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1950년 <춘천사범학교> 졸업.
1953년 <경향신문>에 입사하여 기획의원 겸 관광부장, 디자인 담당으로 재직했다. 전쟁으로 인한 피난지에서 그는 신문 잡지에 시사만화, 어린이 만화를 게재하며 만화가로도 데뷔한다.
1956년 김성환과 함께 <현대만화가협회>를 창립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8년 <조선일보>에 1년간 ‘달랑쇠’를 연재. 4컷 명랑만화 ‘두더지’를 3년 연재, 그리고 1컷 시사만평을 연재하였다.
1961년 5월 <경향신문>에 4컷 시사카툰 두꺼비와 경향만평을 연재한다.
일찍이 프랑스의 혁명가 도미에는 필립 왕을 풍자 비판하는 정치 카툰을 강하게 표현,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왕의 미움을 받아 투옥, 사망하게 된 역사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안의섭은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는 4.19 학생 운동에 발맞춰, 정치를 비판하는 소재로 캐릭터 ‘두꺼비’를 내세워 시사 카툰을 그리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언론이 탄압을 받던 시대였으므로 간접적인 정치 풍자만화로 시선을 끌었던 기존 작가들보다 한발 더 나간 직설적인 풍자로, ‘두꺼비’는 독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 정치사의 질곡과 영욕의 현장을 고스란히 경험했던 그는 끝내 작품 연재를 중지당하는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다.
△ ① 한국전쟁 6·25 소재. 고바우, 김성환 이후 가장 오래 연재 된 신문 시사 만화 /
② 한국일보를 통한 언론자유를 강력히 주장한 만화로 인해 해임당한 계기가 된 문제 만화
△ 신문 전속 만화가로 각별한 사이인 안의섭, 박기정, 1970년 겨울.
그러나 신문 게재 정지 처분이 내려졌어도 그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몰랐다. 신문과 라디오 시대여서 인기 프로 재치 문답의 단골 게스트로 초대되어,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다.
매년 서울 부산 대구 등을 왕래하며 문화인 야구대회가 개최되었는데, 배우 팀에서는 후라이보이, 그리고 만화가 팀에서는 안의섭이 명사회자로 쌍벽을 이루었을 만큼 재치와 유머를 다재다능하게 구사하였던 만화계의 인재였다.
한때 민주당의 선전부장직도 맡아 정계에서도 활동했던 경험도 있다.
1967년 월간 청소년지 <소년두꺼비>를 직접 발간하고, 심명섭과 조관제 등을 편집책으로 발탁하여 많은 만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 주기도 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일보>에 다시 시사 카툰 4컷 ‘두꺼비’를 연재하였다. 또 <일간스포츠>에 ‘세상만상’을 연재하던 중 전두환 대통령을 폄하한 ‘대통령 각하, 오래 사십시오’ 라는 내용의 시사만화에 분노한 상부의 압력으로 또 다시 연재 중단, 가택연금과 함께 대외활동이 중지되었다.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한국일보>에 다시 4컷 시사 카툰을 연재한다. 그 해 그는‘관훈클럽 언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후 <문화일보> 시사 카툰의 연재를 끝으로 그의 작품은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신문시사 만화에서 ‘고바우 영감’의 김성환과 함께 양대 산맥을 일구었던 실력 있는 만화가였으나 아쉽게도 칠순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현대만화가협회 부설 대한아동만화가협회 결성, 앞좌 : 김완기, 안의섭(고문), 박기정(회장), 이영복 /
둘째: 유림, 박기준, 함일용, 김복남 / 셋째: 윤석환, 이종진, 박교순, 심명섭. 1960년 8월 15일.
△ 한국시사만화가협회 안의섭 화백 추모비 제막식 / 좌: 안태경 등 가족, 세번째 : 김성환, 이홍우, 한 분 건너 조태호 /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송우리, 1996년 7월 28일.
△ 안의섭의 작품들
1927년 만주 용정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함께 월남하였고, <용산중학교>에 다니면서 신동우와 만나 만화계에서 활동하게 된다.
