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8년 서울 출생.
대경중학 시절 상업 미술에 재질을 보이는 수재가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학교에서는 이미 그를 모르는 학생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꿈은 오로지 하나, 만화가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 만화가 해방과 함께 몸체를 키우기 시작하자, 최고의 인기 작가였던 김용환의 극화체 <삼국지 시리즈> 등을 수집하여 붓 그림과 펜 쓰기를 흉내 내기에 바빴다. 마침내 이렇게 해서 완성된 그의 작품 <푸른 망또>는 독립군들을 돕는 영웅의 활극만화로 청소년들의 주목을 받으며 인기작가로 발돋움한다.
최초의 시대무협극화 <정의의 쌍칼>에 이어 전후에 발표된 <그림자 없는 복수>(뒤마의 추리소설 <몬테크리스토백작>을 각색, 만화화한 작품)도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그의 출세 길 역시 가로막기에 이른다. 그는 피난처였던 부산에서 인쇄소가 밀집되어 있던 보수동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기회를 찾던 중 단행본 <조국의 누나>와 <피묻은 수첩> 등을 펴냈으나 부수가 많지 않아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이십여 쪽의 작고 조잡한 딱지형 책과 흡사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1952년 무렵은 일본 작가의 <밀림의 왕자>가 일대 붐을 일으키고 있던 시기로, 이것을 해적판으로 만들어서 상하편을 국판으로 백여 쪽이 넘는 고급용지로 제작한 것이 국내 시중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박광현은 평소 안면이 있었던 인쇄소와 지업사에 사정하여 지불은 나중으로 미루고 출판시장으로 뛰어든다. 굳은 결심 하에 오랫동안 정성껏 그려왔던 장편 시대극화였다. 6×4판으로 32쪽짜리 <숙향전>을 상하권으로 하여 피난지에서 펴낸 것이다.
그러나 성공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지역적으로 판매시장이 너무 한정되어 있었던 탓도 있고 그의 작품은 서점용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영업에 문외한이었던 그에게 무리한 도전이었다는 아픔만 얻은 참혹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의 작품 <숙향전>은 훗날의 극화작품 연구생들에게 있어서는 귀중한 참고서로 남게 되었으니 공적만은 남은 셈이라 할까. 전쟁이 끝나고 안정기에 접어들자 그는 서울로 상경, 다시 재기를 향한 무한한 노력을 펼친다. 1956년 <만화소년소녀>에 연재하였던 무협시대극화 <백호검사>로 인기가 오르는 듯했으나 그동안의 소재로 통했던 세계 명작이나 전래동화, 역사를 바탕으로 한 내용은 독자들이 외면했고, 후배들의 기발한 소재와 연출 경쟁에 뒤처지게 되면서 오랫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재일교포 출신 김종래, 박기당 등이 일본식 시대극화를 펴내며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후반기인 1957년 성문사에서 펴낸 <임꺽정> 상하권이 그의 마지막 대표작이 되었다.
그의 특징은 김용환의 사실화 붓 그림의 전통을 시대극화로 계승·개발한 것으로, 구도구성법에 이르기까지 김종래, 박기당, 서봉재, 서정철, 손의성, 방학기, 백성민 등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은 그 누구도 부인치 못할 것이다. 말년에 병든 몸으로 병상에 있는 동안 모든 비용을 감당했던 딸 박원숙이 함께해 주어 크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인기 여배우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던 그녀로부터 아버지의 예능인 혈통이 대물림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후배들도 진한 감동을 느끼곤 했다. 시대 극화의 개척자 박광현은 비록 후두암으로 만화계를 떠났지만, 그의 걸출한 작품들을 후배들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다.

△ 뒤마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만화화한 <그림자 없는 복수>(표지그림 박기당, 1958년)
△ 영화 포스터
△ 월간 만화소년소녀 편집부에서. 좌측부터 박광현, 황정희, 이병주(1958년)
1927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교토회화전문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종전 후 귀국,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본부 작전과에 근무, 대북 홍보전단지 등을 그리게 됐다. 그때 전임자로 있었던 김용환의 대북 홍보 전단지가 비치되어 있어 참고하여 그렸고, 얼마 후에는 모두로부터 능력을 인정받는 뛰어난 그림 실력을 지니게 된다. 1954년 군에서 발행한 반공 단행본 만화 <붉은 땅>을 발표하게 되면서 작가로 데뷔한다. 제대할 무렵엔 출판사의 요청으로 <눈물의 수평선>, <복수의 칼> 등을 펴내 주목을 받음과 동시에 인기를 끌었으며 휴전 후 서울로 상경하였다.

