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UN의 경제 원조에 힘입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우리나라의 복구 건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문화산업도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휴전기간 동안 피난지에서 하나둘씩 간행되던 학생과 대중지에 이어서 <주부생활> <화제> <실화야담>이 속속 창간되면서 잡지의 전성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잡지 만화에서의 인기 작가는 일간지에서도 주목하고 있다가 스카웃해 가는 일이 빈번해, 많은 신인들이 대거 등장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로 말미암아 잡지의 위세가 일시 쇠퇴해 가는 듯 했다. 1955년부터 김성환이 <동아일보>에 4컷 시사카툰 ‘고바우 영감’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음과 동시에 신문의 발행부수도 크게 영향하는 것을 본 타 신문사에서도 만화 게재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어 인기 작가 모시기 경합의 발동이 걸렸다.
<경향신문>에서는 안의섭의 ‘두꺼비’, <서울신문>은 김기율의 ‘도토리’를, 또 <연합신문>은 신동헌의 ‘주태백’을 싣기 시작했다. 정운경은 <중앙일보>에 ‘왈순아지매’를 연재하게 되었고 박기정은 <세계일보>에 ‘뚱딴지’를 각각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런 추세는 서울 지역의 신문만이 아니라 지방지에까지 이어졌다.
4.19혁명을 전후한 시기에는 만화의 인기가 더욱 높아져서 각별한 대우를 받았던, 신문만화의 르네상스 시대라 할 수 있다. 1956년에는 신문과는 별개로 청소년 만화 전문 잡지도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문화사>의 김성옥이 펴낸 만화 일간지 <만화세계>가 출간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최상권의 극화 ‘만리장성’, 그리고 박기당의 ‘어사 성성이’, 김경언의 명랑만화 ‘칠성이’, 신동우의 ‘똘똘이’가 연이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밖에도 박현석의 무협만화 ‘바람돌이’, 임수의 ‘차이나 박’, 김정파의 순정 그림소설 ‘흰 구름 가는 곳’ 등이 실려 독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56년 11월에는 4×6배판 40 쪽 분량의 가벼운 볼거리로 <만화춘추>가 등장해서 인기를 끌었다. 이는 주로 유머 위주의 시사성에 오락을 가미한 대중지였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성인 만화지도 붐을 이루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신문과 잡지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인기 만화가 위주의 작품들로 지면이 채워졌다. 김성환, 신동헌, 김경언, 정운경, 김기율, 박기정, 심홍택, 한성철, 정한기, 이병주, 백인수, 이상호, 이재화 등등의 필자였다. 성인지의 붐에 힘입어 <만화천지> <월간만화> <만화타임즈> 같은 경쟁지도 등장했지만 대부분 비슷한 편집 형태와 동일한 작가들의 작품이 많아 차차로 붐도 식어가고 있었다. 다만 그 후로도 청소년 만화지의 붐은 한동안 계속 이어져 갔다.
그러나 <만화학생>, <만화 소년>, <7천국>, <우리 세계>등 많은 잡지들이 속속 창간되자보니 인기 작가 모시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겹치기 작가가 속출하는 불안한 경쟁 사태로 이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 작품에 집중하기보다 다작에 열을 올리는 작가들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질보다는 양에 치중하다 보니 작품에 실망한 독자들이 흥미를 잃게 되는 건 당연하다. 독자를 잃게 되면 모체인 잡지는 구매력을 잃게 되고, 경영에 악순환을 견디다 못해 하나둘 문을 닫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책으로 <만화세계사>가 재빨리 단행본을 기획하여 발간하기 시작한다. 이산가족을 주제로 한 김종래의 시대극화 ‘엄마 찾아 3만리’는 이렇게 해서 태어난다. 이어서 임수의 명랑만화 ‘거짓말 박사’ 상하권을 240쪽으로 양장 출간하면서 대성공을 거두자, <성문사>에서도 뒤질세라 국내외 명작들을 극화로 만들어서 4×6판 240쪽짜리 고급 초호화 양장본으로 펴내 서점가를 장식하였다.
김종래의 ‘충신비사’, 박광현의 ‘임거정전’, 박기당의 ‘눈물의 절벽’, 추동식(고일영)의 ‘쿼바디스’, 신동우의 ‘삼총사’, 그리고 김정파의 ‘아! 무정’ 등 십여 권으로 만화사에서 가장 화려한 극화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1950년대 후반의 최고 인기 청소년 만화가는 극화가 김종래였다.
