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 들어가는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흥미로운 글을 보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전쟁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한 게시물이었다.
먼저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와 <무적초인 점보트3>, <전설거신 이데온>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애니메이터 토미노 요시유키의 애니메이션 장면이 과거의 사례로 제시되었다. ‘몰살의 토미노’라 불리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전쟁은 언제나 참혹하다. 아군과 적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간이 잔인하게 희생되는 장면을 여과 없이 표현한다. 상업적인 요구에 부합하여 애니메이션의 주 소비층인 소년 소녀들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그들이 엄밀히 ‘소년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아군에게 아무리 싸울 명분이 있는 전쟁이라도 그 이야기를 마냥 영웅의 승리로 미화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서 전쟁이란 승리해도 패배와 같았다.
△ 토미노 요시유키 作<기동전사 V건담>(1993)에서 소년병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적군
이후의 장면이 개그 짤방으로 많이 쓰이지만 실은 슬픈 장면이다.
그런데 반대로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전쟁이란 이계(異界)를 상대로 마법까지 등장하는 판타지이거나, ‘리얼’을 추구한들 조직 간의 항쟁 정도로만 표현하고 있었다. 어차피 가상이니 상관없다는 식으로 전쟁마저 ‘모에(萌え)’하는 엔터테인먼트로 만들고, 망상으로 점철된 세계관에서 극우적인 욕망이 꿈틀거렸다. 토미노 선생이 일찍이 경고한 대로, 21세기의 아니메에서 전쟁은 패션이 되어 있었다. 전쟁과 고통의 인식은커녕 그것에 대한 태도 자체가 없었다.
또 다른 게시물은 일본 만화가의 전쟁 인식이 과거와 현재 세대가 얼마나 다른지 보는 것이었다. 과거에 두 위대한 작가가 있었다. <게게게의 기타로>와 <세계의 요괴 도감>으로 친숙한 미즈키 시게루는 실제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폭격에 의해 왼팔을 잃었다. 그는 <총원 옥쇄하라!>, <극화 히틀러> 등 전쟁을 비판하는 만화를 계속 발표하고, 종군위안부 문제에 있어 그가 목격한 것을 단편 만화로 그려내 “지옥 이상”이었다고 표현하며 일본이 당연히 배상해야 한다는 확고한 주장을 했다. ‘일본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도 걸작 <아돌프에 고한다> 및 <종이 요새>, <대부의 아들>, <제피루스> 등 전시 상황에서 겪은 자전적 내용의 단편들과 함께 여러 매체나 에세이를 통해 전쟁과 파시즘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남긴 것은 이미 유명하다.
△ 미즈키 시게루의 <총원 옥쇄하라!>(1973, 국내 미정발)
데즈카 오사무의 <아돌프에게 고한다>(1983, 세미콜론 정발)
본문에서 언급한 단편은 AK에서 나온 [데즈카 오사무 초기 걸작선]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세대의 전쟁에 대한 의식은 판이하게 달랐다. 한일 양국에서 대히트한 작품의 유명 작가들이 독도 소유권 주장은 물론이고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은 독일의 나치만큼 잔혹하지 않았으며, 일본은 한국을 도왔을 뿐 식민지 통치가 침략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스탠스가 우익임을 선언한 거나 다름없다. 게시물을 만든 이는 두 세대의 다름을 이렇게 구분했다. 전쟁을 실제로 겪은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라는 것이다.
당연히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고, 유명 작품의 작가라는 사실이 작가 개인의 됨됨이를 인증해주진 않는다. 일부 작가와 몇몇 작품의 사례라 보고 싶지만, 그래도 생기는 의문.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세계적인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은 전세대가 작품으로 남긴 전쟁 반대의 메시지와 평화의 가치가 후세대에게로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 단절된 이유는 어째서일까? 단순히 전쟁을 실제로 겪었는지 경험의 유무만으로는 충분히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그 공포로 인해 극우로 치닫는 경우를 훨씬 많이 보았다. 앞에서 언급한 작가들은 지식인이자 예술가의 양심으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한 드문 경우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국가적 비극과 폐해는 국민의 삶에 영속적인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폭을 맞은 국가의 국민으로서, 전쟁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는 민족의 DNA에 새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역사는 아무런 성찰 없이 원점으로 회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려움은 성찰보다는 원한으로 이어지기 쉽다. 혐오와 증오는 두려움에서 발생한다.
