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벌판에 논과 밭만 있던 80년대에 나도 부천서 5년을 살았었는데, 그런 곳 부천이 ‘만화천국’이 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한국 만화 발전을 위한 여러 지원과 행사를 많이 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고마웠어요.”
작가 이근철은 용인시 기흥의 자택을 찾아온 일행에게 먼저 만화도시 부천에 대한 고마움을 먼저 전했다.
그는 1960년대 한국 만화계에서 기존 만화 미학의 틀을 깨고 나타나 돌풍을 일으켰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만화 단행본의 가지런한 칸을 대담하게 헐어 그림이 크게 보이게 하는 칸 구성을 하고, 인체와 캐릭터의 과장을 극대화 시켜 다이내믹한 장면 연출로 보수적이었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한 ‘롱다리’ 캐릭터와 ‘이근철 식’의 독특한 포즈, 스크린 톤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꼼꼼한 마무리로 현실감 높인 배경, 그리고 유치한 듯 하면서도 색다른 의성어 ‘으잉’, ‘이크’는 독자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당시 일반적인 만화의 내용은 60년대 사회상을 비추듯 ‘슬픈 감성 만화’가 주된 스토리를 이루고 있었고, 캐릭터도 5등신 내외의 약화가 주류였던 시대였지만 서서히 시대적 문화의 변화를 바라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새로운 소재와 독특한 캐릭터의 이근철 만화가 독자의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조센징’으로 보낸 일본에서의 유년 시절, 미적 재능에 눈뜨다 큰 꿈을 안고 일본으로 간 부친을 따라 국민학교 6학년까지 오사카에서 살다가 귀국한 이근철은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학교에서 실시한 일제의 태평양 전쟁을 독려하는 내용의 포스터 그리기 공모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그는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일본 제국군 군함이 연합군 함대를 상대로 포격하여 격침 시키는 장면을 그렸는데 그 작품이 얼마 후 학교 강당 뒷벽에 게시되었다.
당시에는 나이도 어렸고 일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피아간의 구별도 못했고, 전쟁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었지만, 그는 주변의 칭찬에 그저 기뻤고 그림에 대한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중 일제 패망의 기색이 짙어가던 시기였기에 만화는 물론, 일러스트 잡지조차 볼 기회가 없었는데, 학교 근방에 살던 일본인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일러스트 잡지와 만화를 처음 보게 된다. 그 중에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만행을 저질렀던 장군 가토 키요마사가 호랑이를 때려잡는 일러스트를 보고 감동받아 모사(模寫)를 하기도 했다. 연합군의 폭격을 피해 오사카 변방으로 이사하며 전학을 갔지만 그 학교에서도 이근철의 그림에 관한 재능은 금세 소문이 났다.
일본에 있을 때는 ‘마늘 냄새나는 조센징’으로 괄시를 받았고, 일본 패망 후 다음 해 가족을 따라 김천으로 정착했지만, 일본에서 말과 글을 배우다가 귀국한 이근철이었기에 우리말과 글을 몰라 다시 1학년부터 수업을 받았다. 그 당시에는 문맹자들이 많아서 글 배우지 못한 나이 많은 학생들이 많은 상황이라 함께 공부하며 적응해 갔다.
너나 할 것 없이 먹고 사는 1차적인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던 시절이라 어느 집이나 자식들에게 공부보다는 농사짓기를 원했다. 그러나 어린 이근철은 농사보다 배움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밭일을 하는 것이 살길이라는 부친의 주장과, 농사는 할 일이 아니다, 공부를 하겠다는 이근철의 신념은 자주 충돌했다. 그래서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아버지의 매를 맞으면서 자란 고집쟁이 소년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먹고 사는 1차적인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던 시절이라 어느 집이나 자식들에게 공부보다는 농사짓기를 원했다. 그러나 어린 이근철은 농사보다 배움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밭일을 하는 것이 살길이라는 부친의 주장과, 농사는 할 일이 아니다, 공부를 하겠다는 이근철의 신념은 자주 충돌했다. 그래서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아버지의 매를 맞으면서 자란 고집쟁이 소년이었다.