그러나 단행본 극화 붐도 서서히 식어가는 시기가 왔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만화세계>마저 경영 악화로 판권을 이양하게 된다. 이렇게 청소년 만화계에 위기가 감돌고 있던 1958년 무렵, 새로운 형태의 만화들이 구세주처럼 등장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기존 240 쪽이었던 호화 만화의 쪽수를 128 쪽으로 크게 줄이면서 실용성은 높여, 고급양장이 아니라 하드커버를 씌워서 깜찍하게 만든 반값의 캐주얼 만화였다. 부피가 많은데다 스토리도 장황했던 것에서 가볍게 요약해서 경쾌한 기분으로 읽을 수 있는 스토리만화가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는 날개 돋친 듯 서점에서 팔려 나갔다. 김경언의 ‘칠성이 유격대’ 시리즈, 신동우의 ‘아리랑 결사대’, 박현석의 ‘구름동자’, 김근배의 ‘멍청이’, 임수의 ‘자랑스런 소년’, 박기정의 ‘별의 노래’, 박기준의 ‘두통이 어디로 가나’, 김원빈의 ‘주먹대장’ 고우영의 ‘짱구박사’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한편, 당시 활약하던 만화가들 사이에서 크게 두 부류의 그룹이 형성된다. 이것은 잡지나 아동물을 중심으로 한 소위 보수파 그룹과, 주로 신문 잡지 작가들로 구성되어 성인층 만화와의 분리를 주장하였던 혁신파 그룹이었다. 김일소, 김의환, 최상권, 박광현, 박기당, 신동헌, 김경언, 백인수, 정한기, 신동우, 김정파, 박현석, 임수, 신현성, 황정희 등 보수파들은 김용환을 회장으로 옹립하여 <대한만화가협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명동 몽블랑 다방을 연락장소로 삼았다. 한편 안의섭, 정운경, 김기율, 박기정, 길창덕, 이재화, 한성철, 고두현, 노석규, 박기준 등 혁신파들은 김성환을 회장으로 하는 <현대만화가협회>를 결성했고, 모임 장소로는 동방다방을 정해두고 있었다. 이 두 협회는 릴레이 만화, 합작 만화쇼, 만협전, 반공만화전, 문화인 야구대회 등 대외적 활동에 있어서는 합심해 일했지만 5.16이후 두 단체 모두 각각 해산되었다. 그 후 대한만협과 현대만협의 통합 협회가 1968년 10월, 사단법인 <한국 만화가 협회>라는 새 명칭으로 출범, 정식으로 종로구 당주동에 사무소를 설립하고 정관에 의해 임원선출을 하여 출발하게 된다.
초대 회장에는 박기정, 부회장에 권영섭, 이사로는 신동우, 김기백, 서정철, 손의성, 백산, 이근철, 심명섭, 그리고 감사로는 황정희, 고우영, 대의원으로는 김기율, 김정파, 이상호, 박광현, 김종래, 박현석, 김경언, 유세종, 정한기, 이종진, 박부성, 박기준 등이 선출되었다. 이 단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며 국내 만화계의 발전을 위한 지속적인 활동과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1922년 함북 북청에서 출생, 해방되던 해 월남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전투경찰대에 입대해서 반공포스터 및 홍보물 제작 부서에서 활동, 그림과 디자인에 열중하면서 만화가의 꿈을 키웠다.
학창시절에는 일본 학생지에서 즐겨 보았던 ‘타잔’을 패러디한 ‘모험 당길이’를 보며 모작 취미를 가졌던 미술반 학도였던 만큼, 종전 후 경찰관으로 근무하면서도 틈틈이 만화작품을 만들어 신문, 잡지사에 투고하며 실력을 기르고 있었다.
그 당시 <동아일보>에 ‘고바우영감’을 연재하고 있던 김성환은 최고 인기만화가였다. 그는신문이나 잡지의 지상에 투고하는 신인만화가들을 선발하고 평가하는 만화가이기도 해서 만화 등단의 꿈을 꾸는 지망생들에게 있어선 존경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김기율 역시 김성환을 찾아가 선배로서의 자문을 구해 본 적도 있었다 한다.
1955년 마침내 그에게도 볕을 보는 날이 온다. <서울신문>에서 4컷짜리 생활 풍자만화를 연재해 달라는 청탁이 들어온 것이다.
그 당시 신문만화에서 활약하는 캐릭터들은 모두가 성인 캐릭터들 뿐이었는데, 김기율은 유치원생 정도 나이의 꼬마 주인공 ‘도토리군’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때마침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에 꼬마 개구쟁이 ‘후쿠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4컷 만화가 인기리에 최장수 연재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과연 ‘도토리군’도 독자들에게는 색다른 만화라는 인식을 심어 주면서, 어린이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사회의 다양한 면을 유머스럽게 풍자하며 160회나 연재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어서 1956년에는 우리의 고전 풍자 해학을 새롭게 재구성한 ‘신판 봉이 김선달’도 연재되었다.
