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0일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만화가 중 한사람인 장 지로- 필명 뫼비우스가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그의 생전에 한 번도 그를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지만 거장의 마지막 가는 길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3월 15일 그의 장례식이 있었던 파리 7구의 생뜨 클로틸드 대성당으로 향했다.
평소에 뫼비우스의 성격이 유쾌한 편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장례식에 가는 길은 이상하게도 엄숙한 기분보다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나를 포함해 세명의 작업실 친구가 그곳에 가기로 했는데 한명은 뫼비우스의 열렬한 팬이지만 일러스트를 하는 다른 한명의 친구는 열렬한 팬은 아니였다. 그에게 물었다.
그 사람 생전에 만나본 적은 있었어 ? ≪ 응, 딱 한번. 만화 전시회에서 봤는데 그 사람을 만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그 사람의 겸손함 때문에 많이 존경하게 되었어. 젊은 작가들에게도 진심어린 친절한 충고를 해주었고, 우리가 그림에 대한 칭찬을 하니, 나는 그림을 잘 못그려요.. 해부학도 많이 틀려있고..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 그 사람 입에서 그림을 못그린단 이야기가 나올지 누가 기대했겠어. 그런 겸손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
흠… 프랑스 사람들에게도 겸손이 큰 미덕인 줄 몰랐는 걸..
≪ 우리에게도 겸손함은 미덕이야. 그것이 과장되고 거짓되지 않았다면.. 그림 1. 뫼비우스의 장례식이 열렸던 파리 7구의 생뜨 클로틸드 성당의 모습
사실 뫼비우스에게도 젊은 한때 거만함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거만함과 자신감은 그 시절의 그의 그림에도 잘 나타난다. 어떤 그림들을 보면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주지!’ 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의 그림이 절제되어 가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장례식장인 생뜨 클로틸드 성당 앞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장례식이 가까웠지만 성당앞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진 않았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공원에 모여앉아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례식 행사가 시작되는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조금씩 성당안으로 사람들이 몰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성당에 들어서자 디즈니 스튜디오와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낸 화환이 가장 눈에 띄였다. 뫼비우스와 미야자키 하야오, 두 사람의 인간적 교류는 유명하다. 두 사람은 프랑스에서 이미 공동전시회를 가진 적이 있었고, 뫼비우스는 그의 딸을 미야자키 만화영화의 주인공 이름과 같은 나우시카로 지었다.
장례식 행사가 시작되자 언제 들어왔는지 꽤 큰 성당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중간 즈음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얼핏 낯익은 사람이 앉을 곳을 찾더니 내 바로 뒷줄 자리에 앉았다. 어허.. 이런.. 엔키 빌랄이다. 장례식 도중에 엔키 빌랄이 뫼비우스에 대해 하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그림 2. 장례식순을 설명하는 소책자. 뫼비우스의 그림이 실려 있다.
오르간 연주가 시작되고 뫼비우스의 관이 성당안으로 들어왔다. 미국 영화에서 보던 반짝 반짝 광이 나는 금빛 손잡이가 달린 관이 아닌 니스만 발라놓은 소박한 나무관이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프랑스에서는 화려한 관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관을 반쯤 열어 놓고 조문객들이 고인의 얼굴을 보며 인사하는 관습도 없다고 한다. 성경의 몇 구절을 낭독한 후. 뫼비우스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그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 했다. 그의 딸 나우시카는 슬픔에 겨워 흐느끼는 목소리로 언제나 자상하고 자식들에게는 기꺼이 같이 시간을 보낼 줄 알았던 아버지로서의 그의 모습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은 유머 감각이 있고 그림을 사랑했던 작가로서의 그의 모습을 추억했다. 그의 낙천적인 성격때문에 장례식의 분위기가 그리 무겁지는 않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많이 빗나갔다. 그의 가족과 친지들은 슬픔에 겨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고 분위기는 숙연했다.
문화부 장관인 프랑수와 미테랑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그가 프랑스 문화에서 가졌던 위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뫼비우스가 만화계에서 대단한 인물이라고는 해도 문화부 장관이 직접 그의 장례식에 온다는 것은 만화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쉽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테랑 장관은 앙굴렘 페스티발이 존폐위기에 처했을때 정부의 지원을 약속하기도 한 친만화적인 장관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조문객들이 고인의 관에 손을 대고 묵념을 하는 순서가 되었다. 줄을 선 채로 순서를 기다리다가 방문객들을 쳐다보았다. 여러 분야의 유명인들이 눈에 띄였다. 만화작가들과 출판사 사람들은 물론 영화계와 문학계 사람들도 보였는데,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뫼비우스가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의 한국어판을 위해 특별히 삽화를 그려 준 것은 알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인연이 그것으로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지는 모르겠다. 그림 3. 장례식이 끝난 후 성당 밖에서 장지로의 출발을 기다리는 사람들.
관은 성당을 나와 장지로 향했다. 성당을 나온 나와 작업실 친구들은 잠시 동안 말이 없이 어색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작업실로 향했다. 고인의 생전에 한 번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거장의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를 할 수 있었기에 조금 위안이 되었다. 뫼비우스의 편안한 영면을 빌었다.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꽃 화분을 하나 사가지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