아버지 말씀이 절대적이었던 시절이었지만 어린 이근철은 밭일과 땔감 노동 대신 책을 들고 있었다. 이런 이근철의 근성이 뒷날 만화계의 무법자들에게도 굴하지 않고 인기 작가로서 자기 길을 확고하게 걸을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헐리우드 필름들이 일으키고 낡은 만화책이 이끈 만화가로써의 삶 이후 해군에 입대한 이근철은 영사실에서 근무하는 수병과의 친분 덕분에 영화를 볼 기회가 많아졌는데, 그 당시에 봤던 로마 역사물, 웨스턴 무비, 1,2차 세계 대전등의 시대극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된다.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여전히 어눌한 한국어 발음탓에 해군 동료들로부터 자주 놀림을 당하게 되는데, 이런 경험은 제대 후 오랫동안 모르는 이들과는 교류하지 못하는 트라우마로 남아 청년 이근철을 괴롭혔다.
해군에서 제대를 한 이근철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골 생활을 접고 양장점을 하던 누나만 믿고 서울로 상경한다. 누나가 마련해 준 등록금으로 홍익대 미술학부에 진학은 했지만, 학비 마련을 위해 학업과 막노동을 병행하기도 했다. 홍대 미술학부 1년을 다니다가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휴학을 하게 된 이근철은 어느날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삼선교 다리 위에 기대서서 “희망도 없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돌아 갈 것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해 버릴까?”하며 심각한 고민을 한다.
그러던 중, 그의 귓전에 바람에 흩날려 책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누가 보다가 버린 만화책이 바람에 파다닥 넘어가고 있었다. 박기당의 ‘가나다라 왕국’이라는 작품이었는데 묻어있던 더러운 흙을 털고 닦고 해서 반이나 떨어져 나간 만화를 보는데 굉장히 재미있는 것이다. 물론 이근철은 그 당시 대 작가였던 ‘박기당’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이 사람도 이걸 그려서 돈을 받을 텐데, 나도 만화를 그리면 학비를 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만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시장 생선가게나 정육점 포장지를 통해 접했었던 망토 휘날리는 슈퍼맨 만화를 보고 평소에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그였다. 미대를 다니고 있었지만 만화를 어떻게 그려야 될지 몰랐던 그는 생선이나 고기 포장용 포장지를 정성스럽게 닦고 펴서 그림을 찾아내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런 어슬픈 접근을 통해 ‘로빈 후드’를 색연필로 컬러까지 해서 원색 만화원고 20쪽을 완성시키기도 한다.
만화 제작 방법을 누구한테 물어 볼 사람도 없어 무조건 칸을 나누며 긴 종이에다 칸을 쳐서 작품을 완성시켰다. 동네 사진관하는 친구와 항상 응원해 주던 누나, 그리고 누나의 양장점 직원들에게 보여 주곤 했는데 그들의 응원과 칭찬은 그야말로 고래를 춤추게 하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완성시킨 작품을 들고 만화 출판사들이 많다는 신촌으로 가는데, 신촌까지 갈 차비가 없어 원고 뭉치를 들고 돈암동에서 아현동까지 걸어갔다. 그 당시 꽤 명성 높았었던 만화출판사 광문당을 찾아가 무조건 작품을 봐 달라고 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하며 첫 좌절을 맛본다. 당시에 출판업자와 작가들의 비지니스 공간은 아현동 굴레방 다리 인근의 다방이었는데 이근철은 이곳을 다시 공략한다. 물론 만화의 기본이나 원고 사이즈도 모르는 이근철의 원고는 출판사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여러 출판사 사장들을 잡고 끈질기게 원고를 보여 주었다. 이렇게 고군분투하던 그에게 누군가 ‘북행열차’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서봉재 선생을 소개해 주었고 선생으로부터 한시적이나마 문하생 수련을 받게 되면서 본격적인 만화계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풋내기 만화가, 자기 그릇의 크기를 인정받다.
평소 그를 눈여겨보던 서울문고 조상형 사장을 통해 드디어 이근철은 만화가로 데뷔하게 된다. 승부욕 강한 이근철은 기성작가의 화풍이나 스토리 구성을 탈피한다. 자기 식대로 칸을 나누고 데뷔작 ‘마도로스’의 주인공은 ‘케리’라는 외국 이름에 생김새도 길쭉하게 그려 당시의 만화체와는 차별화하였다. 당시 작품의 가격은 70쪽에 22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무늬만 작가이지 원고료는 쌀 두말이요, 그것조차도 책이 팔린 후 정산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사정을 따질 위치에 있지 못했었던 이근철은 홀로 원고 마감에만 집중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외국 이름의 주인공이라 거부감도 있으리라는 부담도 있었지만 영화를 좋아했었던 이근철은 미국 영화가 붐을 이루던 그 시대 분위기에 대담하게 승부를 걸었다.
