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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준의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25 : 황정희, 권영섭, 조항리, 노석규

황정희, 1939년 안성에서 태어났다. 개척기의 유명한 언론인 만화가 최영수 외삼촌을 닮았는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서울예고 시절 교지 거울에 ‘은숙양’을 연재하였다.

2016-09-29 박기준



황정희
1939년 안성에서 태어났다.
개척기의 유명한 언론인 만화가 최영수 외삼촌을 닮았는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서울예고> 시절 교지 <거울>에 ‘은숙양’을 연재하였다. 이때부터 미술과는 또 다른 만화에도 뛰어난 소질이 엿보이고 있었다.
<홍익대학교> 입학 후 인기 만화가 신동헌 선생을 알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2층에 위치한 넓은 화실에 모인 비슷한 또래의 만화 연구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좋은 경쟁관계가 된다. 누드 모델을 앞에 하고 데생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기본기를 배우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때 실습생 중에는 같은 홍대 미대생인 이재학, 그리고 방영진, 신능파(넬슨신), 이우헌 등이 함께 수학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1년을 그곳에서 함께 하며 소재 및 아이디어 발상과 구성에 관한 많은 공부를 했다.
신선생으로부터 수강생 중 기본기가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 서울예고 시절 학우들과. 좌측에 황정희 (1955년 학교에서.)
1955년 <평화신문>에 ‘동태씨’를 연재하며 데뷔.
1956년 <만화소년소녀>지에 편집기자로 취업하면서 대학에 휴학계 제출. 본격적으로 만화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 <만화소년소녀> 시절 좌: 신동우 선배와 함께 (1965년 겨울.)
1959년 최초의 단행본으로 서부만화 ‘평원의 사자’ 발표.
1960년 ‘효녀 심청’ ‘푸른 고향’ 등을 발표.
1963년 <경향신문>에 동물만화 ‘돈길이’를 연재.

△ 동물연재만화, <돈길이> 컷 (경향신문, 1963년)
1965년 시대 활극 단행본 ‘산삼이’를 펴냈다. 산삼이는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폭탄 파편에 상처를 입고 사경을 헤매던 더벅머리 민수는 한의사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소생하게 된다. 그는 전쟁을 모르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산삼을 먹게 되고, 힘센 장사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 뒤로는 농민들을 괴롭히는 악당들을 혼내주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정의로운 일에 앞장서게 된다는 내용이다.

△ <산삼이>, 1965년 소년조선에 60차례 연재 후 단행본으로 펴냄. (오성문고, 1966년.)
1967년 ‘옹고집’ ‘김선달’
1969년 ‘정수동’ 등 우리의 옛 전래동화, 역사, 전설 등 때 묻지 않은 소재를 순수한 그림으로 표현하여 펴낸 것이 특징이다.

△ 우리 역사 해학을 만화화한 작품, <정수동> (1969년.)
1975년 <소년생활>지에 ‘고추어사’를 연재.
1971년에는 <어깨동무>에 ‘미륵왕자’를 연재하는데, 사람들은 이 작품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1978년에는 만화가 협회의 이사로 만화가들을 위해 봉사하기도 했다. 1979년 <코리아 헤럴드>지에 ‘김주사’를 연재.
1982년 ‘김주사’의 연재를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탁구장을 경영했는데, 탁구에 관한한 그에게 도전할 만화가가 없을 만큼 실력이 막강했다.
그는 자신이 그린 캐릭터처럼 강직하고 대쪽 같은 성격을 지녔던 사람으로, 지조 있게 자기만의 작품을 고집했다.
동료들과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칠순을 앞둔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한다.

△ 청소년의 달 협회 임원들과 낙도 삼목국민학교 위문행 선상에서, 좌로부터 박진우, 황정희, 필자, 이갑호, 김찬 (1975년 5월 5일.)

