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다니던 학원 건너편에는 ‘영화마을’이라는 대형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비디오 대여점이 그렇듯 ‘영화마을’은 영화뿐만이 아니라 만화책도 대여해주곤 했다. 열 서너 살 남짓한 아이들은 그곳에 앉아 돈을 내지 않고 만화책을 뽑아 봤고, 자기 돈이 나가지 않는 알바생은 그 아이들에게 그 어떤 꾸중도 하지 않았었다. 아이들은 그 형을 방정환이라고 부르곤 했었다.
그 형을 방정환이라 부르던 아이들 중엔 물론 나도 포함되어 있었고, 나는 주로 남들이 잘 보지 않는 만화책을 가장 구석에서 뽑아 보곤 했었다. ‘힙합’, ‘상남2인조’, ‘짱’과 같은 중간중간 권수가 비어 한참 기다렸다가 봐야 하는 인기 좋은 만화책은 중간에 감정이 끊긴다는 이유였다. 그러다가 발견한 만화책이,
‘4번타자 왕종훈’
일본 만화였고, 원작에서의 이름이 왕종훈일 리 없던, 내 예상으론 그 당시 가장 핫했던 한국의 야구선수 장종훈의 이름을 빌린 것으로 추정되는 제목이었다(그리고 나는 그 장종훈의 소속팀 한화 이글스의 골수 팬이기도 했다). 주인공 왕종훈이 우연치 않게 야구를 시작해 나중엔 최고의 야구선수가 된다는 이야기를 무려 52권에 걸쳐 풀어내는 만화였다. 52권에 달하는 그 내용이 지금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3일 동안 영화마을에 살면서 그 만화책을 완독했다는 사실과 그 만화를 보고 난 후 내 야구 실력이 좀 더 늘었다는 사실 정도만 기억을 한다.
정말이다.
몇 년 전, 어느 요리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 만화로 요리를 배웠다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심사위원들은 ‘뭐지 이 새끼’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요리를 입에 넣은 후에는 정반대 의미의 ‘뭐지 이 새끼’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그 시즌에 만화로 요리를 배운 그 남자는 무려 우승을 하기에 이르고 많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형태의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것으로도 기억을 한다. 그리고 그 사람처럼 나도 만화로 야구를 배웠다는 이야기다. 체중을 실어 공을 던진다든지, 허리의 움직임이 중요하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림으로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교보재가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피 : 안녕 난 해적왕 루피야. 나의 동료가 돼줘.
나미 : 그럼 근의 공식을 외워봐.
루피 : 엑스는 이에이분의 마이나쓰 비 뿌라스마이나스 루트 비제곱 마이나쓰 사에이씨!!!
나미 : 좋아! 우리 같이 바다로 나가자! 해적왕이 되는 거야!
이런 식의 만화라도 역시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놈의 만화책 좀 그만 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만화를 보고 요리를 배웠다는 남자를 쳐다보던 그 심사위원들처럼 만화를 보고 무언가를 배운다는 게 그들에겐 어불성설이었다는 거다. 슬램덩크를 보고 배운 더블 클러치를 엄마 앞에서 뽐낸다 한들 만화책은 엄마에게 ‘금서’와 같은 것이었고, 집에서 데스노트를 보다가 걸리는 순간 나는 엄마의 데스노트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나도 엄마 나이가 되면 엄마가 만화책 못 보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몰래몰래 참 많은 만화책을 보며 웃고 울고 배웠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보니 (사실 아직 어른이 아닌 것도 같지만) 두 발 딛고 사는 이 세상이 가끔은 고되다. 현실이 현재고 현재가 현실이고, 이놈의 세상은 참 각박한 세계관 속에 있는 것도 같다. 만화 속 세상은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정의가 있던데, 조금 더 그 속에 파묻혀 살아보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내겐 동경이었던 그들이 사실은 종이 속에 스며든 잉크일 뿐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내게 이 세상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곳이라고 알려줬을 거다. 너보다 형편없는 나도 이렇게 배트를 들고 서 있는데,
너는 그곳에서 분명 4번타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줬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