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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준의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08 : 아동만화의 등장 이주홍, 이상범, 나혜석

1920년대에 발행된 신문잡지에서도 아동만화는 빠지지 않는다. 소재나 선택에서도 기존 성인신문에서 다루던 시사, 사회풍자 외에 오락,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험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2015-07-30 박기준

아동만화의 등장
1920년대에 발행된 신문잡지에서도 아동만화는 빠지지 않는다. 소재나 선택에서도 기존 성인신문에서 다루던 시사, 사회풍자 외에 오락,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험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1928년 <조선일보>에 윤석중의 <숨박국질>이 게재되면서 국내 최초의 신문 아동만화가 되었다. 1930년에는 <동아일보>에 외국의 인기 동화를 번안하여 만화로 그려낸 박천석의 <여섯동무>가 선보였으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신문 아동 연재만화이다. 또한 마균의 <신동이의 모험>도 당시 주목 받았던 아동만화였다. 1932년에는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던 <틴틴의 학습 모험>을 보고 착안하여 최영수가 그려낸 <복남이의 탐험기>가 연재되면서 본격적으로 아동만화가 자리 잡게 된다. 1935년 임홍은은 여성지에 판토마임 기법의 아동 토막만화를 비롯, 동물만화를 그려 발표하였고, 우리 생활 주변의 화젯거리를 소재로 삼아서 <연>, <그네>, <흉내쟁이> 등등을 발표하였다. 

만화만문 형식의 <여학생 스케치>는 5쪽 분량으로서, 그때까지는 보기 드문 스토리 만화 형식의 여학교 탐방기였다. 만화 만문이란 용어는 일본의 만화가 오카모토 잇페이(岡本一平)의 작품 스타일을 이르는 말로서 그림과 함께 긴 글을 덧붙이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 안석주가 <신문춘추〉창간호에 처음 <만문 만화>라는 이름으로 게재하기 시작했고, 그 후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신동아>지에 발표되었던 나원봉의 <시골사람>은 등장하는 주인공 캐릭터가 실수를 남발하는 모습을 보여줘,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던 작품이다.

이주홍

이주홍은 동화작품을 소재로 하여서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풍자만화 등을 그려냈던 개성이 강한 만화가였다. 1925년 <신소년>지에 <뱀 새끼의 무도>라는 동화 작가로도 활동하였던 문필가이자 또한 평론가로서도 이름 높았다. 그는 1930년대의 신문이나 잡지 지면을 파노라마 만화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만화는 소재 선택이나 그림 형태에 있어서도 개성이 넘쳤다. 무엇보다 컷 나누기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하다 싶을 때에는 한 쪽, 또는 두 쪽까지 사용해서 한 장면을 표현하는 대담한 시도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독특한 표현력과 풍부한 상상력을 총동원하여서 시사만화, 단편만화, 토막만화, 캐리커처 만문 등 다양한 영역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활동하였던 인물이다. 1936년 이후 <신동아>지를 주요 무대로 삼아 <토막만화>, <만화만문>, <마수거리 실패기>, <머리 없는 탈주병>, <최후의 승리>를 발표하였다. 또 <조광>지에는 <인생>, <하숙쌍곡선>, <칠전 주부 폭풍일기>를 발표했으며, 공론지에 <사해>, <달>, <여자의 일생> 등 산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만화 작업을 중단하고, 그때까지의 입장을 바꾸어 아동문학가로서의 자리를 굳힌 후에는 만화를 비하하는 아동문학가로 앞장서기도 하여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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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홍초기 아동문학가로 활동한 문필가로 그림 또한 대단한 실력을 발휘하여 인기 만화 작품을 연속 발표(1906-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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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 위에 사는 서울 사람들의  삶을 파노라마로 재미있게 카툰으로 묘사.
 <별건곤> 1933년 7월호 표지화. 이주홍.


청전 이상범

청전 이상범은, 1931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춘원 이광수의 신문소설 <이순신>의 삽화를 담당했던 삽화계의 최고 실력자로 꼽히고 있었다. 1933년 시사만화를 시작으로 만화작가로 데뷔하였다. 그는 탄탄한 스케치 실력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묘사로 당대를 대표하는 한국 화가다운 면모를 여실히 증명해 주었으며 신문과 잡지에 캐리커처나 시사만화 등 다양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꽃피운 사실적 표현을 적극 받아들여서, 세밀한 극화체로 실상과 가장 가까운 형태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이상범은 근대 화단의 대표적인 한국화가로서, 미술계에서 노수현과도 막역한 친구로 지냈으며 1929년에는 ‘조선미술 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심사위원에 위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몸담았던 신문잡지 등 출판계와 만화계를 떠나서 대학 강단에 섰으며, 국전 심사위원 등 미술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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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범(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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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은 팔자 좋아···” 신여성들을 시사카툰에 개재. <신동아> 193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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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가정 표지(193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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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이광수 소설 <이순신> 삽화 담당(1932년)


여류만화가 나혜석

1933년 <신동아> 6월호에 우리나라 최초 여류만화가의 작품이 선보인다. 제목은 <나혜석 여사 필>이란 타이틀로 소개된 사회풍자 카툰으로, 1쪽을 과감하게 두세 컷으로 나누어 사용한 대담하고도 시원한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자전거로 배달 길에 나선 식당 종업원의 신선한 모습과 굵직한 터치가 어떤 남성작가 못지않게 힘차 보인다. 역 주변에 몰려 있는 잡상인들의 생존경쟁에 치열한 모습도 현실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 시절 새로운 오락거리로 등장하여 유행을 타고 있던 당구장 전경의 구도 배치와 함께 당구광들의 워밍업 포즈가 생동감을 준다. 이 새로운 여류만화가의 탄생은, 안방에 갇혀 지내는 것으로만 인식되었던 여성의 눈썰미가 절대 남성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사회적 이슈가 될 정도였다. 나혜석은 그 당시로는 드물게 서양화를 전공한 후 해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전시회도 하고 수차에 걸친 수상 경력도 있었던 미술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신동아>에 게재하고 있었을 때가 그녀의 창작활동의 전성기였으며, 1935년 서울전시회를 끝으로 활동을 중단하였다. 나혜석은 도쿄 유학시절 여성의 지위향상에 관한 글도 발표했을 만큼 필력도 겸한 수재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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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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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와 일본에서 유학한 후 여성화가로 활동. <신동아> 1933년 6월호 <나혜석 여사 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