필자가 현대 일본만화에서 자주 목격하는 것은, 거의 공동체적 무의식에 가깝다고 할 정도의 ‘멸망에 대한 감각’이다. 세상이 멸망하는 공포를 소재로 한 만화가 속속 나온다. ‘아포칼립스’물이 세계적 유행이기도 하지만, 일본만의 독특한 성격이 있다는 생각이다.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는 류의 이야기들은 이제 어떤 공식으로 굳어졌다고 봐도 될 정도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만화의 초반부 세팅에서 외부의 무언가가 갑작스레 주인공의 세상에 쳐들어온다. 주로 10대 소년 소녀인 주인공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게임에 갇히고, 국지적 사건인줄 알았던 그 게임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동시다발적 현상으로 밝혀지는데 거의 우주적인 부조리에 가깝다. 아무렇지 않게 압도적인 살육을 일삼는 초강력한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적대자)는 무엇보다 우선 혐오스럽고, 행위의 의도가 불분명하다. 국가 시스템은 이내 무의미해지고, 지극히 평범한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주인공)가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결국 현실을 초월한 판타지적 해결로 이루어진다. 이 해결을 위해 만화 중반이나 결말부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기계장치의 신)에 가까운 뭔가가 나오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른바 ‘떡밥’은 항상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언제부턴가 매번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까닭에 중간에 읽기를 포기한 만화가 숱하게 많다.
필자는 이런 서사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혁신적인 미래형 서사 실험이라고 보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오쿠 히로야의 <간츠>도 이런 서사였고, 하나자와 켄고의 <아이 앰 어 히어로>도 마찬가지로 보았다. 이들 만화는 이야기 자체의 내부적인 완결성이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온다고 해서 꼭 잘못된 이야기가 아니다. 전제가 충분히 있고 플롯과 개연성을 망가트리지 않으면 괜찮다. 복선을 회수하는 방식이 무리가 없는지, 그 결론에 진정성이 있는지가 핵심이다. <간츠>는 결말에서 신과 인류의 문제를 작품의 세계관이 그려낼 수 있는 최대한으로 설명한다. 벌려놓은 사태의 사이즈가 큰 까닭에 그 설명이 아쉽더라도 분명히 사기는 치지 않았다. 충분히 흥미롭고 대담한 결말이었고, 재평가의 가치는 충분하다. <아이 앰 어 히어로>의 경우, 작중 일어난 멸망적인 세계 상황이 주인공에게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 주인공의 성장과 의지의 문제가 실은 세계관보다 우선했던 것이다.
△ <간츠>의 완결 37권과 <아이 앰 어 히어로>의 완결 22권 표지.
(근데 22권은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것인가?)
그러나 <왕 게임>과 <신이 말하는 대로>의 경우, 결국 이 모든 세팅이 이야기 전개상 충격 요법만 반복하기 위한 게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관심이 사그라졌다. 아무 이유도 없는 살상 게임을 계속 봐야할 나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서사가 중요한 매체에서 이야기가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하면, 행위만 있고 아무 가치도 남지 않는 확률 뽑기식 과금형 랜덤 박스 게임과 다를 바 없어진다. 떡밥과 결말이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하나도 궁금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진격의 거인>을 도중에 집어던진 이유는 조금 다른데, 애초에 필자는 일단 잔혹한 만화에 흥미를 느끼는 사악한 독자로서 이 만화에 가득한 전체주의 요소 때문에 만화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작품 내부를 떠받치는 사상이자 정서인 파시즘을 독자들에게 과연 어디까지 관철시킬지가 궁금했기에 나중에 터진 작가의 우익 논란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 식인 거인에 맞선 주인공 부대가 오로지 입체기동의 능력만 가지고서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도 기대하는 전개였는데, 인간 쪽에서도 거인이 나오는 괴이한 판타지의 세계로 이동하자 관심이 급격히 식었다. 이렇게 되자 만화 초반에 보여준 온갖 죽음과 처절한 저항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처음에 독자를 끌어당긴 요소가 결국 충격 요법이고 장치일 뿐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아무튼, 일본은 왜 이런 만화를 그리고 또 열광하며 읽는 것일까? 원폭과 패전 이후 재건의 노력과 몇 십 년의 번영이 끝나자 일본 사회는 고도의 기술 문명을 누리면서도 인간은 소외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전공투가 극단적으로 추구한 진보의 가치는 한때의 치기로서 잊히고 민주주의는 유명무실해졌다. 평화헌법을 뜯어고쳐 전쟁 가능한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우익 정권이 국가를 지배하는데, 도호쿠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정작 정부와 대기업은 무능하고 위선적일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개인은 세계에서 가장 선정적인 수준까지 진화한 온갖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러 스스로 방 안에 고립되어버렸다.
