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8년 부산 출생. 본명 권성국
1960년 학창시절부터 미술반을 주름잡던 솜씨로 군에 입대한 후 <진중신문>에 연재만화로 데뷔한다.
1963년 <부산일보>에 어린이 만화 연재. 신흥대학교(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중퇴. 서울 신촌의 만화 단행본 출판사 등을 찾아다니며 습작에 열중.
1966년 <동양TV> 동화제작부의 애니메이터로 입사.
1967년 <세기영화사> 단편 문화 영화 제작에 애니메이터로 참여.
1968년 <주간한국> 신인만화 작가 작품 현상 공모전에 당선하면서 <주간한국>에 ‘장안치’ ‘시인이로소이다’를 연재하였다. 이어서 ‘천연덕군’ 연재.
1970년 <일간스포츠>에 ‘미스터 한데’ 연재. <가톨릭신보>에 ‘시몬’ 연재.
이 시기에 신문 잡지의 명랑만화와 카툰 부문에서 인기를 구가하며 동생 권평국과 함께 부산 출신의 형제 만화가로 장안의 주가를 높였다. 여동생 권기옥은 코미디언 겸 탤런트가 되어 인기를 누렸던 시기다.
1983년 <일간스포츠>에서 인기리에 만평을 연재하던 중, 정부 비판성 만화라 하여 작품을 중단하고 물러나야 했다. 비슷한 시기에 동생 권평국도 <중앙일보>에 게재하던 성인만화 내용이 미풍양속에 위반된다 해서 작품을 중단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져, 세 남매의 기발한 상상력과 즐거움을 안겨주던 밝은 테마가 깔린 새로운 작품들이 빛을 잃게 된다.
그때 권평국은 한국에서는 아직 불모지였던 고급 애로틱 만화 장르에 전력을 쏟고 있었는데, 때를 잘못 만난 탓으로 붓을 꺾고 지내다 50세에 간암으로 생의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 <백제출판사>에서 ‘솔방울 전우’를 발표하며 허어의 인기가 다시 오르는 듯 했다.
1981년 <일간스포츠>에 ‘미스터 펀치’ 연재.
1985년 ‘스포츠 만평’ 연재, 2년간 기자로 재직한다.
항구도시에서 태어나서인지 남달리 낚시에 대한 취미가 높았던 탓에 만화가 낚시클럽 <심수회>를 만들어 고우영과 함께 리드해 나가기도 했다.
2005년 일본을 개화시킨 ‘왕인박사’에 대한 위인전기 단행본을 <문예원>서 발행.
부산 출신의 만화계 인재 김용환, 김의환 형제의 계보를 잇는다 싶을 만큼, 형제 신문 만화가에서 애니메이터로, 코미디언이자 탤런트로, 또 편집기자로 넘나들던 허어 3남매가 점차 독자의 뇌리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그의 새로운 기백으로 옛날 전성기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것이 독자들의 바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 1968년 4월《주간한국》의 ‘10만원 고료 연재만화 모집’에 응모, 당선된〈장안치〉(좌)와 시상식(시상자 : 한국일보 이기석 국장) 장면(우)
△ (좌) 부친과 형제 만화가인 동생 권평국과 함께(1980년대) / (우) 여동생 권기옥과 함께 집에서 ※ 권기옥(코미디언, 1970년대),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땅딸이 이기동과 명콤비로 활동함.
△ 허어는 군 제대 후 1964년 《경남일보》를 시작으로 《일간스포츠》, 《가톨릭신문》, 《대한전문건설신문》, 《국방일보》, 《내외경제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 4컷 만화를 연재하였다.
