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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만화 : 이이체,

어린 시절 봤던 만화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은 의외여서 놀랍습니다. 물론 제가 만화를 전공하지 않은 만큼 만화를 굉장히 많이 보기는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속한 세대는 만화가 범람하여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 사실은 다소 이질적이지요.

2016-09-21 이이체




어린 시절 봤던 만화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은 의외여서 놀랍습니다. 물론 제가 만화를 전공하지 않은 만큼 만화를 굉장히 많이 보기는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속한 세대는 만화가 범람하여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 사실은 다소 이질적이지요. 그렇다고 만화방을 자주 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초자아가 엄청 커다랗기를 바라던 부모님의 가족관에 따라서, PC방과 만화방은 저에게 금기의 대상 같은 것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그 금기를 남몰래 깨뜨리는 일탈의 카타르시스도 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만화를 감히 ‘많이 보았다’거나 ‘잘 안다’고 말하지 못하게 된 것은, 저에게 아름답고 즐거운 일탈을 제공해주었던 만화라는 영역에 대한 겸허한 존중을 표하기 위한 제 나름대로의 예의, 아니 최소한의 도리일지도 모릅니다.
‘내 인생의 첫 만화’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정확한 것을 짚어낼 수는 없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 실제로 제가 처음 접한 만화를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제가 ‘초창기’에 접했던 만화들을 떠올리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하겠지요. 가령 김기율, 김종래, 길창덕, 이근철, 손의성, 고우영, 방학기, 고행석, 박재동, 황미나, 신일숙 같은 분들의 만화가 그렇습니다. 앞서 언급한 분들은 신문연재만화, 출판만화 등 다양한 방식을 세상에 작품을 실으셨던 것은 물론, 폭넓게 여러 세대의 작가들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분들의 작품을 접했다는 것이 약간 이상할 만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김기율 선생의 경우 1922년생이고 신일숙 선생은 1961년생이니까요. 더군다나 김기율 선생의 작품은 신문 지면에 연재된 것들을 스크랩한 것들로 접했습니다. 청소년기에 어느 선생님께 추천을 받아서 알게 된 고(故) 마정원 작가의 작품도 저에게는 감명 깊었습니다. 비록 일찍 타계하시는 바람에 많은 작품을 남기시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계속 떠오르곤 합니다. 최규석, 윤태호 작가의 작품들도 으레 남들이 호응하는 만큼 접하고 수용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일본 만화와 서양 만화를 보는 것도 자연스러웠습니다. 서양 만화의 경우, 북미의 신문에서 오래 연재되던 『피너츠』와 『가필드』 같은 만화들을 비롯해,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에서 나오던 다양한 히어로물들도 쉽사리 접할 수 있었지요.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 아트 슈피겔만의 『쥐』도 떠오릅니다. 영화감독이자 시인인 조도로프스키와 만화가 뫼비우스(장 지로)와 함께 작업한 『잉칼』이나 중세 판타지 풍에다가 설화적인 요소들을 섞은 『죽음의 행군』이랄지 상상력의 재미로 지어진 세계관 설정의 유희를 맛볼 수 있는 『설국열차』 같은 그래픽노블들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수리부엉이』, 『담요』, 『게릴라들』, 『씬 시티』 등이 기억납니다. 일본 만화는 더더욱 쉽게 접했지요. 제 또래들은 1990년대 들어 노태우 정권의 일본문화 해금을 시작점으로 하여,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계획 아래 몇 차례에 걸쳐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던 과정 중에 자랐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의 다양한 문화 생산물들을 접할 수 있었고, 무수한 만화와 애니메이션들도 거기 속해 있었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접해온 작품들이 숱하게 많이 있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것은 아다치 미츠루, 우라사와 나오키, 하라 히데노리, 시무라 히로아키 등 몇몇 작가들의 작품인데요.


이 가운데서도 특히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다치 미츠루의 『H2』입니다. 줄거리랄지 내용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렵니다. 진부하니까요. 『H2』의 줄거리와 내용도 진부하지만, 그 줄거리와 내용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진부합니다. 야구와 관련된 청춘만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떠한 클리셰가 되어버렸을 정도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이 작품을 언급했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이 만화는 아다치 미츠루의 잘 알려진 출세작 중 하나라서 그렇지, 여성과 청춘을 낭만적으로 대상화하는 그 작가 특유의 한계를 보여준 전형이기도 한 바, 여러모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보다 저는 이 만화가 주는 ‘분위기’와 ‘인상’을 각별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앞서 허다한 만화들을 정리하듯이 먼저 이야기한 것은, 첫 만화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에 필수불가결하게 거쳐야 할 과정인 듯싶습니다. 실제 내 인생의 ‘첫’ 만화라는 것을 기억해내는 것이란 불가능하고, 바로 그것을 찾으려 숱하게 많은 만화들을 떠올려는 과정과 그 안에서 느끼는 향수 어린 분위기, 그런 것이 실질적인 ‘첫’ 만화라는 닿을 수 없는 실체에 가까울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분위기는 상당한 도구적 대상화를 수반하기에 아다치 미츠루의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이 없는 ‘첫’을 떠올리기에 물리적으로나 추상적으로나 가장 가까운 『H2』를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첫을 헤아린다는 것은 원래 이렇게, 잊을 수 없다는 착오로 잊혀지는 운동에 관한 관념적인 산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