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박기준의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18 : 정한기, 이상호

정한기 1930년 옥천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따라 일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해방과 함께 귀국, 홍익대학교에서 응용미술학부를 졸업했다. 이상호 1927년 평남 출생. ‘국학대학’을 졸업한 미술학도로, 각종 출판사 및 잡지사에 삽화를 그리며 아르바이트하였던 것이 만화가가 된 동기이다.

2016-01-08 박기준



정한기
1930년 옥천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따라 일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해방과 함께 귀국, 홍익대학교에서 응용미술학부를 졸업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육군본부 정훈국 소속이 되어서, <고바우 영감>의 작가 김성환의 영향을 받아 독학으로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전시의 국민들에게 반공 교육과 함께 사병들에게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한 제작물, 국방부에서 발행한 <만화승리>, <사병만화> 등 군에서 필요한 포스터와 기타 홍보물을 그리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54년 수도 서울이 안정을 찾아 가면서 잡지며 출판물이 서점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동안 익혔던 그림 실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아리랑>, <명랑>, <실화> 등의 잡지에 기고, 1956년에는 <연합신문>에 4컷 만화 <허사비>를 3개월간 연재했다. 허사비는 엉뚱한 짓을 잘하는 난센스 캐릭터로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58년에는 또 <서울신문>에 <허모아>를 1년간 연재했다. 그리고 여러 잡지에서 편집 디자이너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0년 <대한일보>에 <포플러 가족>을 연재했고, <만화신문>의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69년 서점에서 만화방 시대로 변해가는 시점에는 그의 시대 명랑만화의 대표작인 <조랑어사>를 시리즈로 펴내 각광받기 시작했다.
약화체로 그려진 귀여운 캐릭터 조랑어사는 곧고 강직한 떠돌이 소년 어사로, 탐관오리나 악당들의 죄상을 추리해서 체포한다는 통쾌한 이야기로 20여 편에 걸쳐 계속된 인기 정상의 작품으로 꼽힌다. 1966년에는 <작은 어사>, <검풍연풍>, <돌바위> 등을 펴냈다. 1972년에는 ‘한국아동만화 윤리상’을 수상했고, 1981년에는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직을 역임했다. 청소년극화 <삼국지> 상하권과 <손자병법> 상하권을 재구성, 가판용으로 펴내 일찍이 성인만화와 청소년만화에서 다시 역사 극화가로 변신한 작가였다. 일찍이 1957년에는 김용환을 회장으로 옹립하여 대한만화가협회 소속이 되어서 각종 행사에도 참여했던 원로만화가이다.

그의 모친은 한국 최초의 인형 연구가로 일본에서 유학한 신여성 예술인으로 유명하다. 정한기는 문화인 야구대회에도 빠짐없이 참가하였는데, 훤칠한 키에 여느 배우 못잖은 미남형 외모로도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다. 1999년 이후, 강남 <매일신문>, 주간지, 기업 홍보지 등에 시대극화를 게재, 노후를 보내는 중 지병으로 사망했다.

△ 조랑어사

이상호
1927년 평남 출생. ‘국학대학’을 졸업한 미술학도로, 각종 출판사 및 잡지사에 삽화를 그리며 아르바이트하였던 것이 만화가가 된 동기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 정훈국 소속으로 활동, 국방부에서 발행한 주간지 <만화승리>, <사병만화> 등에 캐릭터 ‘갈비씨’를 발굴하여 게재함으로써 만화가로 데뷔한다.

그의 대표작 <갈비씨>는 가난하지만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선량한 성격을 지닌 평범한 사람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하고도 공처가적인 외모로 그려져서 60년대에 많은 인기를 누렸다. 김용환은 대구 피난지에서 <만화신문>을 펴냈는데 이곳에도 게재하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고상영, 이재화, 이병주, 정한기도 잡지에 기고했던 인물들로, 정훈국 소속 홍보지 일에도 함께 협력하였다. 환도 후에는 성인만화지 <만화춘추> 및 <야담>, <실화>에 <양지영감> 등을 게재하면서 본격적인 <갈비씨> 캐릭터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6년에는 김용환을 회장으로 한 ‘대한만화가협회’ 소속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총무직을 맡으면서 협회 조직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그는, 훗날 ‘아동만화 윤리위원회’의 회장직을 맡아 운영하기도 했다. 1961년 5·16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만화계엔 일대 폭풍이 불어 닥쳤는데, 그때도 만화계를 위한 적극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후 거듭되는 만화에 대한 각종 제재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한국만화가협회’를 이끌어 오면서 오늘의 협회가 있기까지 3회나 연임하며 최장수 협회장으로 봉사했다. 우리 만화가협회가 오늘날 국제화시대의 높은 고지에 서서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최초로 원로 만화가들을 이끌고 ‘일본만화가협회’와의 교류를 처음 시도한 것은 1972년 이상호 회장 때부터였고, 거기서부터 한국만화의 국제화시대 진입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1962년 대본용 만화시대에 <꼬마 갈비>를 단행본 시리즈로 펴내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뜻깊은 심술>, <삼보의 비밀>, <소원의 별> 등을 끝으로 청소년 만화와는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신태양>, <아리랑> ,<만화춘추> 등에 많은 작품을 기고했던 대중만화가로 지금도 그의 만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협회장에서 물러난 후 세운상가에서 갈비씨 캐릭터를 간판으로 내세워 갈빗집을 오픈, 한때는 많은 손님들로 붐비기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문을 닫는다. 말년에 애니메이션 합자회사를 설립해 일본을 왕래하며 작품 제작에 몰두하던 중 고혈압으로 결국 사망에 이르러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 꼬마와 갈비군

△ 만화가협회 회장 시절(우측은 부회장 이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