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서울신문>의 제1면에 신선한 한 컷짜리 시사만화가 처음 실렸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문제로 정신이 없는 유엔에게 한국 문제도 눈여겨 봐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의 만화였다. 1949년, 매주 일요일의 2면에 ‘어린이 특집’ 난이 신설되었는데 이것은 신문이 나중에 4면으로 증면되면서 ‘주간어린이’로 고정이 된다. 이 어린이 페이지에 <수정이>를 시작으로 시사 4컷 만화 ‘38선’이란 어린이 캐릭터를 등장시키게 된다. 캐릭터의 머리 가르마를 두 갈래로 나누어서, 한스럽기 짝 없는 38선이라는 분단의 우리 현실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동은은 청소년과 성인용 시사만화, 연속만화, 삽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을 했다. 월간지 <조광> <신동아> <별건곤> 같은 당시 국내 유명잡지를 주 무대로 삼아 웅초 김규택, 정현웅 등과 함께 흔들리지 않는 아성을 쌓았다. 그의 우수한 데생력과 기본기는 주위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사면서 개그만화에서 극화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실력을 발휘한다. 해방이 되고 국내 출판물이 활성화되면서 청소년 만화 붐이 일기 시작하자 1946년 4×6판 24쪽의 컬러만화 <효동이>, <코공주>, <늑대소년> 등을 발표하였다. 한결같은 인기 작품들로 김용환, 김의환과도 당당한 경쟁 상대로 인정받았던 인기만화가였다. 해방 전 음악을 전공한 동생과 함께 월남, 한국전쟁 한 달 전에 결혼하였던 그는 당시 만화계와 삽화계에서 가장 촉망 받던 젊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군 수복 때, 북한에 협조하였다는 혐의로 고초를 겪다 못해 사망하게 된 아까운 인재의 하나로 기록된다.
191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일본 ‘오사카관서학원’ 미술학부 졸업.
귀국 후 신문잡지에 투고를 시작으로 만화계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해방 직후 만화계를 리드하며 신문 잡지를 석권하고 단행본의 황금시대를 연 김용환 형제와 김규택, 정현웅, 임동은의 5인방 시대를 뛰어넘은 청소년 극화 만화가는 단연코 최상권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기존 선배들이 즐겨 사용하던 국내외 명작이나 역사 전기를 편작한 것이 아니라, 국내외 전설 등 판타지 만화였던 것이 특출하다. 말하자면 신비한 소재를 자기 것으로 윤색해서 선배들과 차별화한 것이 그의 성공의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8년, 4×6판 <차돌이의 모험>, <몬델 왕자>, <그림자>로 데뷔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에 이른다. 그의 주가는 1950년에 <고비산맥>, <깨진 접시> 등을 발표하면서 더욱 높아져간다. 신비하고 괴이한 세계로 끌고 가는 옛이야기는 독특한 화필에 의한 묘사로 상상력을 더욱 배가시켰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발표되는 족족 남녀 모두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또 1951년에는 우리 순정만화의 전형을 최초로 보여 준 감성만화 <소년 미술가>를 선보여 깊은 감동과 인기를 유지했다. 특히 그의 <흘러간 삼남매>는 원로 만화가 오명천과 장은주도 당시 보고 또 봤을 정도로 매료되어 오래 잊지 못하였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며 기록으로 남겼다. 1952년에는 국내 최초의 공상과학 극화 <인조인간>, 그리고 <헨델박사>를 신 4×6판 시리즈로 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대가 변하는 가운데서도 그가 펴내는 작품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김용환이 주도했던 초기 한국 만화가 단체에 회원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청소년 극화가로서 후배들에게도 귀감이 됐던 인재다. 한국전쟁으로 잠시 작품을 중단했던 그는 휴전이 성립되면서 신문, 잡지 출판사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서울로 상경하였다. 1956년 한국 최초의 청소년 만화 전문지 <만화세계>를 펴내기 위한 밑준비로 발행인 김성옥은 한창 바빴다. 그는 교육계 출신으로서 출판 경험도 있었으며, 일본만화 <밀림의 왕자>를 해적판으로 만들어 성공을 거두었던 장본인이다. 그는 만화계의 인맥을 통해 편집 총책을 맡길 주간으로 최상권을 택한다. 이렇게 해서 4×6판 200쪽 분량의 <만화세계>가 탄생하게 되고, 기록적으로 십만 부 이상 팔려 나가는 기록적 인기 잡지로 거듭나게 된다. 이에 자극받은 청소년 만화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출간되어 본격적 잡지 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창권은 1958년 고전하고 있던 <만화학생>지를 인수해 사장으로 취임한다. 고일영(고우영의 작은 형)을 편집장으로 영입하고 제자 신현성을 편집부에 참여시키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모처럼의 잡지 붐도 싸늘하게 식어가면서 고전을 거듭한 끝에 부산으로 피신하고 만다. 1961년 그는 부산 지역에서 재기를 꿈꾸며 ‘문철’이란 이름으로 개명, 작가로서의 활동을 재개하였다. 극화체를 귀여운 약화체로 바꾸어서 <목탁>, <멘소로> 등의 시리즈를 펴내는데,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신비의 세계의 보물을 찾아가는 모험 장편 판타지 시리즈로서 <아라비안나이트>를 편작한 작품이었다. 1962년에는 <덕보삼보>, <신동 태무장>, <백두건과 유랑왕자> 등의 시리즈와 <염라대왕> 같은 작품을 계속 펴내며 인기를 회복하게 된다. 작품 활동 외에 부산 지역의 청소년 만화잡지 편집도 맡아서 서정철, 오명천, 손의성 등 경남 지역의 신인 만화가들이 데뷔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70년 상경한 그는 ‘한국만화가 협회’의 전신격인 청소년 만화 윤리 위원회 회장으로 임명되어 만화가의 권위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안타깝게도 사망하고 만다.