△ 대표적인 학생잡지 《학원》에 게재되었던 만평(1969.10)
△ (좌) 취미 낚시로 인해 모임이 시작된 심수회 회원들(앞 : 이정문, 오성섭, 윤승운, 김삼, 김박 / 뒤 : 허어, 김원빈/1970년대) (우) ‘심수회 파노라마’ 허어의 카툰(1988년 作/1992년 《만화터》 게재)
△ 심수회 신년회(이정문, 김원빈, 오성섭, 윤승운, 박수동, 고우영, 허어 / 2005년 2월)
△ 대전세계박람회 참가(왼쪽부터 대회임원, 이정문, 허어, 대회장, 길창덕, 김박, 박수동, 김원빈 / 1993년)
△ 심수회 멤버였던 고 김원빈 작가의 한국만화박물관 기증자료 특별전 ‘주먹대장展’ 오프닝(2015.03.17) (앞줄 : 남은경(고 김원빈 작가의 조카), 이근철, 허어, 박기정, 신문수, 박기소, 박수동, 이두호, 필자 뒤줄 : 조항리, 이소풍, 손의성, 이윤경, 김삼, 이정문, 윤승운, 정재헌(부천시의원), 조관제, 김준, 하고명, 이재진, 김동화)
△ 동생 권평국이 《주간스포츠》와 《선데이서울》에 연재한 작품들을 묶어 《권평국만화집》으로 발행(1980, 문예원). 권평국은 1972년 〈빤순이 자존심〉을 주간지 《선데이서울》에 연재 중 출판물에 의한 외설물 배포 혐의로 서울신문사를 사퇴함.
1941년 일본 규슈에서 태어났다. 소녀시절부터 독서와 명화 감상이 취미였다. 그리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주변에는 그린 그림들이 여기저기 어수선하게 널려 있어 가족들로부터 꾸중 듣기 일쑤였다 한다.
여학생 시절에 최상권의 극화 ‘흘러간 삼남매’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으나 정작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대학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틈틈이 그린 작품을 정리하여 ‘광문당 문고’를 찾아가게 되는데, 이로써 천부적 재질을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길이 열리게 된다.
그는 1961년 판타지 순정만화 <장미의 눈물>로 데뷔하였다.
장미 공주는 샤킹 왕자와 약혼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풀 왕자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삼각관계를 둘러싼 얘기다. 하지만 풀 왕자를 사랑하는 마녀의 딸 앙카는 사사건건 장미 공주를 괴롭히며 고난의 나날을 겪게 하는 스토리였는데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1961년 <개구리왕자>, 1964년에는 <로즈마리>, <능금나무 아래서>, <훈풍의 언덕>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1967년 결혼 후 안정감을 찾은 그녀는 크리스토프 폰의 동화를 각색한 ‘천사의 꽃바구니’ 시리즈를 펴내며 환영을 받았다.
1978년 《여고시대》에 <두 마리 백조>를 연재.
1979년 《소년한국일보》에 <철없는 약속>을 연재.
1976년 성인만화 <청춘교실> 발표.
2001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특별상 수상.
2006년 명지대 사회교육원 만화 창작과 강사 역임.
△ 스크랩한 파일을 들어 보이는 순정만화가 장은주와 유대인이면서도 독일군 장교가 되어 동족을 배반한 주인공의 운명을 그린 <속죄>의 상권 표지(1971년 합동문고)
△ <신비의 나라> 표지와 속표지, 등장인물 소개(1972년 합동문고)
△ <빨간 카네이션>의 표지와 본문. 헤어진 엄마를 그리워 하며 행방을 찾는 소녀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잘 표현된 만화로 전후의 시대상을 그려냄(1968년 합동문고)
△ (좌)1997년 제2회 아시아만화대회 출품작, (우) <초청장을 접한 인어공주>(만화정보지, 2006년 5월)
△ 1974년 5월 국립중앙공보관에서 개최한 제2회 한국만화작품전 수상자들 (앞좌 : 김용도, 신동우, 이상무, 이고환, 뒷줄 아홉번째 이상호 한국만화가협회장, 장은주, 김길웅)
△ 1988년 3월, 한국만화가협회 신임 회장단 취임과 방문객들 (왼쪽부터 이상호, 황정희, 박수동 부회장, 이정문 이사, 장은주, 고우영 회장)
△ 광주만화예술학원 방문기념 사진(1990년 1월) (왼쪽부터 안중규, 이희재, 김동화, 오세호, 김수정, 육홍타(일간스포츠 기자), 조득필(원장, 현 세한대 교수), 장은주)
△ 과천국립미술관에세 개최한 한국만화100주년 전시관에서(2009년 6월 2일) (왼쪽부터 허어, 신동헌, 장은주, 박기소, 사이로, 노석규)

1936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해방이 되던 해 울산으로 귀향했다.
부산 동래중학의 미술부원으로 맹활약하였으며 여느 학생이나 다름없이 만화계에 관심이 많았다.
