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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준의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11 : 해방 이후 신문 출판계 활동 만화가 정현웅, 김용환

마침내 우리 땅에 전 국민이 목마르게 기다려왔던 8.15 해방의 날이 왔다. 길고 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 기쁨과 함께 자유 국가임을 선포하며 대통령의 시대가 열렸다.

2015-09-08 박기준

해방 이후 신문 출판계 활동 만화가

마침내 우리 땅에 전 국민이 목마르게 기다려왔던 8.15 해방의 날이 왔다. 길고 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 기쁨과 함께 자유 국가임을 선포하며 대통령의 시대가 열렸다. 동시에 그동안 강압적으로 받아올 수밖에 없던 일본 문화의 영향권 하에서, 이때를 기점으로 쏟아져 들어온 미국 문물과 함께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우리 글로 된 인쇄 매체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도 감격스러운 일의 하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통신>을 창간, 뉴스공급처가 되었다. 

일제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미군정당국이 인수하여 1945년 11월 23일 <서울신문>이라는 제호로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문이 제자리를 잡아 가게 되면서 정현웅의 시사만평 사회오락 만화가 게재되었다. <조선일보>는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복간하여서 웅초 김규택의 만평과 해외만화 등을 연재하였고, <동아일보>에는 김용환이 시사만화에 르포 만화, 스케치 만화 등을 간간히 섞어 연재하였다. 또 <자유신문>에는 임동은이 1컷과 4컷 만화를 연재하였고, 운보 김기창도 문화부 촉탁 기자로 입사하여 삽화와 만화를 담당했다. 

1949년 <평화신문>에 백문영의 4컷 시사만화 <38이>가 연재되면서 분단의 아픔을 새롭게 새기게 한다. 아동잡지로서는 1946년 2월 11일 을유문화사가 <소학생>을 창간하면서 김용환의 <흥부와 놀부>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김용환은 일본에서 귀국 후 동생 김의환과 함께 아동물에서 청소년, 성인물, 교과서의 삽화에 이르기까지 만화계의 다방면에 걸쳐 맹활약하였다. <소학생>은 을유문화사가 기업가들의 후원을 얻어서 청소년 문화 창달이라는 높은 뜻을 두고 4×6판 50쪽 분량으로 만들어졌는데, 독서계를 석권하다시피 그 위용을 떨쳤다. 동시, 동화, 위인전, 교양물 등을 주로 실었고, 김용환, 고상영(고우영의 큰형), 이영춘 같이 이름 있는 작가의 만화와, 김의환의 <그림속담>, 김규택의 삽화, 또 정현웅은 표지 컬러화를 맡는 등 호화로운 편집진이었다. 이어서 4×6판 또는 국판으로 <진달래> <소녀> <새동무> <새별>, 그리고 4×6배판으로 <어린이나라>라는 잡지도 창간돼 본격 아동잡지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1946년 6월에는 청소년지 <소년>이 창간되었다. 만화는 물론, 국내외 명작, 시, 위인전기, 과학상식, 김내성의 국내 추리소설과 함께 김의환이 삽화를 맡은 <쌍무지개 뜨는 언덕> 등이 연재되어서 읽을거리에 목말라 하던 상급생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 이처럼 만화는 약방의 감초같이 항상 잡지와 함께 생명을 같이 하며 발전해 왔다 할 수 있다. 1946년 9월에는 성인용 종합오락 월간지 <신태양>이 창간된다. 이를 신호탄으로 삼은 듯 이어서 <삼천리>가 창간되었고, 또 여성지 <신여원>도 창간되면서 본격적인 잡지의 르네상스 시대가 개막되었다.
잡지의 수가 늘게 되니 당연히 만화가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도 넓어진 셈이다. 이때부터는 기성만화가들 못지않게 참신한 신인 필자들도 등장하여서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며 인기에 한몫을 더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문제점으로 대두된 것은 이들 잡지와 출판물을 독자들과 연결시켜 줄 유통망이었다. 일정시대에는 서울 시내와 4대문 밖에 서점들이 있었으나 해방과 함께 쏟아져 나온 다량의 책들을 모두 취급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 보니 궁여지책으로 문구류를 판매하는 문구점이 간행물까지 취급하는 식으로, 서점을 겸하는 곳이 점차 늘어가고 있었다. 더 나중에는 길모퉁이에 호롱불을 켜놓고 박스 위에 책들이 잘 보이도록 전시해 놓고 판매하는, 일테면 이동 서적상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는 으레 인기 있는 만화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판매율을 높여준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일반 단행본으로는 근대문학의 으뜸으로 꼽히는 김소월 등의 시집과 이광수의 <흙>을 비롯, 박계주의 <순애보>, 박종화의 사극 <금삼의 피>, 심훈의 계몽소설 <상록수>, 또 폭정에 항거하는 의적들의 투쟁을 그렸던 홍명희의 <임꺽정> 등이 단연코 인기를 차지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나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 같은 해외소설도 번역되어 출간됨으로써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남녀간에 연애편지를 써서 의사를 주고받았던, 시대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편지투백과>가 단연 장기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인기 가요의 가사집 또한 독자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다. 

