비’ 같은 만문 시리즈물도 실었다. <만화부락>, <역설치부비결>, <추석비곡> 등 김일소의 일요 만화 시리즈는 장기 연재되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사회풍자 만평 4컷짜리 <엉터리>를, 그리고 1958년에는 <주대포>를 연재하며 인기를 유지하였다. 김동성이 미국 유학 중 서구만화에 심취하여 연구했다고 한다면 김일소는 일본 만화를 전문 연구한 언론인 만화가라 할 수 있다. 그는 해외만화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독자란도 설치하여 신인 등용문의 길도 열어 주었다. 1958년 4월에는 부산 지역의 만화가 협회도 결성, 합동작품을 만들어 <국제신보>에 심심치 않게 발표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덕분에 안기태 등 경상도 지역 출신의 작가가 많이 등장하였으며, 지방 신문계의 대부로도 알려지고 있을 정도다. 1961년에는 대구 <매일신문> 편집국장으로 부임했는데, 서울의 여러 신문과 성인, 아동지에도 만화 작품을 기고하여 활동반경을 넓혔다. 그리고 지방에 있으면서 국내 최초로 설립된 한국만화가 협회 부회장도 맡아 회장으로는 김용환, 고문으로 김규택, 김의환, 임동은, 최상권, 신동헌 등을 주축으로 한 단체를 결성, 만화계의 친목과 작가의 권익 및 발전을 위해 활동하였던 만화가로 만화계를 위해서는 매우 기여도가 높은 인물이다. 1962년 상경, <삼중당>의 주간직을 맡은 그는, ‘한국아동만화 윤리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나 47세라는 너무도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도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하고 만다. 만화계를 비하하며 하나둘 선배들이 떠나던 그 시절, 한국만화의 발전을 위해 전력으로 협력하였던 전업만화가 김일소의 공로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 <제1회 문화인 야구대회(1960년 초)>

△ <영화배우팀과 만화가팀 야구대회 포스터(1958년)>

신동헌
1927년에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다. 1946년 해방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정착하게 된다. 서울 문리대에 입학한 수재였지만, 생활비와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평소부터 익혀 온 그림 솜씨를 이용, 충무로에서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47년, 만화계의 거목 김용환이 우연히 그의 그림 솜씨를 보게 되고 한눈에 재질이 있음을 알아본다. 그의 도움을 발판으로 신동헌은 <스티브의 모험>이란 작품으로 아동주간지에 데뷔할 수 있게 되었다. 1948년에는 톨스토이의 소설을 만화화한 <감옥의 천사>를 단행본으로 펴내면서 목돈도 들어왔고 차차로 컷과 삽화도 그리게 되면서 그의 생활은 점점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같은 해 우리나라 최초의 성인만화 주간지 <만화행진>이 김용환 발행 겸 주간, 수필가 김소운의 편집에 의해 탄생하였다. 여기엔 임동은, 이영춘, 김의환, 김성환, 이병주 등과 김소운의 만문 등이 실려 있었다.
이 잡지의 편집 일을 하면서 작품도 발표하게 되니 불규칙했던 수입도 안정되고 그대로만 진행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침내 한국전쟁이 터지고 만다. 그는 피난 차 부산으로 내려갔고, 휴전이 되던 1952년까지는 피난지에서 겨우겨우 끼니만 해결하면서 버텨야 했다. 이윽고 휴전이 되자 그에게 단행본 청탁이 들어왔다. <엉터리 목공소>, <사자소년> 등의 작품을 펴내며 <연합신문>에 그림 담당으로 취업이 되니 그런대로 다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54년에는 <학원>지에 실린 조흔파의 인기 연재 명랑소설 ‘얄개전’에 대한 삽화 청탁이 들어오게 된다. 또 <학생계>에는 <럭키 칠봉이>를 연재하게 되니 쉴 새 없는 작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단행본 <왈가닥 왈직이>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1954년 상경한 그는, <연합신문>에 4컷 연재만화 <주태백>과 김팔봉의 연재소설 ‘푸른 날개’의 삽화도 맡게 되었다. 또 <새벗>지에는 <뺑손이>, <학원>지에는 <가라사대 영감님>을 연재하며 인기 만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 은사 김용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신당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 <[자유의 동상](1953년)>

△ <신문연재만화 [주태백](1954년)>

1955년 최초의 한국만화가협회가 탄생하자 김용환을 회장으로 옹립하고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된다. 1956년에는 <만화 춘추> <아리랑>지에 <너털주사>를 연재하는데, 이때쯤 만화가들의 모임도 잦아졌다. 바야흐로 만화가들의 본격적인 경쟁시대도 시작된다. 상승하거나 뒤처지는 만화 그룹이 생기면서 세대 교체가 시작된 것이다. 처남인 김경언은 잡지와 신문에 <두꺼비>를 연재하면서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청소년에서 성인 잡지, 그리고 단행본까지 최고의 자리에 군림하는 인기스타로 각광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은사 김용환이 일본으로 돌아가 버려 신동헌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66년 신동헌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는 애니메이션계로 이동해서 TV 홍보용 ‘진로소주’ ‘뽀뽀뽀’ 등을 제작해 기초를 다졌다. 그 후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을 제작, 감독이자 투자가로서 총력을 다하였다. 동생 신동우의 <소년조선일보>에 실려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만화 <홍길동>을 극화한 것이다. 이 작품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기점으로 후진들 사이에선 애니메이션 붐이 일게 되어 ‘로봇 태권V’ ‘아기공룡 둘리’로 시작, 최종적으로는 ‘뽀롱뽀롱 뽀로로’라는 대작을 건져내기까지의 국제화의 기틀을 잡게 된다.
그의 업적은 근대만화에서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충분히 갈채를 받을 만하다.

△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년)>

△ <[호피와 차돌바위](196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