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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준의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15 : 김윤항, 고상영 삼형제

김윤항 1949년에 <심청전>을 선보인 후 <아리아공주>를 출간, 인기를 끌었던 김윤항. 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예쁜 그림체를 선보이며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가다.

2015-10-26 박기준



김윤항
1949년에 <심청전>을 선보인 후 <아리아공주>를 출간, 인기를 끌었던 김윤항. 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예쁜 그림체를 선보이며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가다. 주인공 캐릭터는 항상 여자였고, 훗날 일본 순정만화의 기초를 확립한 데즈카 오사무의 <리본의 기사>와 흡사한 시대물로 주목을 받았던 작가였다.

△ <[심청전](1949년)>

<주먹대장>으로 알려진 김원빈의 스승으로서 김원빈의 캐릭터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그런 스승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김윤항의 그림은 그 시절 어느 누구와도 유사하지 않을 만큼 개성이 강했다. 내용도 좋았지만, 한 쪽 한 쪽씩 떼어 병풍으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표현에 따른 채색도 무척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후 그의 작품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만은 강한 인상을 후세에까지 남기며 회자되고 있다.
김윤항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면, 한국전쟁 때 침략자 김일성을 비난하고 공산군에 가담했던 북한 장병들에게 귀순을 종용하는 삐라에서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가정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은 김일성 때문이라는 문구와 그림으로 표현한 삐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조국을 위해 헌신하였던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2010년 ‘보이지 않는 전쟁 삐라전’이 청계천 문화관과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수많은 관람객이 끊임없이 찾아 주어 안보에 관한 경각심을 고취해 주었다.


고상영 삼형제
고상영, 고일영, 고우영 3형제는 만주 본계호 출생으로 해방과 함께 서울로 귀국했다. 3형제 모두 그림에 대한 타고난 소질을 갖고 있었고, 평소의 데생 실력은 고상영이 ‘서울미대’에 입학한 후 더욱 일취월장하였다. 고상영은 1946년 주간 <소학생> <소년> 등에 원고를 투고하기 시작했는데, 투고하는 족족 지면에 오르면서 실력을 키워갔다. 1951년 세계 명작동화를 편작한 <백조왕자>, <인어왕자>를 시원시원한 그림 연출 솜씨로 발표하면서 독자들의 대환영을 받으며 보기 좋게 만화가로 데뷔하였다. 만화만이 아니라 잡지 컷에서 삽화 실력까지 인정받으며 일감이 밀리게 되더니, 나중에는 교과서 삽화까지 맡게 되어 고정 수입이 생기게 되자 가족들은 생활상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고상영의 바쁜 일을 거들던 둘째 고일영 역시 서울미대 재학시절부터 형 못지않은 실력자로 이름 높았다. 1955년 단행본 <견우직녀>, <천년의 비밀>, <모험왕의 세계모험>과 <짱구박사> 시리즈를 연속으로 펴내며 그 역시 인기작가 대열에 들어섰다.

고우영은 두 형으로부터 넉넉한 용돈까지 챙겨 받으며 호강 속에 자라고 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이들 가정의 행복도 앗아가고 말았다. 피난지 대구에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할 만큼 좁은 셋집에서 지내며 그들의 고난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차 뜻밖에도 김성환의 주선으로 국방부 기관지인 <만화승리>의 편집진에 문관의 몸으로서 합류하게 되었다. <만화승리>란 국군과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필요한 만화지로서 김성환이 편집자를 맡고 있었다. 군에서 필요한 만화나 컷, 삽화, 포스터나 유인물까지도 명령이 떨어지면 그 즉시 만들어내야 했다. 이윽고 휴전이 되자 문 닫았던 출판사들도 하나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며 출판물 간행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때 고상영은 <내가 넘은 38선>이란 반공만화 단행본을 펴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

△ <[백조 왕자](고상영 작)>

△ <[짱구박사](고우영 작)>

1956년 다시 서울로 상경한 이들 삼형제에겐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활짝 열려 있어서 행복이 손에 잡힐 듯했다. 그러나 맏형 고상영이 고혈압으로 쓰러지게 되고, 다음 해에는 <만화학생>지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던 고일영마저 고혈압으로 사망하는 불운이 닥친다. 혼자 남아 졸지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된 고우영은 작은형이 즐겨 그리던 캐릭터 ‘짱구박사’를 활용한 작품을 만들어 1962년 잡지와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형들의 소질을 물려받았던 그는 시대극화 <임꺽정>을 <주간 한국일보>에 연재하여 기대 이상의 히트를 치게 된다. 이후 급속히 최고 인기작가로 성장하게 되면서 성인만화 시대를 활짝 열었다. 1989년에는 <한국만화가협회>의 회장직도 맡아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활동하였으나 칠순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장염으로 사망하고 만다. 수많은 팬들과 동료들이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애도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