△ 우리만화 초기 선구자 최영수(1947)가 황정희의 외삼촌이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문화계의 거목으로 다재다능한 인재였는데, 한국전 후 납북되었다.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 철원 땅굴 시찰, 앞좌: 신동우, 김영하, 한국일보 기자, 기태곤, 이소풍, 김찬, 차형, 서정철, 필자, 박진우, 이재학 뒷줄 : 허영만, 건너서 이상무, 박부길(전래식), 조치원, 정훈, 강철수, 조현철, 박수산, 여태수, 김호, 김형배, 김인홍 사무국장, 황정희, 박기정, 권영섭, 이우봉 (협회 임원·중진 일행, 1980년.)

△ 동아 LG 국제만화 페스티벌, 팬 사인하기 바쁜 날 (2005년 7월 30일.)

△ 서울예고 시절, 교지 <거울에> 연재

△ 소년소녀지, 자매지 <소녀> 출간 광고 (편집부 근무, 1967년 4월.)

△ 카툰 착각 (1974년.)

권영섭
939년 경북 영주 출생. <신학대학>을 중퇴한 기독교 신자이다.
학창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교회 봉사활동으로 누구보다 열린사회를 향해 앞장서 걷고 있었다.
1958년 <대구 매일신문>의 신춘만화 공모전에서 입선.
1959년 <연합신문> 공모전에서 가작 당선. <아리랑>지 만화전에 응모하여 ‘카툰’ 입상.
당시 심사 위원이었던 인기 만화가 김경언 선생의 부름을 받고 상경, 어시스턴트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창작품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1959년 <연합신문>에 ‘우리들의 척척박사’를 연재하기 시작.
1959년 단행본 ‘퉁탕이’를 출간하며 데뷔.
1960년 <크로바문고>에서 ‘오손이도손이’를 발행하며 주변에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1961년 <부엉이문고>에서 발표한 ‘오손이 형제’ ‘울밑에선 봉선이’ 시리즈로 인기 작가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 <오손이 형제>, 부엉이 문고

△ 봉선이 하고 바둑이 시리즈 (1962년.)
1964년 ‘북두칠성’ 발표.
1966년 ‘새야 새야 파랑새야’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등을 펴내며 바쁜 몸이 되었다. 그의 대표작 ‘오손이형제’의 내용을 보면, 모범생인 형 오손이와 말썽쟁이 도손이가 강원도 변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산에 갔던 아버지가 어미를 잃은 새끼 곰을 데려 오자 도손이는 너무나 좋아한다. 허나 연방 사고만 치는 걸 보다 못해 산속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그린 감동 작품으로, 그의 작품 속에는 철저한 기독교 신앙이 바탕이 되어 몸에 밴 사랑이라는 테마가 항상 자리하고 있다.
만화가 중에서 우량 만화를 많이 펴낸 작가로도 평판이 자자하였다.
1968년 <한국만화가협회> 초대 부회장 역임. 협회 내 <기독만우회> 결성.
1992년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연임하며 친목과 봉사활동, 만화가의 권익옹호, 한국만화를 세계에 알리는 등 국제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임원들과 함께 아시아 만화계를 통합하는 친선 단체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1993년 <한국만화가협회> 공로상 수상.
2004년 <아시아 만화가대회> 공로상 수상.
2010년 아동 문학회 <색동회> 상 수상.
옳다고 생각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만화계의 대쪽 같은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현재는 원로 만화가들을 규합, 원로 만화가 협회를 조직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 한국 기독만화 선교회 활동

△ 일본 만화가 협회 총회 초청으로 임원 대표 인사, 좌 : 황재, 박봉성, 필자, 통역, 권영섭 회장 (1992년 6월 12일.)

△ 일본 굴지의 출판사 소학관 박문, 앞좌 : 필자, 통역, 뒤 : 권영섭 회장, 고행석 이사, 박봉성 부회장, 황재 이사 (1992년, 6월 12일.)

△ SICAF 전시회 참관, 좌 : 필자, 김성환 고문, 권영섭 회장, 사이로 (1998년 1월 8일.)

△ 오손이 형제, 본문. 이 작품에는 기독교 정신을 많이 사용, 감동을 준다. (1962년 6월 25일.)

△ <꼬마 박사> 학습 만화 연재, 조선일보 (1962년 10월 21일.)

