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소련과 중공군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에 의해 한국전쟁이 발발, 유사 이래 가장 참혹한 희생을 치르게 된다. 서울은 물론 충청 이남 지역으로 진격해 내려간 북한군은, 자신들의 정치 체제와 사상의 우월성을 홍보하기 위해 인기 만화가와 화가들을 반강제적으로 소집하여 긴급 작업에 동원시켰다. 해방 전부터 인기 만화가이자 화가로 언론계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정현웅과 이갑기가 북한의 지시에 따라 모든 작업의 책임자로 떠올랐다. 웅초 김규택, 김용환, 임홍은 그리고 초상화 부분에서는 청전 이상범, 운보 김기창 등이 북을 찬양하고 남한 정부를 비방하는 시사만화형 홍보 전시물과 전단지, 포스터, 초상화 등을 그리는 일에 동원되었다. 그들의 작업은 쉴 새 없이 진행되어 만들어지는 대로 인쇄되어서 곳곳에서 북한을 선전하는 데 이용되었다. 미군이 주축이 된 UN군의 참전으로 다시 수복이 되었다. 9.28 유엔군과 국군의 인천 상륙으로 남한은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지만, 강압에 못 이겨 북에 이용당했던 만화가나 화가들은 이후 3개월 여 여죄를 추궁 받아야 했던 혹독한 수난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4개월 만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때 정현웅, 임홍은, 이갑기 등의 만화가는 북한군과 함께 월북했다.
중부전선에서는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산, 대구에서 정부 행정 지침이 하달되고 있었다. 전시 체제였지만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만화가들도 국가 시책에 적극 동참했다. 국방부에서는 <만화승리>, <육군화보>, <만화신보>, <사병만화> 등을 발행하였는데, 국민과 국군의 사기를 높이고 일치단결을 꾀해 승공하라는 취지를 강조한 뉴스와 오락성도 겸한 얇은 책자들이었다. 편집책임은 김성환이 맡았고, 고상영, 이병주, 이재화, 이상호, 정한기, 정준용 등이 참여해 계몽 포스터와 심리전과에서 의뢰한 삐라를 그리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정훈국 소속 미술대에서 근무했다. 살포용 삐라는 분량이 너무 많아서 일본 규슈 지역의 인쇄공장에서 제작하여 공수해 오기도 했다.
한국 전쟁 중 김용환과 함께 만화 출판의 첫 주자로 나선 만화가는 김성환이었다. 1951년 반공 전쟁 무용담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해 펴낸 60여 쪽의 단행본 <도토리용사>와 <꺼꾸리군 장다리군>, <고사리전> 등 잡지 만화를 발표하였는데, 전시 상황에서 불안과 긴장, 암울한 현실에 절망하고 사기가 떨어진 국민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용기와 꿈을 키워 준 명작들이었다. 해방 전의 최고 만화가가 김용환이었다면 한국전쟁 전후 만화가로서는 단연 김성환을 꼽을 수 있다. 당시 만화와 함께 대중들에게 화제가 되었던 소설로는 대학생들이 협력하여 교묘하게 일본 헌병과 경찰을 속이며 독립군을 돕는 김내성의 항일 추리소설 <청춘극장>과 갑자기 밀려든 서양풍물에 젖어 춤바람이 난 대학교수 부인의 행태를 풍자한 정비석의 문제소설 <자유부인> 등이 오래도록 식을 줄 모르던 인기 베스트셀러였다. 또 흑백영화 ‘춘향전’이 부산 동화극장에서 상영되어 대환영을 받았던 시대이기도 하다.