그리고 낯선 캐릭터에 맞는 독특한 연출을 위해 칸을 늘려 화면을 크게 보이도록 했고, 극적 효과를 살리기 위해 의성어 개발에 노력한다. 일반적으로 만화 연출에 있어서 위기 상황에 대한 표현은 ‘앗’, ‘엇’ 등의 의성어가 사용되었으나 이근철은 ‘으잉’, ‘이크’ 등과 같은 독자적인 의성어를 배치하였다. 도제식 시스템 하에서 신인작가의 대부분은 스승의 화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근철은 이러한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분방한 캐릭터와 스타일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만화 연출에 있어서 위기 상황에 대한 표현은 ‘앗’, ‘엇’ 등의 의성어가 사용되었으나 이근철은 ‘으잉’, ‘이크’ 등과 같은 독자적인 의성어를 배치하였다. 도제식 시스템 하에서 신인작가의 대부분은 스승의 화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근철은 이러한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분방한 캐릭터와 스타일을 개발할 수 있었다.
머리 감기가 귀찮아 베레모 쓰는 것으로 대신하고 담요를 뒤집어 쓴 체 자기가 책상에 앉아있는지 자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몰두하느라 씻지 못해 누나까지 쉰내가 난다고 핀잔 받으며 비장하게 작업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도로스’, ‘출격기’ 등 서너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독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삼선교 다리 인근 달동네 판자집 이근철의 작업실을 출입하던 출판사 관계자는 힘든 화풍을 고집하는 이근철에게 그 당시 인기절정의 작가 김경언 같이 쉽게 쉽게 만화를 그려야 돈 번다고 충고를 하기도 했지만, 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작가적 고집은 결국 소리 소문 없이 열혈 독자층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자신의 작품이 굉장한 히트작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그저 원고 작업에만 매진하던 이근철에게 어느 날 제보가 들어온다.
“지금 선생 책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 아는가?”
“지금 엄청난 히트를 치고 있는데 왜 그러고 있나. 만화방을 한 번 가서 확인을 해 보라”는 식이었다.
집에 돌아온 이근철은 부인을 시켜 시장통 만화방을 다녀오게 한다. 제보처럼 만화가게마다 그의 신작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고 아이들이 그의 만화를 찾느라 난리법석이었다.
어느 만화방을 둘러보아도 똑같은 현상이라는 말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직접 만화방을 찾아 간 그는 기쁜 마음에 만화방 문밖에서만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지켜보았다고 한다.
과연 만화방에서는 아이들이 ‘이근철 만화’를 찾느라고 난리였다. 이근철 만화를 찾는 독자가 많아 책의 회독율을 높이기 위해 세 쪽으로 분책을 해서 갈라 보도록 하는가 하면, 남이 먼저 볼세라 엉덩이 밑에 숨겨 놓고 볼 정도로 인기였다. 출판업자는 실제 이근철의 작품으로 인하여 상당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지만 이근철에게는 이런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었던 것이다. 이 무렵부터 그는 원고 마감을 늦추는 것으로 출판사에 나름의 시위를 시작하는데, 다급해진 출판사의 태도와 대우는 이때부터 바뀌었다.
<조국을 등진 소년> 이근철을 대가의 반열에 올리다 <조국을 등진 소년>의 빅 히트로 작품에 자신을 갖게 되고, 독자가 원하는 정서를 파악해서 작품을 발표하니 작품마다 대성공을 거둔다. 그의 인기는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학교 담을 넘어 ‘이근철 만화’를 보러 간다는 신문 기사까지 날 정도였다. 유명 브랜드 상품은 신용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기 작가 이근철도 독자에게 실망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 작품마다 정성을 들였다.
“그림, 스토리, 연출 모두 중요하지. 그러나 그 중에서 내 작품의 독자들은 스토리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리고 감정 표현을 위한 캐릭터의 표정에 리얼리티를 살려 차별화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조국을 등진 소년’은 이근철을 단숨에 히트 작가로 만들었다. 이근철은 운이 좋았다며 늘 겸손해 하지만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몇 안되는 작가였다. 나치의 게슈타포를 주제로 작품을 발표하면 그런 영화가 나오고,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발표하면 ‘벤허’같은 대작이 나와 이근철 만화와 상승작용을 하게 만들었다. 특유의 승부욕과 고집으로 외국인 이름의 캐릭터를 내 세운 새로운 화풍의 작품을 독자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근철은 삶의 대단원을 담은 자전적 작품 <블랙 박스>를 끝으로 만화계 일선에서 물러난다. 재일 교포로서 일본인들에게 설움 받고 고생만 하신 부친을 기리며 만든 작품이다. 히트작이 목적이 아니라 만화계를 떠나면서 무언가 의미 있는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싶어 좋아하던 골프장에도 나가지 않고 열심히 했지만 이미 다른 문화 속에 살고 있는 독자들은 알아주지 않았다.