△ 표현의 자유 수호 범 만화인 대첵 기자회견, 공동대표 권영섭 이두호, 좌: 이희재, 이현세, 이두호 (1987년 8월 31일.)

조항리
1940년 서울 출생.
학창시절의 꿈은 원래 동양화가였다.
1958년 <자유신문>에 투고한 4컷 만화 ‘화등잔’이 데뷔작이 되었다. <서라벌예대>에 입학 활동한다.
1959년 <새벗>지에 ‘종달이’ 연재.
1960년 첫 단행본 ‘별 하나 나 하나’를 펴내고 고민하던 때였다. 당시 신동우의 ‘날쌘돌이’ 시리즈가 한창 화제가 되고 있었다. 각 출판사에서도 신인만화가들의 특출난 아이디어에 의한 새로운 작품이 나와 주길 원하고 있었다.
좋은 소재 거리를 찾아 몇 주 동안 서점만 들락거리던 조항리는 탐정 활극 만화에 도전해 보기로 결정하고 내용을 여러 가지로 정리하여 초안에 들어갔다. 하지만 캐릭터와 제목을 정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제목은 작품의 판매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에 당시 인기리에 상영되던 서부영화 ‘혜성과 같은 사나이’가 번쩍 눈에 띄었다. 옳지, 저거다 하고 생각한 그는 ‘혜성 같은 소년’이라고 제목을 정했다.

△ 대표작 <혜성 같은 소년은 알고있다>, 독수리 문고 발행 (1960년.)
과연 1960년에 이 작품 시리즈가 발표되면서 그는 단박에 인기 작가 대열에 올랐다. 이토라는 일본인이 훔쳐간 가야 금관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국보를 훔쳐 배에 싣고 도주하던 중 풍랑을 만나 배는 바다에 침몰해 버린다. 20년 후 주인공 소년이 배가 침몰한 지점이 그려진 비밀지도를 우연히 손에 넣게 되면서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 소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체스터 콜드의 추리소설을 각색하여 재구성해서 펴낸 작품으로, 제임스 본드의 ‘007’ 영화와 소설이 장기에 걸쳐 히트하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었던 것이 작품의 성공으로 연결되었던 셈이다.
△ <혜성 같은 소년은 알고 있다>의 본문, 마치 영화와 같은 입체 연출, 영화에 지대한 관심이 표현된 작품 (1960년.)
1961년 <중앙만협> 단체장으로 활동.
1964년 ‘끝없는 도전’ 발표.
1970년 ‘잃어버린 지구’ 발표.
1972년 대중지 <명랑>에 ‘우수리’ 연재. <만화왕국>에 ‘빅토리 삼총사’ 연재. <어린이문예>지에 ‘밤토리’ 연재.
1967년 <삼성재단>의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 애니메이터로서 동화부에 소속, 한일합작 동화제작에 참여하여 ‘황금박쥐’와 ‘요괴인간’을 제작했다.
1976년 ‘로봇 태권V’의 김청기 감독과 협력하여 성공 후 본격적으로 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순수 예술을 전공한 작가답게 치밀한 데생과 탄탄한 그림실력을 바탕으로 한 투시도적인 구도가 두드러진다.

△ 김청기 감독과 조감독으로 함께 제작, <로보트 태권V>, 수출용 팸플릿 (1976년 여름.)

△ 세일지에 옮겨진 로보트 태권V의 중요 캐릭터들.
1994년 <대교출판>에서 ‘밤토리 만화일기’가 서점 단행본으로 발표.
1996년 <대교출판>에서 ‘밤토리 목민심서’ 발표.
1998년 월간 <일러스트>지에 컬럼 연재.
1999년 <파랑새 출판사>에서 ‘밤토리 삼국유사’ 발표.
1998년 ‘카툰의 세계’ 발행. 노후에는 카툰에 열정을 불태우면서 애니메이터로서 활동하고 있는 조항리는 만화 이론 분야에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춘 만화가로 기억될 것이다. 2012년에 자서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펴냈다.