△ ① 신판 봉이 김선달 ② 사회풍자 만화 도토리군. 서울신문에 인기, 1955. 8. 28. ③ 애주가 김기율 캐리커처
1959년 인기 청소년 만화지 <만화세계>에도 명랑만화 ‘도토리군의 모험’이 연재되어 인기를 끌었던 그는, <만화학생>지에 ‘도토리의 이상한 모자’, 그리고 ‘도토리 탐험대’, ‘도토리 추장’ 등을 연달아 펴내게 된다. 이 깜찍하고 발랄한 캐릭터의 비상한 활약으로 청소년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1960년 <만화세계>사 편집부 책임자로 근무하기도 했고, 1961년에는 한국만화 자율회 심의부장, 또 1972년에는 한국만화가 협회 회장도 역임했다.
1962년 단행본 ‘도토리 금메달’, 1968년에는 ‘이상한 짚신’, 1978년에는 <소년한국>에 ‘두더쥐 두루몽’을 연재하였지만 그것을 끝으로 더는 그의 작품을 볼 수 없었다.
한국 전쟁기에 이산가족의 아픔을 몸소 겪었던 그는 망향을 그린 수필집도 펴냈으며, 곧고 솔직한 성격으로 해야 할 말은 서슴지 않는 의지가 뚜렷한 인물이었으므로 작고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후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 청소년지 <만화세계> 등 잡지마다 도토리의 모험 등의 수많은 작품을 발표, 1958년.
1927년 개성 출생. 일정시대 학창시절을 보내며 당시 ‘검둥개 노라구로’라는 동물전쟁 만화를 보며 만화의 묘미에 흠뻑 젖어 살았다 한다. 1945년 해방 후 중학에 진학해서도 그의 만화 사랑은 식을 줄 몰라, 쉬는 시간이면 그림그리기에 몰두하느라 선생이 뒤에서 지켜보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한다.
상급 학년에 이르러서는 그림솜씨는 물론 글씨를 자유자재로 디자인하거나 섬세한 그림까지 곁들인 그의 솜씨는 언제나 교실 벽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부산에 소재한 미공보원에 입사하여 전시 담당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역시 그림에 대한 안목과 실력을 키워 나갔다.
1953년 서울로 상경, <신신백화점>의 미술 디자이너로 활동하게 되면서 백화점 곳곳에서 그의 그림솜씨를 볼 수 있게 되었다.
1956년 백화점 사장과 친분이 있었던 <만화세계>사 사장의 요청으로 미술부장으로 취임하면서 만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편집 디자인은 물론이고, 1957년에는 세계명작을 재구성한 ‘거짓말박사’를 잡지에 연재하면서 만화가로서도 데뷔하여 오래 지나지 않아 인기 작가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1957년에는 진시황의 얘기를 희화한 ‘천하통일’을 잡지에 연재하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 시기는 단행본 시대에 접어들고 있던 터라 ‘서부’, 극화 ‘자랑스러운 소년’, ‘거인’, ‘위대한 인디언’을 연달아 출간하였고, 서점 앞에는 그의 작품을 찾는 사람이 줄지어 서 있을 정도였다.
그의 그림은 영화 장면과 견주어서도 뒤지지 않을 만큼 섬세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장면 장면의 감상에 빠져 독자들은 넋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근대에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이현세가 섬세한 필력으로 인기작가로 거듭나게 된 것도 임수 선배의 이 개척정신에 힘입은 바 컸다고 할 수 있다.
1958년 독립군과 일본 헌병의 심리전을 그린 ‘차이나박’ 시리즈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 좌로부터 항일독립극화 단행본 <최이나 박> 발행, 1960년. / 만화세계에 연재한 역사극화 천화통일, 1957년.
임수는 1960년 <한국만화연구소>의 강사가 되어 후학을 지도한 경험도 있고, 1981년 <한국만화가 협회>의 이사를 역임하였다.
워낙 섬세한 필체로 유명한 작가이다 보니 그의 특기를 살린 작업으로는 제때 편수를 탈고할 수가 없어 대본용 시대 이후 만화계에서는 서서히 멀어져 간 느낌이다.
1974년 ‘소녀를 구한 특별열차’를 마지막으로, 그는 이후 종교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1999년에는 러시아, 핀란드, 에스토니아의 선교영화와 만화를 제작하는 등 선교 만화가로 활동했다.
그의 작품 수는 손가락으로 꼽힐 만큼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가 남긴 걸작들은 양보다는 질을 택한 흔적이 역력하여서 이와 같은 그의 작품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좀처럼 잊지 못할 작가이다.
△ 마치 영화 보듯 실감나게 연출한 임수 프로덕션 광고, 1960년.
△ 문광부 지원, 만화가 전국 산업 견학 부산기계공고 방문(1978. 10.) / 앞줄 좌측부터 이상무, 이덕송, 김기옥, 김인홍, (당시 협회사무국장) 김찬, 노석규, 박기준, 임수, 황정희, 길창덕, 박진우
△ 산업관광지 포항제철 앞바다에서 / 좌측부터 박진우, 필자, 이재화, 배봉규, 임수, 197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