1958년 휴전 기간에 반가운 손님이 방문했다. 참전 UN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미국 문화예술계의 명우 마릴린 먼로, 봅 호프 일행과 인기 만화 <매기와 지그스>의 조지 맥 마너스, 그리고 <헨리>의 딕 하딘스 등 여덟 명이 일주일간 와서 서울에 체류하게 된다. 당대 인기 만화가들이 한국 만화가들과도 친선 간담회를 가졌던 것은 물론이었다. 한국 대표로는 김용환, 김성환, 신동헌, 안의섭, 이병주, 정운경, 박광현, 정한기, 박기정 등이 참여해 우의를 다졌다. 청소년 만화 단행본들은 그동안 크게 인기를 누려 왔으나 이 시기엔 대공황기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휴전기간이 길어지면서 꽉 막혀만 있던 숨통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한다. 빈약한 용지사정과 인쇄시설 속에서도 1952년 100여 쪽의 일본만화 <밀림의 왕자>의 해적판(상하권)이 대히트를 치게 된다. 이에 용기를 얻어 박광현도 6×4판으로 32쪽짜리 <숙향전> 상하권을 발표하였으며, 김종래의 <눈물의 수평선>, <어사 박문수> 같은 작품도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들 만화가 그때로선 가장 잘 만들어진 책이었으며 피난지에서의 반응도 뜨거웠다. 이런 만화들이 있어 청소년들의 행복감도 더했을 것이다.
김종래는 훗날 한국 시대극화계의 대부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조잡하고 엉성한 16쪽 딱지만화와 떼기만화가 등장한다. 제작비를 아끼려고 최저가로 만든 만화로 판매용이라기보다는 먹거리 껌이나 캐러멜, 풍선 등을 팔기 위해서 끼워 파는 경품용 만화였다. 이런 만화들은 한국 전쟁 기간에 크게 유행했던 보잘것없는 만화였지만 그런대로 한몫을 했다. 3년 간이나 지루하게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38선 인근에서 마침내 휴전이 성립된다. 총소리는 멎었지만 양측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32년 개성 출생.
1949년 일간 <연합신문>에 4컷 카툰 <멍텅구리>를 연재하며 데뷔.
1950년 주간 <만화뉴스>에 기자 겸 전속작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최고의 인기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의 최전성기 대표작은 훗날 영화화되기도 한 <고바우영감>이다.
<고바우영감>은 1955년 2월 1일 <동아일보>를 통해서 등장한 4컷 카툰이다. 처음엔 판토마임 기법으로 생활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소재로 삼았다. 그러나 4·19로 정치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사회 상황 속에서 시사카툰으로 변해 열렬한 독자들의 환영을 받게 된다. 이후 50년 간 꾸준히 연재되어 최장수 신문만화로 등재될 만큼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고바우영감> 등 신문의 시사카툰 작품들은 한국 역사에 빛나는 민주화 열풍을 일으키고 마무리되기까지 커다란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성환은 필화사건으로 고난의 시기를 겪기도 한 인물이다. 1956년 현대만화가협회의 탄생을 주도하며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미국에 본부를 둔 <국제만협(N.C.S)>에 가입하고 카툰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만화의 위상을 높여 나가기 위한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작가들을 한 울타리 안에 끌어들여서 힘을 하나로 합치고 친목, 사회봉사, 문화인 야구대회 등에 적극 참가시킴으로써 한국만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만화계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의 만화와 수필집 등은 해외에서도 출간되어 명실공히 세계적인 만화가 대열에서도 인정을 받는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김성환 작가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문학 박사도 있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1991년 ‘언론장학회’가 제정되었을 때 제1회 언론상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자비로 ‘고바우 만화상’을 제정, 매년 만화 창작에 크게 이바지하였거나 만화 문화 발전을 위해 공헌한 만화가를 선정해서 상장과 상금을 수여함으로써 만화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얼마 전 한국전쟁 기록화를 정리, 한국과 일본에서 전시회를 가져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지금도 한국화와 도자기 전시를 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천재는 구경꾼 속에서 태어난다고 하였다. 대한민국 만화 문화의 물줄기를 터뜨린 김성환의 <고바우영감>은 박물관에 영구 보존하고 전시되어 후손들에게 절대 잊힐 수 없는 업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