△ 우뢰매 1탄 포스터 시안, 한국 최초 합성 영화, <우뢰매> 제작 상영 (1986년.)

△ 부천국제만화축제 로보트 태권 V 전시장, 좌 : 조항리, 필자, 박기소, 권영섭, 이화춘 (2000년 1월 7일.)

△ 한일 연하 엽서 교류전, 좌로부터 장태산, 이두호, 필자, 손기환 교수, 조관제, 심일보(SBA 대표이사), 이현세 회장, 사이로, 김원빈, 조항리 (서울애니메션센터 전시장, 2008년.)

△ 부천국제만화축제장, 앞좌로부터 이희재 위원장, 필자, 조항리, 박기소 (2015년 8월.)

노석규

1939년 서울 출생. 학창시절부터 깔끔한 그림으로 주위 시선을 끌었던 그는 학교 환경정리를 도맡았을 만큼 미적 안목이 뛰어났다.
특히 만화를 좋아해서 방영진, 이우현, 권영섭, 신능파(넬슨신) 등과 친밀하게 지냈고 김경언, 신동헌, 등 유명한 만화가들과도 정보 교류가 끊이지 않았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미대는 갈 수 없었고, 당시 일반적으로 상과 계통을 선호하는 추세였으므로 부모님의 의사에 따라 <경희대학교> 경제과에 입학했다.
1958년 <아리랑> 소설계를 통해 작품 데뷔.
1960년 <서울신문>에 ‘하마군’ 게재.
1963년 <조선일보>에 ‘초롱걸’ 연재. 이어 <주부생활>에 ‘초롱댁’ 연재.
1965년 <소년조선일보>에 ‘꽃분이’ 연재
1966년 <농민신문>과 <새농민>에 14년간 만화 연재.
1968년 <어깨동무>, <소년중앙>에 ‘얄숙이’ 연재.

△ 노석규의 얄숙이 캐릭터
1969년 <서울우유> 사보에 ‘낙동가족’ 30년 연재.
1979년 <석탄공사> 사보에 ‘딱다구리’ 20년간 연재.
1982년 <소년중앙>에 ‘뽀야네 집’ 8년 연재.
1956년 김성환 회장이 이끄는 단체 <현대만화가협회>의 회원으로 가입, 만화가들과의 친목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노석규는 우리 명랑만화의 대명사라 불러도 좋을 만큼 티 없이 맑은 내용의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특히 수줍고 아리따운 새색시를 캐릭터로 등장시킨 ‘초롱댁’은 남성 위주의 이야기가 아닌 여성 특유의 패션, 액세서리, 헤어스타일, 성격 등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덕분에 주부들에게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남성작가였다.
청소년지에 등장한 ‘얄숙이’ 또한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워서 한국판 ‘꼬마 루루’를 보는 것처럼 볼을 꼬집어 주고플 정도의 친밀한 캐릭터였다.
이 등장인물들은 어렵고 힘들었던 지난 시절 우리 사회의 여성상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현재 그는 공인중개사로 노후를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고 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면서 분위기를 잡아가는 역을 도맡아 하고 있다.
밝은 목소리와 아기자기하고 깜찍했던 만화가 잘 조화되었던 작가다.


△ 노석규 원작, <얄숙이와 얄봉이> (1995.)

△ 노석규의 <초롱 걸>, 한국만화선집에서 발췌 (1975년.)

△ 노석규의 대표 캐릭터와 작품, <얄숙이>, <초롱댁>, 신문 잡지 연재용

△ 만화 연구실 시절, 좌 : 노석규, 이상호, 이정문 (퇴계로에서 1975년.)

△ 최초 청강 만화박물관 참관, 좌: 박기준, 노석규, 박기소 (청강문화대, 2000년 10월 29일.)

△ 야스쿠니 신사를 풍자한 재일유학생 카툰전 <제2회 돌창고 풍자만화회 전시회>, 좌로부터 필자, 한영섭 상명대 학장, 황선길 한국애니고 교장, 노석규 (서울애니메이션센터, 2006년 10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