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2년 서울 출생. ‘경기중학’을 졸업했으며 1953년 ‘서울미대’를 중퇴하였다.
그 후 미8군 노무처에 근무하며 미술 전공을 살려서 홍보 전시 분야의 일을 맡아 하였는데, 워낙 깔끔하게 잘 처리해서 미군 장교들의 칭송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 당시 미군부대는 서양 문화의 보고였다. 미제 물품에 신문, 잡지, 출판물까지 넘쳐 시중까지 흘러나올 정도였다. 특히 미국 만화는 세계 첨단을 걷고 있던 때여서 백인수에게 있어서는 그림 공부의 자료를 구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시국적으로 안정기에 들어선 1956년, 백인수는 청소년 잡지 <만화세계>에 ‘꺼먹이’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청소년 작품으로 데뷔했다. 이어 <만화학생>, <학원>지에도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 중반의 그의 작품은 한 마디로 위트 넘치는 새로운 청소년 만화를 선보였다 하겠다.
마침내 신문 시사만화에도 등단할 정도로, 인물에서 캐리커처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빠르게 발전한다. 그리고 1964년 <동아일보>에 1컷 시사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하며 만화가로서 자리 잡게 된다. <동아의평> 4컷 만화로는 <고바우영감>, 1컷 시사만화는 백인수의 시사만평이 함께 실리며 주가를 높였다. 백인수는 김용환이 주도하던 ‘대한만화가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하며 각종 문화인 야구대회에도 참석했다. 또한 동양화 개인전도 가졌으며, 유명인사 캐리커처 전시회와 인물화전도 개최하였다.
1961년 <경향신문>에 <개골선생>을 장기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1962년에는 <꺼먹이>를 연재했고 <딱부리>도 연재했다. <동아희평>에서의 독특한 표현과 가늘고 뛰어난 펜선은 그가 아니고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물 캐리커처도 누구한테 뒤지지 않는 실력이어서 당대의 신문만평을 대표하는 위치에 서기도 하였다. 그가 보여 준 업적은 지금도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독자적 퀄리티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1992년 8월, 비디오아트 작가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동창생 백남준과 함께 회갑을 기념한 ‘예술우정 한마당 2인전’이 원화랑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유년기부터 죽마고우였던 두 백씨가, 같은 학교를 나왔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걷다가 환갑이 되어 예술을 통해 만나는 인간 해후의 장으로 꾸민 뜻 깊은 합작 전시장이어서 대성황을 이루었다. 1963년부터 <연합신문>, <세계일보>, <경향신문>을 거쳐 온 그의 대표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었다. 고인이 되었어도 특출한 작품들은 언제까지나 작가의 발자취를 후세에 전하게 될 것이다.

△ 동아희평. 1979년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총리가 체결한 평화협정을 소재로 삼았다.
△ 백남준과의 공동전 ‘二白展’에 출품한 ‘대통령기자회견’(1964년)