초기의 박현석의 그림을 보면 그림체가 신동우와 많이 닮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956년 청소년 인기 만화월간지 <만화세계>에 ‘벼락동자’를 실으며 기초를 다진 후, 독자적인 그의 대표작 ‘바람돌이’를 연재하게 되었는데,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면서 삽시간에 신분 상승했다.
바지저고리를 걸친 터벅머리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바람에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종횡무진하면서 펼쳐나가는 검객물이다. 불의가 행하여지는 곳에 바람같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정의의 소년이라 하여 일명 ‘바람돌이’. 그는 농민들을 괴롭히는 산적들을 상대로 맹활약, 통쾌한 승전을 보여 준다.
권력을 이용하여 못된 짓을 일삼는 관리들도 그의 사냥감이자 표적이 되었다. 이 시대사극을 소재로 한 명랑만화는 색다른 연재물로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자 라이벌 잡지인 <만화학생>, <만화 소년소녀>, <우리세계> 등에서도 청탁이 쇄도하여 쉴 틈 없이 연재만화를 그려야 했다. 신동우와 인기 순위가 역전되던 시기로서 그의 작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청소년 만화잡지에서의 시대극화 붐은, 김경언, 신동우와 함께 이 ‘바람돌이’ 시리즈가 하드커버 125쪽짜리 새로운 만화 단행본의 붐을 일으키며 극화 붐까지 잠재웠을 정도다. 이들 세 사람을 만화계에서는 명랑만화 3인방이라 칭하였고 최고조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1961년 일어난 5. 16 사건 이후, 잡지 단행본의 붐은 사라지고 대본용 시대가 도래하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 최고의 인기 캐릭터로 만화세계지의 주가를 높인 연재 만화, 태풍소년 바람돌이, 1959년.
‘아기 도깨비’ 시리즈, ‘발발이 사장’ 시리즈, ‘시골애 갑득이’ ‘두메골 소년장사’ 등 청소년 만화를 주로 그렸으나 유행이 한물가고 난 뒤의 인기는 전 같지 않아졌다.
‘바람돌이’의 옛 인기를 소생시켜 보고자 시대배경을 한국전쟁으로 하여 수퍼맨처럼 활약하는 ‘북진 바람돌이’ 시리즈를 펴내기도 했다. 또 용감하게 적군과 싸우며 용맹을 떨치는 반공만화는 후반기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다.
△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승공만화 북진 바람돌이, 연속 단행본으로 발행
1981년에는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직을 맡아 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역부족으로 중도에 사퇴한다. 그 후 출판 사업에도 참여하기도 하고 독점 만화 출판사 합동에 도전해 보기도 했으나 재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자녀를 따라 미국 윌리엄스버그로 이민을 갔다가, 근래에 귀국했다. 만화가들 모임에도 참여하고 자서전도 준비하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 프랑스 만화가 초대전 / 앞좌 : 외국인, 신동우, 주영 / 뒤 : 외국인, 황정희, 외국인, 두 사람 건너 박현석, 외국인, 임수/
교보문고에서 열린 초대전, 1980년대 추정.
△ 장병 위문 후 임진각에서 협회원 일동 / 앞좌 둘째 : 박현석, 임수, 이상호(회장), 길창덕, 김정파, 손의성 / 둘째 : 최운정, 박진우, 천광석, 김인홍(국장), 한 분 건너 이범기 / 셋째 : 신동우, 정욱, 심명섭, 두 분 건너 이행남, 김기태, 김기백, 이정민 / 넷째: 이선우, 한 분 건너 김세종, 최석중, 최세종, 장병욱, 장훈, 강철수 / 끝 줄 셋째 : 허정문, 황재, 이재진
△ 만화의 날 행사장에 참가한 박현석 / 좌로부터 신동헌, 박현석, 이풍원, 이상무, 2014년 7월 4일.
△ 노익장을 과시하며 귀국 후에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박현석, 2013년.
1930년 만주 용정 출생. 해방과 함께 월남하였고 <서울미대>에서 공부한 미술학도였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하여 청소년만화 대본점 일을 하며 연명했다.