1960년 졸업 후 인기 만화가 박기당 선생의 부름을 받고 작품 도우미로 상경, 기초를 다지게 된다.
1964년 스승의 추천으로 ‘오성문고’에서 사극 <자명검>, 스파이 사극 <국제지령> 그리고 2차 대전을 무대로 한 극화 <최후의 전선>으로 데뷔했으나 작품성을 갖고 승부하기에는 역부족임을 깨닫고 실력을 더 기르기로 작정한다.
그런 그가 1968년 드디어 일을 내고 만다. ‘광문당’에서 <외팔검>으로 큰 호응을 얻으며 대 장편 극화 시리즈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역사 위주였던 스승의 극화와는 또 다른 검객 위주의 얘기로서, 미국의 서부 영화가 인기라면 동양에는 무협물의 인기가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때마침 홍콩의 검객 영화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환영을 받고 있던 무렵이었다.
1970년 ‘파랑새문고’로 옮겨가 <떠나간 외팔이>, <돌아온 외팔이>, <외팔하인>, <양지를 찾아서>를 연속 발표하였다. 그리고 전쟁극화로 <목숨을 걸고>, <고독한 영웅> 등을 발표하였다.
1972년 <검호 찾아오다> 발행.
그의 강점인 묵직하고도 사실적인 표현은 학창시절부터 익힌 데생 실력이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어렸을 적 일본에서 자주 보며 자랐던 흑백 사무라이 영화도 작품 활동에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한창 탄력적으로 일하고 있을 때인 1974년 만화 출판계에는 큰 파동이 일고 있었다. 이때 의리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던 성격 탓에 김기태는 출판업에도 관여하게 된다.
무협극 <복수무정>시리즈, 전쟁극화 <김기인 대령의 영웅담>, <전쟁과 평화>를 잇달아 펴냈으나 자금 사정에 의해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된다.
이 때부터 점차적으로 만화 작업은 뒤로 밀리게 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서게 되었다. 자연히 대부분의 작품은 문하생들이 작업한 작품이어서 인기는 더욱 뒤로 밀리게 되었다. 고육지책으로 학습극화를 맡아 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를 당해 왼팔을 다치면서 안타깝게도 그림에 손쓸 여유가 없게 되었다. 오른 손에만 의지해야 하는 재활치료보다 팔순을 바라보는 그에겐 이제 건강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무협 극화 소재로는 전문 개척자 그룹에 해당하는 만화가로 꼽힌다. 다이내믹한 표현 및 개성적인 스토리 전개로 이름 높았던 그의 옛 극화 작품의 향수를 독자들은 고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 경주산업관광 견학단 일행(왼쪽부터 김기태, 이근철, 박기정, 필자, 심명섭, 1978년 10월)
△ 1996년 한국만화가협회 원로 송년회(앞좌 : 하고명, 김기태, 정훈, 뒤좌 : 이범기, 이현덕)
△ 1998년 원로만화가 송년회(왼쪽부터 김기백, 이근철, 이현덕, 임수, 이우봉, 오른쪽 김기태)
△ 부천국제만화축제 원로만화가 핸드프린트 행사(2006년 8월) (앞줄 왼쪽부터 조항리, 사이로, 장은주, 서정철, 김기태, 필자, 차형 뒤줄 왼쪽부터 이용철 팀장, 임형택 상임이사, 이두호, 김동화, 유광남, 조관제, 그외 부천시 공무원)
△ 김기태 작가의 대표작으로 명성을 높혀준 무협극화 <외팔검> 시리즈(1968년 합동문고)
△ 김기태는 귀국 전 일본에서 검객 영화에 많은 흥미를 갖고 보았다고 한다. (좌) <아라시 간지로>(1934년) / (우) <구라마 뎅구>(1925년)
△ <검돌아오다>의 광고페이지. 구도가 양페이지로 펼처져 박진감 넘치는 묘사를 보여준다.
△ <떠나간 외팔검> 2부 2권 중에서. 한 팔을 쓰지 않고 칼을 휘두르는 무사의 박진감이 잘 묘사
△ <복수무정>의 본문. 영화처럼 활동감 있게 연출
△ <양지를 찾아서> 상, 하(1972)와 <검호 찾아오다> 상,하(197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