일본의 현 세대에게 세상의 멸망이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어쩌면 이미 직면하고 있는 현실일지 모른다. 한때 덴노(천황)와 제국주의의 노예였던 국민들이 이제 멸망의 두려움 앞에서 사회 문제에 눈 돌린 채 내부로만 숨는 개개인들이 되어버렸다. 세상과 시스템은 바꿀 수 없고 타국과 타인은 두렵다. 개인의 욕망은 소통 없이 망상에 의해서만 해소된다. 필자 생각에 일본은 봉건제도에서 시작하여 철저한 자본주의를 이룬 사회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세계의 표본이다. 나는 세계의 미래, 우리의 미래를 일본의 지금을 통해 상상한다. 그래서 멸망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멸망에 대한 감각은 우리 세대의 내면에도 잠재되어 있다.
△ 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On Violence> (1970)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고 혁명의 세기였고 그래서 ‘폭력의 세기’였다. 20세기는 온갖 전쟁을 통해 전 세계에 멸망과 죽음의 공포를 심었다. 20세기가 끝내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은 건 정말이지 아슬아슬하게 다행인 일이었다. 인류는 스스로 얼마든지 자멸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이후의 세계 질서는 오로지 두려움으로 유지되었다. 두려움을 원한으로 쌓지 않는다면 주로 망각이 편했다. 그래서 우리도 잊는다. 치욕스런 일제 치하와 동족간의 비극적인 전쟁을, 남북이 분단되어 어디까지나 ‘휴전’ 상태의 한반도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지극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고선 북한의 미사일이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질까 우려하지 않는다. 북한이 “서울 불바다” 운운해도 이미 세상살이는 지옥 같고 먹고 살기 바쁠 뿐이다. 멸망의 공포는 정치에 이용되거나, 집단과 개인을 거쳐 혐오와 증오로 돋아난다.
멸망의 세기는 피한 것 같지만 여전히 인류의 내면에 두려움이 남은 21세기. 일본과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다시 읽었으면 하는 만화가 있다. 멸망의 서사를 맨발로 우뚝 서서 거절할, 아니 때려눕힐 작품. 바로 나카자와 케이지(中택(水+尺)啓治)의 <맨발의 겐 はだしのゲン>이다.
△ 나카자와 케이지 <맨발의 겐> (1973~1985)전 10권,
아름드리미디어, 2000반
1945년,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1943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망하고 잔존했던 무솔리니의 괴뢰 정권)에 이어 나치 독일이 무너지자 남은 추축국은 일본 제국이었다. 이미 패전의 기운이 짙은 와중에도, 일본제국은 천황제의 유지를 위해 연합군이 최후통첩으로 전한 ‘포츠담 선언’을 무시하곤 본토 전쟁을 대비한답시고 1억 국민 전체를 죽음을 각오한 결사 항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일본군의 악명 높은 자폭/자살 공격인 카미카제(神風)와 반자이(万歲) 돌격처럼, 국민 역시 천황을 위해 기꺼이 ‘옥쇄(玉碎, 목숨을 바쳐 옥처럼 부수어짐)’하라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 만화의 주인공 ‘겐’은 강직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두 형과 누나, 귀여운 동생과 함께 전쟁으로 인한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소박한 행복을 느끼며 구김살 없이 살고 있었다. 겐의 아버지가 죽창 훈련장에 나가서 국민에게 고통만 강요할 뿐인 전쟁에 반대한다고 발언한 이유로 경찰에게 끌려가자, 가족 모두는 마을 동장에 의해 ‘비국민’으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한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학교에서 전쟁에 반대하고 “난 아빠의 아들이지 천황폐하의 아들이 아니”라고 당당히 말했던 소년 겐은 교사에게 얻어맞고 끌려간 교무실에서, 역시 비국민이라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옷이 발가벗겨진 채 성추행이나 다름없는 모욕을 당하는 누나를 본다. 