초지일관 청소년 만화계에 몸담았던 단행본 극화의 개척자로, 만화가로서는 최초의 편집 주간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최상권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쉽게 잊히지 않은 채 그의 독특한 극화류는 박기당, 서정철, 계월희, 조치원, 이두호 등의 계보로 이어져 오고 있다.
단행본의 황금기를 논하자면 청소년 극화 단행본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최송산(최상록)을 빼놓을 수 없다. 1919년 만주 간도에서 출생. 간도 공업학교에 재학할 때부터 문학과 미술에 심취했던 그의 재질을 알아본 월간 <백민>지의 사장이 그를 출판계로 이끌게 된다.
1947년 신비 판타지 극화 <악마의 동굴>로 데뷔, <금돌이와 꼽새> 등을 발표하며 청소년 만화가로서 자리를 굳혀 갔다. 1949년에는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미국의 ‘타잔’ 영화를 편작하여 극화로 펴내면서 인기 작가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 후 <녹스른 칼>, <콩순이 팥순이>에 이어 세계 명작 레미제라블을 편작한 <마무정>을 펴내며 맹활약하였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2년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휴전 중 호구지책으로 출판업에도 참여하였다. 그 시절 일본 만화가 야마카와 쇼지의 <밀림의 왕자> 시리즈가 해적판으로 출간되어 크게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에 착안하여 그의 또 다른 장편 극화 <소년왕자>를 구입, 신 4×6판으로 조금 두터운 용지에 양장의 서점용으로 2부를 제작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 시절 서점용으로는 값이 비쌌기 때문에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결국 실패작으로 끝나게 된다. 1954년 전쟁이 종료되고 안정기에 접어들자 그는 다시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름도 최상록으로 개명하고 당시 청소년들에게 가장 관심이 많은 반공 전쟁만화 <싸우는 두 용사> 시리즈를 4×6판으로 펴내며 서서히 인기를 회복하였다. 한국 전쟁 중 호된 경험을 한 그는 무거운 극화체를 간략하고 귀여운 순정형 그림체로 변경한다. 스토리 또한 그 시절 우리 주변의 체험을 주 소재로 삼았다. 이산가족의 이야기나, 시대의 아픔과 가난을 헤치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감명 깊게 그려서 재기에 성공하였다.
1962년에는 피난민 ‘또순이’의 이야기를 발표했고, 일본에서 학대받다가 귀국해서도 반쪽발이라고 설움 받는 <일본에서 온 아이’>시리즈를 펴내 각광을 받았다. 그밖에 <노란저고리>, <은숙이>, <오빠만세>, <말숙이>, <고아소녀>, <식모반장>, <버스여차장> 등등 많은 작품이 있다. 그 시절 전후 세대 우리 누구나의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들로서, 만화가 협회에 소속되어 원로작가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만화가 본격적으로 대본소 시대에 돌입하게 된 이후 그의 작품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후배 작가 정훈은 이런 흐름을 이어받아 <부엌숙이>를 <아리랑 잡지>에 연재했고 <여학생 숙이> 시리즈도 펴냈다. 순정만화가 송순희도 <빈 도시락> 등 그의 작품들의 영향을 받았을 만큼 이산가족 시대에 하나의 유행을 만들었던 작가다. 하지만 한창 일할 나이에 투병생활 끝에 안타깝게 사망한다.
해방 후 우리 청소년 판타지 극화를 실감나게 보여 주었던 최상록을 독자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