부두 노동조합에서 일하던 부친이, 일본과 부산을 왕래하던 선원들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쌓아놓고 읽던 인기 최고의 일본판 타잔 극화 ‘소년 케니아’ 시리즈를 입수하게 된다. 그 책을 보게 된 서봉재는 한국에서도 번역해 팔게 되면 틀림없이 흥행이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세계문화사>의 김성옥 사장을 찾아가 면담 후 출판을 확약 받게 된다.
대본시대가 등장하기 전 일본에서는 가미시바이(그림연극)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원작자 야마가와 쇼지(山川物治)는 가미시바이 글·그림의 흥행에 있어 최고 인기 작가였다.
서봉재는 즉각 작업에 들어가서 원고지에 스케치한 다음 펜으로 씌우고 번역 대사를 넣어 완성하여 출판하게 된다.
1951년 국판 100 쪽으로 제작된 고급 단행본 ‘밀림의 왕자’ 상하권이 서점에 등장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판매 완료되었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 본 여타 출판사들이 3, 4, 5, 6편을 재빨리 복사판으로 제작하여 먼저 서점에 펴내 버리는 바람에 흥행은 그것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그때가 일본 해적판 만화가 우리 땅에서 최초로 선보인 때였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자 출판계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1952년 서봉재는 부산 <국제 문고>에서 4×6판 24쪽짜리 창작 단행본 ‘도깨비 섬의 비밀’을 출간한다. 이어서 ‘유령의 복수’ ‘파도’ ‘파묻힌 진주’ 등 24쪽짜리 작품을 연속 발표하였지만 ‘밀림의 왕자’ 때와 같은 영광은 다시 오지 않았다.
△ 데뷔작 <파도>, 산해당 발행, 1950년.
1955년 서울로 돌아온 후, <세계일보(구 중앙일보)>에 4컷 시사만화 ‘Mr 싸이렌’을 54회에 걸쳐 연재한다. 또 청소년 만화지 <만화세계>와 <만세>에도 유머와 극화를 연재하였지만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했던 시기였다. 기발한 소재와 뛰어난 필체를 가진 신인 만화가들이 속속 등장 만화계의 판도가 뒤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일본의 인기 만화가 노라구로(다가와 스이호)의 동물 의인화 단편 만화 ‘문어군’을 ‘문어 짤짤이’로 바꾸어 재구성해 펴내며 한숨 돌리려는 듯 했으나 이것도 여의치 못했다.
나중에는 피난 시절의 ‘밀림의 왕자’를 재편집하여 ‘밀림의 북소리’로 바꾸어 시리즈로 펴내며 한동안 그것으로 연명했다.
결국 너무 일찍부터 일본의 좋은 만화에만 의존해 왔던 것이 오히려 발전할 수 있었던 그의 순수 창작의 길을 방해하게 된 셈이다. 창작이 얼마나 중요한지 만화가를 지망하는 많은 후배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지난 일이지만 그는 훗날 ‘밀림의 왕자’ 원작자가 일본 만화가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쁘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일본의 수준 높은 우수 명작을 한국에 소개해서 작가들의 안목을 넓혀준 공로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민주화가 시작되기 전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리스로 이민을 떠났다.
△ 일본판 타잔 <소년 케니아>는 전후 일본 만화계를 뒤흔들었다. 위는 애니메이션화 한 작품, 1952년.
△ (줄거리)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피신, 정글을 헤메던 중 맹수의 공격으로 부자가 이별
△ (줄거리) 부추장에게 배신당해 쓰러진 마사이족 추장을 구해줘 친구가 된다.
△ (줄거리) 새롭게 사귄 친구들과 함께 아프리카의 드넓은 초원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 이 즈음, <타잔> 명화 시리즈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어 마침 소재로 붐을 이룰 때다, 1918년.
△ (줄거리)캐릭터 조니 와이즈 뮬러와 동물들의 맹활약 /
이 때부터 화면 위주의 영화, 줄거리 위주의 만화는 밀접한 관계를 이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