분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오누이를 마을 꼬마들까지 모두가 조롱할 때, 둘을 위로하는 유일한 사람은 ‘죠센징’이라 놀림을 당하는 이웃의 ‘박씨’뿐이다. 경찰서에서 고초를 당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겐이 부르는 조선인을 놀리는 노래를 듣고 따끔히 혼을 낸다. 전쟁으로 생기는 이익을 탐하는 군부 독재자들이 말하는 거짓을 믿지 말 것,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 고역에 시달리는 조선인과 중국인과는 친하게 지내야만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하는 아버지는 실제로 반전 활동을 하며 군국주의에 반대했던 작가의 부친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딸이 당한 치욕을 알고 아버지는 학교로 쳐들어가 선생과 누명을 씌운 동장의 아들 모두를 두들겨 팬다. “제자들을 선동해 전쟁터로 내모는 너희는 교사가 아니라 살인마”라 일갈하며 뺨을 날린다. 당당한 아버지의 모습을 겐은 자랑스러워 하지만,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장남은 비국민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군 입대를 선언한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떠나는 장남을 태운 기차를 아버지가 멀리 언덕에 서서 바라보며 ‘천황폐하 만세’ 대신 장남의 이름을 불러 “나카오카 고오지 만세!”라고 울며 외치는 장면은 슬쩍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명장면이다.
전쟁 공포와 비국민 차별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던 겐의 가족. 그러나 정해진 시간은 결국 오고야 만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작은 소년(Little Boy, 루스벨트의 별명)’이, 이어서 8월 9일, 나가사키에 ‘뚱뚱한 남자(Fat Man, 처칠의 별명)’가 떨어졌다. 두 원자폭탄의 이름이었다. 국민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고서야 8월 15일, 덴노는 제국의 항복을 선언했다.
△ 나카자와 케이지의 유서이자 유고, <나의 유서 맨발의 겐>
아름드리미디어, 2014
작가 나카자와 케이지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6살이었고 바로 그곳에 있었다. 우연히 초등학교 뒷문의 콘크리트 담 옆에 서 있다가 열선과 폭풍을 피했다. 즉사는 피했지만 바로 그 까닭에 피폭 직후의 지옥을 경험하고 한 평생 각인해야 했다. 자신 역시 피폭된 몸으로 살면서,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던 그날의 사건을 돌이키고 또 되새겨야 했다.
바로 작가 자신인 겐이 원폭이 떨어진 직후 집을 향해 달려가면서 보는 참상은 만화가 아니라 현실의 기록이다. 원폭의 열기에 의해 녹아내린 피부를 줄줄 흘리며 걸어가는 사람들과, 유리 파편이 온 몸에 박힌 사람들, 폭풍에 날아가 나무에 꽂혀 버린 시체, 불에 활활 타면서 날뛰는 말… 생생한 묘사로 그려진 지옥의 한가운데, 도착한 집에선 폭삭 내려앉은 건물 아래 아버지와 누나와 동생이 깔려 있다. 어머니와 함께 가족을 구하려 하지만 소용이 없고 누구 한 사람 도와주질 않는다. 아버지는 겐과 어머니에게 어서 달아나라고 말한다. 이내 건물에 불이 붙고 아버지와 누나와 동생은 겐과 어머니의 눈앞에서 새카맣게 타죽는다. 불길을 피해 달아나던 중에 실성한 어머니는 충격을 받은 탓에 산기를 느껴 길 한복판에서 겐의 막내 동생을 낳는다. 모두 작가가 실제로 보고 겪은 일이다. 이 엄청난 고통을 대체 어떻게 만화로 그릴 수 있었을까. 나카자와 케이지는 이후에도 극중에서 종종 원폭이 떨어진 당시를 회상 장면을 통해 다시 그리곤 했다. 이 장면을 그리는 만화가의 마음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있을까.