이근철은 동료 작가였던 고 임창 선생의 충고 덕에 원로 작가 중에서도 소문 난 부자다. 이근철을 동생처럼 대해주던 ‘땡이’의 작가 임창은 새 출판사와 계약을 해서 돈이 생길 때마다 곳곳에 조그만 땅을 샀다. 그 당시 인기 작가들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입을 올렸지만 예술가들이 의례 그렇듯이 돈에 대한 개념이 없이 저축이란 것을 몰랐다.
이런 분위기에 이근철도 휩쓸릴까 걱정한 임창은 ‘고료 받아 쓸데없는 짓 말고 투자를 하라’는 충고를 하였고 그 덕분에 이근철은 부동산 투자에 눈을 떴다. 경기도 기흥의 집과 땅 2,000평도 원고료를 투자해서 일군 곳이다.
자제들 교육비에, 집안의 대소사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려고 팔고, 생활비 하느라 팔아 남아있는 700평 대지에다 기흥에서 소문난 음식점 ‘향촌’을 둘째 아들 내외와 운영하고 있다. 만화도 열심히 그렸지만 이곳을 꾸미느라 고생도 많이 했다.
만화계, 좀 더 근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가 되길 “만화가 좋아 만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만화는 중노동이다. 정신력이 없으면 만화가가 될 수 없다. 혼을 심지 않고는 작가가 안 된다. 그림만 잘 그려서 만화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원로 작가를 모르는 세태에 이근철은 섭섭하다. 어째서 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있는 줄을 모르는가. 그림에 소질이 있어 히트 작가가 되면 그만인데 선배가 무슨 소용이 있냐는 생각을 가질는지는 몰라도 인기는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유명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후배에게 대접받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충고를 한다.
지금도 이근철은 ‘박기당’, ‘김종래’가 있어 그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존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없는 사람이 벼락부자가 되면 없는 사람 괄시하듯 하는 천박한 문화가 형성되는 풍토에 안타까워한다. 제자들도 가끔 놀러 오는데, 그림 실력은 있지만 히트 작품 한 편 내지 못해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생계를 위해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는 말에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노 작가는, 작가 자체를 존중하고 예의를 다하고 존중 해 주는 만화왕국 일본의 문화가 부럽다고 한다.
한국은 인기 없는 ‘죽을 쑤는 작가’는 무시하고 작가 대우조차 제대로 안 해 준다는 이야기에 안타까워하며, 출판하는 이들이 돈도 중요하겠지만 인품이 있는 사람이 운영해서 작가를 존중해 주는 풍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갈비씨 작가 이상호 선생이 회장으로 있을 때 일본 작가들과 교류하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일본어를 잘하는 이근철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 시절부터 교류했던 몇 분 안 되는 만화계의 원로 박현석, 손의성, 신동헌, 백산, 김원빈, 최석중, 김기백, 김기태 선생의 안부를 궁금해 했다.
지금은 다리 수술 후유증과 허리 수술한 부위도 불편하여 거동이 힘드시다. 만화계 행사에 제대로 참여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원로작가는 좋은 후배가 왔으니 한 잔 하겠다며 잔을 채워 들이킨다.
먼 길 왔는데 대접을 못해서 미안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뵙고 좋은 말씀 듣고, 함께 사진 찍을 수 있게 귀한 시간 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접을 받은 거라고 말씀 드렸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 할 무렵, 자리를 일어서는 일행과의 헤어짐이 아쉬워 이근철 선생은 오랫동안 서서 우리를 배웅해 주셨다.
※ 본 글은 필자가 2016년 11월 15일 이근철 작가의 집을 방문,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이근철(본명 : 李根日)
1935년 일본 오사카생, 일본에서 국민학교 6학년까지 수학
1946년 귀국, 김천에 정착.
1961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입학
1963년 〈마도로스〉로 만화계 입문
1964년 〈조국을 등진 소년〉, 〈카르타〉, 〈기관단총 케리〉 등 발표
1970년 〈잠수 특공대〉, 〈여자 스파이〉 등 발표
《소년서울》에서 〈불타는 대지〉 5년 연재
1975년 《소년동아》에서 〈제2전선〉 연재
1978년 《소년조선》에서 〈아! 태극기〉 연재
1980년 〈번지없는 거리〉 〈뉴욕의 안개〉 등 발표
1988년 자전적 만화 〈블랙 박스〉 발표 후 은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