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만화 시장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 만화는 출판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48쪽의 컬러 양장본 만화- 48CC : 48페이지, Couleur(색깔), Couverture cartonnee(하드 커버)-로 그 이미지가 대표되어 왔다. 여전히 48CC의 특징을 가진 작품들도 꾸준히 선보여지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히 다른 형식의 만화들이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 그림 1. 48CC로 대표되는 에르제의 『땡띵의 모험 - 카스타피오레의 보석』 표지
물론 아시아 만화 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커다란 변화의 파도’ 같은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 기존의 문화 시장에 알맞은 ‘작고 꾸준한 변화의 물결’은 감지된다. 기존의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기존의 것에 더해지고 어우러져 ‘다양성’을 만든다.
폭넓은 작품들의 등장은 결코 짧은 기간 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데, 최근의 유행이나 경향을 무작정 좇아가기 보다는 시간을 들여 각각의 작품 세계관에 맞는 이미지를 찾고 스스로의 언어로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자연스레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한국에도 잘 소개된 바스티앙 비베스(Bastien Vives)를 필두로, 기존의 프랑스 만화와는 조금 다른 젊은 작가들의 작품 활동이 눈에 띠고 있다. 그들의 특징은 1) 일본 애니메이션과 망가의 영향을 받은 그래픽과 칸 분할 연출을 구사한다는 것과 2) 다소 사소해 보이는 개인의 이야기를 그리는 경우가 잦다는 것, 3) 작업 과정에서 부차적인 위치에 머물렀던 컴퓨터 사용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 그림 2. 바스티앙 비베스의 『폴리나』
오랫동안 애니메이션 감독 혹은 원화가로 일했던 프랑수아 베르땅(Francois Bertin)이 2016년 1월 자신의 그래픽 노블 『Regarde les filles』 (여자들을 바라봄/프랑스 Vraoum 출판사)을 출판했다. 작업에만 1년 이상 매달린 그의 첫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특징들을 모두 갖고 있다. 흑백의 단순화된 그래픽과 ‘말하기보다는 보여주기’에 더 치중한 세밀한 칸 분할, 개인적 서사, 종이 없이 드로잉부터 컴퓨터로 창작하는 과정까지.
△ 그림 3. 프랑수아 베르땅의 『Regarde les filles』 표지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던 그가 ‘가까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멀리 있는’ 만화라는 분야에 발을 내딛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은 앙굴렘 작가의 집에 입주하여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분야의 입문자부터 전문가까지 모두 다 모여 있는 전문 레지던시에서는 작가 간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 창작 방식의 다양성을 목격할 수 있었고, 계약서 작성법이나 저작권 보호 등 작품을 위한 시스템의 도움을 부차적으로 받을 수도 있었다.
프랑스의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커리어의 처음부터 200~300페이지 가까운 그래픽 노블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자신을 출판 시장에 제대로 인식시키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자신을 둘러싼 여자들(어머니, 누이 형제 그리고 여자친구)과의 관계를 그려낸 자전적인 이야기에 230페이지가량을 할애한 프랑수아 베르땅의 작업 욕심도 그와 비슷했다.
다년간 애니메이션을 작업하면서 컴퓨터 작업에 익숙해진 그는, 만화의 전 과정을 망가 스튜디오를 이용해 그려낸다. 즉흥적이며 단순한, 그렇지만 정확한 선의 맛을 가장 잘 만들어 낼 수 있는 방식을 택한 것이며, 실제 종이와 펜을 사용했을 때와는 또 다른 성격의 선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작업 세계가 한층 풍부해졌다고 말한다.
△ 그림 4, 5. 프랑수아 베르땅의 『Regarde les filles』
첫 만화를 출판하고서 가장 달라진 점은 다수의 페스티벌과 지역 서점 등에 초대되어 다양한 독자들과 동료 작가들, 출판 관련 인사들을 만날 기회를 많이 갖게 되었다는 것을 꼽는데, 실제로 프랑스의 만화, 출판 페스티벌(대표적인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 이외에도 다양한 소규모의 페스티벌이 있다.)과 서점이 만들어내는 지역의 문화는 작가 간, 작가 독자 간의 소통을 도우며 창작물의 지지대 역할을 한다.
90년대 그래픽 노블과 대안 만화가 두드러진 이후로, 자전적 텍스트를 이야기하는 작품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다만 초창기의 자전적 이야기와는 다르게, 최근의 자전적 이야기는 소재의 면에서 더 가벼워진 양상을 갖는다. 전쟁이나 거부할 수 없는 사회적 변화 같은 거대한 흐름을 이야기로 다루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작고 하찮아 보이는 개인의 경험을 보다 구체적이고 리얼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프랑수아 베르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야기에서 다루는 주변인들에 대한 염려는 당연히 수반되지만,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통해 이해받고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공감을 받는 것은 아주 멋진 경험이라고 말한다. 애니메이션과 첫 그래픽 노블, 현재 작업 중인 작품에서 계속 반복되는 한 가지 테마가 있는데 그것은 ‘무언가 우리보다 더 강한 것이 만들어내는 것’, 즉 우리를 ‘매혹, 매료’되게 만드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야기에 ‘매혹’을 하는 인물과 그에 ‘매료’되는 인물을 등장시키며 어떤 경우에는 인간관계에 대한 묘사를, 어떤 경우에는 스릴러 혹은 미스터리 장르를 위한 실마리로 그려내고 있다.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원화가로 이제는 젊은 프랑스 작가군의 경향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만화 작가로 쉼 없이 이미지를 통해 말하고 있는 프랑수아 베르땅, 한국의 독자들이 그의 작업을 만나게 되는 때도 머지않아 보인다.
△ 그림 6, 7. 프랑수아 베르땅의 일러스트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