만화계에서는 두고두고 기억되어야 할 두 사람의 천재가 있었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풍속화가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었듯이, 김용환과 정현웅이 그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 해방 전후의 만화계를 굳건히 지킨 대부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현웅

1910년 서울 출생. 경성 제2 고등 보통학교 졸업. 
1927년 불과 18세의 나이로 조선미술 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한 인재이다. 
1935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신문 삽화를 그렸고, 만화에서 기량을 떨치면서 다양한 평론까지 게재, 한국 현대만화의 선구자로 대활약하였다. 
정현웅은 국내 화단과 문단을 오가며 출판 미술 분야를 석권하였으며 화려한 필력도 과시한다. 또 언론계의 중책도 맡는 등 정상의 자리를 지켰던 인텔리였다. 
1935년 <소년중앙>의 발행인이자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던 만화계의 선구자 김동성이 어느 날 삽화를 그리도록 종용하면서 만화계에 입문했다.

그의 첫 데뷔 만화는 1935년 <소년중앙> 4월호에 실렸던 10컷 만화 <속았다>로서,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그림과 아이디어에 출판미술계에선 그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우리나라에서 만화란 거의 미개척 분야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기발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진 구미 선진국의 작품들에 비해서 견줄 수 없이 초라하고 단조로웠던 것이 국내 작가들의 작품 경향이었다. 스토리만화는 1940년 11월호 <소년>지에 과감하게 실렸던 6쪽짜리 연속만화 <홍길동>을 들 수 있다. 다양하게 틀을 깨며 선보였던 그의 작품은 독자들의 환호와 탄성 속에 나날이 일취월장하며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만화 외에도 소설의 삽화, 도서의 표지 장정 등 장르를 불문하고 국내 최고의 실력을 뽐내었다. 오늘날에도 분야별로 두각을 나타내는 천재 작가들은 많이 있지만, 초기 만화계에서는 1인 다역의 다양한 능력을 소유한 자여야만이 최고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출판 미술가가 드물었던 그 시절의 인재 선호 요건은 자못 까다롭다. 출판미술을 통틀어 세분화해 보면 컷 만화, 연속만화, 캐리커처, 단행본 만화 등이 있다. 그것도 어린이용에서 청소년용, 성인용의 그림이 달라야 했는데, 간소화체에서 사실체 그리고 삽화, 펜화, 표지화, 채색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섭렵할 수 있는 실력이 요구되었다. 뿐만 아니라 문장력까지 두루 3박자를 갖추고 있어야만 초일류라는 대접을 받게 되는 게 공통된 전통이었다. 

해방이 가까워지자 인재들이 떠난 자리에는 군계일학으로 국내파 만화가 정현웅이 남아 계속 활동하였다. 해방 후 국내 출판시장이 활성화되자 그의 주옥 같은 청소년 단행본 만화가 본격적으로 햇빛을 보기 시작, 국내 만화에 목말라 했던 독자들을 즐겁고 희망 넘치게 해주었다. 그는 1946년 <콩쥐팥쥐>를 4×6판 36쪽의 컬러만화로 새롭게 편작해 내었다. 또한 세계 명작 중에서 <아라비안나이트>를 판타지물로 편작하여 같은 판형의 <아리바바>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1948년에는 수호전의 <노지심>을 4×6판 26쪽짜리 컬러극화로 완성해냈다. 또 같은 해인 1948년, 악성 베토벤의 일생을 주제로 삼아 펜을 사용한 극화로 4×6판 34쪽의 흑백만화를 펴내는 등 많은 만화 작품을 남겼다.

