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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만화 : 문소영, <마니 (유시진 작)>

『마니』를 ‘내 인생의 첫 만화’로 꼽는 이유는, 만화잡지로 보거나 빌려서 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처음으로 책으로 사서 소장한 만화이기 때문이다. 일단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마니(摩尼)’부터 마음을 끌었다. 이 만화 덕분에 사전을 뒤져보고 마니가 불교 설화에 나오는 귀중한 구슬로서 여의주와 비슷한 것이며 그 광채로 악과 재난을 물리치고 탁한 물을 맑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월인석보』 같은 우리 옛 문헌에 나오는데도 미처 몰랐던, 그래서 그만큼 더 신비롭고 매혹적인 존재였다.

2017-01-20 문소영




“이게 왜 순정만화에요? 순정이 안 나오는데?”

재작년 네이버 웹툰 코너에서 연재된 <한국만화 거장전: 순정만화 특집>에서 이런 댓글을 많이 봤다. 아아, 이게 바로 세대 차구나. 여성작가가 여성독자를 타겟으로 그린 만화를 다 ‘순정만화’라고 불렀던 건데 지금 10-20대는 그걸 모르는구나. 하지만, 가만! 이건 사실 맞는 질문이잖아? 나 자신도 십대 때 ‘순정만화’를 보며 그걸 이상해 했었잖아.

물론 ‘순정만화’라는 명칭에 걸맞게, 별빛으로 그렁그렁한 큰 눈의 여주인공이 블링블링한 드레스를 걸치고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만화들이 당시에 많긴 했다. 그때도 SF, 판타지, 미스터리 취향이었던 나는 그런 만화가 재미 없었다. 하지만 남성작가들이 남성독자 타겟으로 내놓은 SF 어드벤처 만화들도 정이 가지 않았다. 하필 내 손에 들어온 만화들만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남성캐릭터들은 손발 오그라들게 허세 넘치는 대사와 액션을 날리고, 여성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가슴만 크고 뇌는 없는 듯한 게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한 만화들은 김혜린, 신일숙, 강경옥 같은 ‘순정만화’ 대가들이 ‘순정’에만 치우치지 않게 그린 역사 SF 판타지 만화들이었다. 내 십대 시절, 그러니까 90년대 초반, 전성기를 맞은 만화잡지들에 이런 작가들이 로맨스를 거의 배제한 실험적인 SF 공포 스릴러 단편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들의 작품은 무조건 ‘순정만화’로 분류됐다. 여전히 등장인물의 눈이 크고 머리카락이 아르누보적으로 물결쳤기 때문이었을까?

이때 처음 등장한 여성 작가들 - 박희정, 이빈, 유시진 등등 - 의 작품은 더욱 ‘순정만화’스럽지 않았고 나는 그들에 열광했다. 그림체도 확연히 달랐고 각 프레임의 이미지와 이야기 전개가 마치 영화 같았다.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는 독립영화의 분위기를 가진 옴니버스 휴먼드라마였고, 이빈의 『걸스』는 유머와 박진감 넘치는 여고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야기할 유시진의 『마니』는 한국 설화를 바탕으로 한 판타지였는데, 그 시도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데도 이들 역시 차세대 ‘순정만화’로 분류됐다… 웹툰 시대에 들어와 남녀별 선호 만화의 경계가 예전보다 모호해지면서 ‘순정만화’라는 명칭은 사라졌지만, 과거 만화에 대해서도 이 명칭을 좀 재고해보면 어떨까…

아무튼, 그 전부터 만화를 봤지만 『마니』를 ‘내 인생의 첫 만화’로 꼽는 이유는, 만화잡지로 보거나 빌려서 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처음으로 책으로 사서 소장한 만화이기 때문이다. 일단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마니(摩尼)’부터 마음을 끌었다. 이 만화 덕분에 사전을 뒤져보고 마니가 불교 설화에 나오는 귀중한 구슬로서 여의주와 비슷한 것이며 그 광채로 악과 재난을 물리치고 탁한 물을 맑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월인석보』 같은 우리 옛 문헌에 나오는데도 미처 몰랐던, 그래서 그만큼 더 신비롭고 매혹적인 존재였다.


주인공 마니는 오빠 해루와 함께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보이지만, 사실 인간계로 도망쳐온 용왕의 딸이며 적룡, 즉 붉은 용이고, 해루는 그녀의 보호자(겸 가정부)인 용족의 강력한 주술사다. 마니는 밝고 정이 많으면서도 필요할 때 단호해지는 성격이고, 해루는 비밀스럽고 차가운 공기에 둘러싸인 듯한 인물이지만 마니를 지키는 일과 가사일(!)은 진지하고 빈틈없이 해낸다.

이들이 인간계로 온 이유는 용족의 독특한 왕위 계승 방식 때문이었다. 용왕의 모든 자식이 목숨을 걸고 서로 마력을 겨루는 의식을 치러야 하며, 마지막 한 명만이 살아남아 다음 용왕이 되는 것이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마니는 성년이 되자마자 이복오빠 소양과 싸워야 하는데, 백룡인 소양은 이미 성년이 된지 오래인 데다가 전설적인 제1대 용왕(천제의 딸)만큼 강력한 마력을 지녔다고 하니, 마니는 거의 승산이 없다. 따라서 죽을 게 뻔한 딸을 살리기 위해 마니의 어머니가 은둔 주술사 해루를 설득해서 마니를 데리고 인간계로 피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때 마니의 어머니가 냉정한 해루를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중대한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만화 후반부에 반전으로 작용하며, 그 비밀에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옛 신라의 처용설화가 절묘하게 연결돼 있다. 만화 초반부에는 마니가 학교를 다니고 친구들과 부대끼며 인간세상을 알아가는 에피소드들이 소소하게 펼쳐지다가 중반부에 소양이 보낸 주술사가 추격해 오고 후반부에 해루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사실 지금 보면 초반 전개에 허술한 점도 보이고 남녀 주인공들, 특히 해루의 심리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도 마력을 사용한 전투 장면 이미지들이 제대로 화려하게 구현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그럼에도 이 만화가 ‘내 생애 첫 만화’인 것은, 한국 설화를 바탕으로, 그리고 여성을 중심으로 한 서사로, 이만큼 독특하고 스케일 있는 세계관을 펼쳐 보인 만화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해루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마니의 갈등이 진부한 듯 하면서도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었다.

사실 『마니』는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라기보다 그 컨셉트를 바탕으로 장려한 스케일의 판타지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작품이다. 실제로 유시진 작가는 제1대 용왕과 관련해서 『마니』보다 훨씬 어둡고 깊은 내용 및 거대한 스케일을 갖춘 서사시적 만화 『신명기』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어떤 사정에서였는지 중단해 버렸다.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나는 『마니』가 좀더 다듬어져 진화한 이미지의 웹툰으로 다시 연재된다거나, 장려한 비주얼의 판타지 영화로 재탄생하길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