1924년 개성 출생. 상업학교 시절부터 상업디자인에 특별한 소질을 엿보이는 면이 있어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고 한다. 그 후 ‘일본미술전문학교’에 다니면서 글쓰기와 그림에 열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귀국 후 한국전쟁 중 ‘전주전시연합대학’을 졸업, 그리고 보육원에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55년에는 그림소설 단행본을 만들어 펴내기도 했고, 1956년 월간 <만화세계>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그림소설 형식의 <흰 구름 가는 곳>을 게재하면서, 그때까지 남성 독자 위주의 만화와는 또 다른 독특한 여성 취향의 작품을 처음으로 선보이며 각광 받기 시작했다. 연이어 <만화세계>사와 경쟁하고 있던 <소년소녀>지에 <하얀 쪽배>를 연재하였고, <만화학생>에는 <깨진 거울>을 연재하는 정신없이 바쁜 시절을 보내게 된다. 1960년에는 <만화세계>에서 편집책임자로 근무하였던 적도 있다. 편집부에는 일본의 주니어를 대상으로 한 청소년 만화들이 많이 쌓여 있어, 이것을 참고하여 연구에 정진했던 모습을 쉽게 가늠케 한다.
김정파는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특히 여성 취향의 작품에 대해 많은 연구를 아끼지 않았다. 일본의 여성취향 잡지에 연재되던 소설이나 삽화는 매우 독특했는데, 그 그림들이 글과 함께 순정만화 형태로 한창 발전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1947년 일본의 나카하라 준이치(中原淳一)가 최초의 순정만화 형태의 삽화를 선보였고, 1957년에는 일본의 <소녀>지에 최초의 순정만화 <태풍을 넘어서>라는 다카하시 마고토의 작품이 실렸다. 이 두 작가는 사실은 이름을 달리했을 뿐 같은 인물이라고 한다. 김정파가 이들 일본만화를 보면서 연구하며 자연의 흐름에 따랐던 것이 우리 순정만화의 개척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하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때 그려진 것들이 그의 최고의 인기 순정만화 작품들이었다. 1959년 장발장을 편작한 극화 <아! 무정>을 ‘성문문고’에서 고급 단행본으로 발행, 같은 해 서울 남산의 만화연구소에서 신동헌, 김경언, 신동우, 임수, 송영방 등과 함께 강사로 참가해 후배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때 수학한 학생 중에는 훗날 순정만화의 대가로 명성 높았던 여학생 엄희자도 있었는데, 이들 실력이 쟁쟁한 선배들의 지도를 받았기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그 실력을 키울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5.16 군사정부 이후 만화사에서의 대본소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964년 당시에는 그림체를 간략하게 변화시킨 김경언의 단행본 <칠성이 시리즈>가 시중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같은 출판사의 요청으로 김정파는 <깨막이>라는 순정만화와는 전혀 다른 만화 시리즈를 펴냈고, 이어서 <촌놈 솔봉이>, <전쟁고아>, <휘파람이> 등을 발표했지만 그리 생명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1969년에는 한국만화가협회의 회장직을 맡아 갖가지 봉사며 운영 문제로 바쁘고 힘든 시기를 보낸 적도 있다. 협회장직을 그만 둔 다음에는 여성 액세서리 가공 회사를 설립, 부부가 적극 나서 활동했으나 이렇다 할 빛을 보지 못하고 칠순을 앞둔 나이에 세상과 하직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작품 순정 그림이야기들은 당시의 독자들과 후배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잊히지 않는 주옥 같은 작품들로 기억될 것이다.

1927년 황해도 출생. 그 역시 학창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미술반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해방 이후 출판시장이 활기를 띠게 되면서 <농민주보> 등에 만화와 삽화를 게재하며 차근차근 실력을 키워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개병의 시대 홍보에 맞추어서 국방부에서 발행하는 <국방만화> 등을 발간하는 국군 심리전 부서에 속하게 된다. 그는 김성환 팀이 이끄는 <만화주보> 팀에 합류, <만화승리>와 <사병만화> 등에 만화 및 삽화와 포스터 등을 제작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한편 청소년 만화지 <만화세계>에서도 작품 활동을 하며 <보물섬 소동>을 발표하였고, 1955년 <연합신문>에는 <막동이>를 연재하는가 하면 릴레이만화에도 참여하였고, 극화 <양녕대군 만유기>도 잡지에 장기 연재하였다.
1956년에는 휴전기에 반공 단행본 <창수만세>를 그려 발간하기도 했다. 같은 해 서울로 상경, 신문과 잡지사를 무대로 만화 및 삽화가로 활동했다. 1957년부터는 김용환이 회장이 되어 이끄는 한국만화가협회의 회원으로서 활동한다. 그는 한국 대중만화계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전업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성인만화나 청소년 만화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지만 장수한 캐릭터는 별로 없다는 게 참으로 아쉽다. 다만 만화보다는 삽화를 더 많이 그렸으니 생활상에 별 문제는 없었음은 그런대로 다행이라고 할까? 한국화가로 전향한 우현 송영방과 흡사한 삽화가였으나 엄격히는 더 많은 활동을 한 삽화 위주의 만화가로 손꼽힌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그룹의 박광현, 박기당 등과는 달리, 평소 후배들에게 큰소리 한번 내는 일 없이 자상하게 대해주던 정이 많은 선배로 정평이 나 있었고 존경도 받았다. 중절모와 레인코트를 즐겨 입던 훤칠한 키에 조용한 성품의 이 원로 만화가는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으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리고 명성을 떨친 제 1세대 만화가이면서도 유작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 그 안타까움을 더한다.

△ 육군 6사단 본부, 정훈국 문관들과 근무 시. 좌측부터 김성환(두 번째), 이병주(네 번째). 1952년
△ 삼총사(1954년)
△ 이런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