1958년 <만화세계>에서 펴낸 시대사극 <엄마 찾아 삼만리> 상하권이 대히트를 치면서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상승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여서 이산가족들의 아픔이 단연 화제가 되고 있던 때였다. 외톨이 금준은 길을 걷다가 들에 흐드러지게 핀 국화 한 송이를 꺾어 들며 눈물을 글썽인다. 이야기는 회상법으로 전개되는데, 이 꽃이 다시 피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엄마의 소식이 없자 봇짐을 지고 정처 없이 엄마를 찾아 떠나게 된다. 금준은 시시각각 도사려오는 온갖 위기와 맞서 나가지만 발 닿는 곳마다 온통 험난한 갈등의 요소들이 펼쳐져 있다. 두만강 건너로 팔려간 준이 엄마는 짐승처럼 모진 수모를 겪고 있었다. 더는 견디기 힘들어 영원히 잠들어 버리고 싶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두고 온 아들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참아 온 그녀였다. 이처럼 두 사람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건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때로는 만날 뻔하다가도 간발의 차이로 엇갈리기도 하는 가운데 마침내 벅찬 만남의 감동으로 이어지는 극적인 순간이 오게 된다. 구구절절 읽는 이들의 눈물을 자극하는 문장과 그림에 청소년들은 물론 성인들까지 김종래의 만화에 흠뻑 빠져들게 만들었던, 최초의 성인만화 시대를 연 만화가였다. 그림 또한 기존 만화와는 달리 장면마다 한국화를 보듯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암행어사>, <눈물의 별밤>, <마음의 왕관> 등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줄줄이 이어졌고, 청소년 월간 만화지에 그의 만화를 연재하지 않고서는 잡지 판매에 큰 지장을 초래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김종래는 25년 간 활동하면서 200편 이상의 명작을 남겼다. 시대극화의 붐을 일으킨 최초의 작품들이었다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작품 <도망자> 시리즈는 주말 연속극으로도 쓰여서 한 해 동안 안방의 인기를 누리기도 하였다. 또 그의 대표작 <엄마 찾아 3만리>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6년에는 대한민국 만화문화 대상, 2001년에는 보관문화 훈장을 수상한 그는 우리 만화계의 큰 별이었으나 아쉽게도 칠순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 초기작 <꿈의 인생>, 삼국유사에서 발췌. 승려의 꿈을 통해 인생무상함을 느끼고 사재를 털어 정토사를 창건한 훌륭한 스님 이야기. 4×6판 양장본(1958년)
△ 대표작 <엄마찾아 삼만리>(1958년 만화세계사 발행). 최고의 시대극화. 남녀노소에게 읽힌 명작. 등록문화재 제539호로 지정
△ 박광현 박기당 콤비 사진.
1922년 일본 오사카 출생(본명 박성근). 해방 후 귀국해서 부산 광복동에서 극장 간판 작업을 통해 그림 실력을 인정받는다. 일본미술전문학교에 다니며 공부했던 그림 솜씨가 그대로 발휘되었던 것이다. 1956년 <야담>지에 연속만화 <대마로 소마로>를 데뷔작으로 삼아 출판계에 등단했지만, 짤막한 분량의 만화로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1956년 청소년지로 꽤 인기가 높았던 월간 <만화세계>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 박기당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야담, 전설, 괴기, SF 등을 소재로 한 그의 시대극화에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어사와 성성이>, <눈물의 호궁>, <아랑과 오랑>, <눈물의 절벽>은 극화의 묘미를 한껏 보여주면서 오래지 않아 그는 시대극화가로서 인기의 정상에 올랐다.
그의 대표작은 1959년 광문당에서 발행한 <만리종> 상하권으로, 이 작품은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와 나란히 쌍벽을 이루며 서점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후 박기당은 최상권 이후 판타지 만화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5·16 이후에 만화가 대본용 체제로 바뀐 시점에서 그는 제8대 만화가협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그는 당국의 만화에 대한 편파적이고 부당한 심사에 대항하여 끈기 있게 항의하는 한편, 작가들의 친목도 돈독히 하였다. 그의 후반기 걸작은 <바다의 독수리> 그리고 <성웅 이순신> 전기였다. 대본용 만화와는 차원이 다른 2백 쪽이 넘는 서점용 고급 양장본 책이었다. 뛰어난 데생력을 바탕으로 한 힘찬 붓 그림 위주의 그의 작품들은 시대극화 붐을 일으킨 개척기의 작품으로 통한다.
그러나 한창 일할 나이인 향년 57세에 극화계에서 영원히 퇴장하고 만다. 박광현, 김종래와 함께 이들 시대극의 대표주자 삼인방은 해방 후부터 뿌리를 내리기 시작, 한국 전쟁에서 전후에 이르는 세대까지 청소년과 성인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원로 만화가들이다. 이들의 공로는 한국 만화사에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귀신동자>, <저승피리>는 시대극화로는 독특한 괴기와 신비의 줄거리로 독자들을 즐겁게 했다(1959년 발행).
△ <바다의 독수리>
△ 대표작 ‘만리종’, ‘성웅 이순신’(4×6판 양장) 김종래와 함께 최고의 극화 전성시대를 이뤄냈다(1959년 광문당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