목숨을 건졌지만 방사능의 영향으로 겐의 머리카락은 몽땅 빠져버린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몸에선 하얀 구더기가 수백 마리 기어 다니고 히로시마 시내가 온통 시커먼 파리 떼로 뒤덮인다. 폐허에 시체를 모아 태우는 연기가 자욱하고, 겐은 집터로 돌아와 아버지와 누나와 동생의 유골을 파내 가슴에 안고 가지고 온다. ‘비까(원폭)’의 영향은 오래 지속되어 단행본 10권까지 겐의 삶을 고통에서 절대로 놓아주질 않는다. 겐이 만나고 지키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피폭된 방사능으로 인한 병에 의해 세상을 떠난다. 패망 이후에 일본 제국에서 이번엔 미국의 노예가 된 관리들은 방사능의 영향을 은폐하고, 히로시마의 민초들이 겪는 고통은 이전보다 더 참혹하다. 같은 일본인들은 비까를 맞은 사람을 멀리하고 차별하는데, 겐을 계속 도와주는 것은 조선인 박씨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쟁과 원폭의 공포는 다시금 고개를 들고, 군수 물자를 대며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하니 이내 등장하는 무리는 무기상과 폭력배들이다. 군국주의 앞잡이였던 동장은 이번엔 평화주의자로 안면을 바꾸곤 현 의원에 출마한다.
△ 어머니의 시신을 화장했는데 유골이 남아있질 않았다.
역시 작가의 실제 일화다.
그러나 겐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좌절하여 울고 싶을 때마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맨발로 다니며 주변의 고통 받는 사람을 돕고, 권력자들과 아직도 천황과 제국을 말하는 자들에게 주먹을 날린다. “보리는 추운 겨울에 싹을 틔우고 몇 번이고 밝혀도 억센 뿌리를 대지에 내린다. 그리고 하늘로 치솟아 씩씩하게 자라서는 풍요로운 이삭을 맺는다. 너도 보리처럼 굳세게 자라야 한다.” 아버지가 항상 강조했던 말을 겐은 잊지 않는다. 8권에서 살아남은 형제들끼리 각자의 길을 떠나기로 정하면서 강가에 나가 홀로 눈물을 삼키는 겐이, 바닥에 커다랗게 ‘자립’이라고 쓰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작가 나카자와 케이지와 마찬가지로 예술을 통해 전 세계에 평화를 전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화가가 되어 자신의 미래에 도전하리라 마음먹은 겐이 도쿄로 가는 기차를 타고 히로시마를 떠나는 10권의 마지막 장면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 <맨발의 겐>은 일본에서 3부작 영화(1976~1980)로도 만들어졌다.
<기아 해협>(1965)과 <복수는 나의 것>(1979)의 대배우 ‘미쿠니 렌타로’가 겐의 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맨발의 겐>에서 나카자와 케이지는 태양의 모습을 독특하게 그렸다. 하얗게 빛나는 태양이 일렁이며 서서히 퍼지는 모양은 마치 직선을 사방에 쏘아대는 붉은 태양의 욱일기를 정반대로 지우는 것 같다. 그는 일본 내부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온 원폭과 천황과 미국과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본 국민을 희생자로만 그리지 않고 군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조했고 끊임없이 약자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비겁한 존재들로 그렸다. 박씨를 통해 조선인이 입은 원폭 피해까지 언급한 부분은 놀랍다. <맨발의 겐>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작품이 절대로 피해자로서 일본의 입장만 내세우지 않았다는 걸 당연히 알 거다.
<맨발의 겐>은 인류의 유산으로 영원히 남길 만한 위대한 가치를 지닌 만화다. 작가는 가족의 죽음과 한 세상의 멸망을 두 눈으로 보고 겪은, 이미 죽었고 또한 다시 살아난 사람이었다. 지옥을 겪은 사람은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과 슬픔과 원망의 마음을, 국가에 의한 개인의 처절한 비극을 만화 예술로서 끝내 희망으로 승화시켰다. 나로선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핵과 전쟁의 공포는 현재진행형이고, 전 세계적으로 우익의 망령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이 시점, 결국 망상에 지나지 않을 멸망의 서사보다 실제 현실을 딛고 섰던 맨발로 새겨놓은 희망의 서사를 다시 꺼내 읽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