특히 그의 작품들을 볼 것 같으면 불교와 유교가 배경이 되는 작품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들은 해방 직후 필자가 직접 읽고 벅찬 감동을 느꼈던 최고의 걸작품들로서 지금까지도 진한 여운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만화가 단체를 위해서는 끝내 협력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많은 의문점을 갖게 됨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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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웅(1910-1976)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가로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삽화, 시사만화, 청소년 만화는 물론 문필가로 종합지 <신천지>편집장등 최고의 만화경력의 거목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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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의 빛> 표지화(194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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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뜨기> (1966년,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92×120cm)
납북 후 북한에서 발표한 한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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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쥐팥쥐> 간소한 그림으로 그린 청소년 만화,
컬러 단행본(4×6판, 36쪽, 1947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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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호지의 <노지심> 극화
컬러 단행본(4×6판, 26쪽, 1948년 발행)


김용환

1912년 경상남도 진영 출생. 필명은 목정(木丁). <동래중학>을 졸업하였으며 일본에서 미술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일제 말기에 등단한 천재 만화가 김용환은 1936년 5월 <신동아>지에 <모-던> <미발(美髮)> <좌석> 등의 작품으로 국내 무대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1938년 10월, 방학을 틈타 잠시 귀국한 그는 <소년조선>에 <똘똘이>를 4회분 연속만화로 그려 발표하면서 아동만화로서의 첫선을 보였다. 그보다 1년 앞서 <소년중앙>에 등단했던 정현웅과는 대조적인 발전과정을 엿볼 수 있다.
김용환은 중학을 마친 후 도일, ‘가와바다(川端)미술학교’를 거쳐 ‘무사시노(武藏野)미술대’에서 공부하며 유명한 스승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시아의 출판미술계에서는 가장 우위에 있는 선진국 일본의 전문 지식을 기초부터 배우며 일취월장, 최고의 실력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3박자를 갖춘 작가로 맹활약하였다. 한국과 달리 거대한 무대에서 공부하며 꿈을 펼쳐왔던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해방이 되어 귀국했을 때는 국내에서 그와 필적할 경쟁자가 없었으므로 그의 거침없는 왕성한 활동은 끝을 모를 정도였다.
정현웅도 초창기에 도일하여 ‘가와바다미술전문학교’에 등록하기는 했지만 사정상 중도 포기, 국내에서 미단 및 문단 활동과 홀로서기로 자수성가를 한 것이니 두 사람의 출세 과정은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정현웅은 국내 역사, 전래동화, 전설 등 한국적인 그림과 줄거리를 최고로 구사하는 국내파 만화가였던 반면, 김용환은 서구의 모든 것을 직접 보고 배웠을 뿐 아니라 소화시켜서 국제 무대에서도 최고인 작품을 구사할 정도의 능력을 소유한 해외파 만화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기독교가 배경이 되는 서구적인 표현에 대해 강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현웅은 그림에서는 다소 뒤질지 몰라도 문필가로서의 그의 능력과 미술전공자로서의 명성은 결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겠다. <임꺽정>의 작가인 벽초 홍명희와 인연이 깊어서 <신천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언론계의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하지만 해방 후 김용환은 친일 행적으로 오점을 남기게 되고, 정현웅 또한 한국 전쟁 때 좌익으로 활동하다 국군 수복 후에는 북한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니 그 역시 오점을 남겼던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김용환이 정현웅과 비교하여 달랐던 점은, 현 사단법인 <한국만화가협회>의 전신이었던 만화가단체를 최초로 구성, 친목을 도모하면서 인재를 기르는 일에 앞장섰다는 점에 있다. 만화가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는 뚜렷한 직업 정신을 심어 주는 데 있어서도 앞장서서 일본과 대등하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으니, 오늘날까지도 그는 한국 만화계의 거목으로서 대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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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환(木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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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김용환, 2색, 4×6판, <신소년사> 1947년)
국내 최초 세계명작극화 <삼국지> 전5권청소년용으로 펴내 불티나게 팔리고
후학들에게 소중한 교재로 귀중한 책이 되어 영원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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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초 시사만화잡지 <만화행진>, <만화뉴스> 등 발행.
동료 후배들과 협력 만화계를 리드. 타블로이드판(19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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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가들의 모임
당시 예술인들의 약속장소로 유명한 명동의 ‘모나리자 다방’의 편집회의.
좌로부터 김경언, 안의헙, 김용환, 김성환, 신동헌(195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