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을 무척 좋아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루키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당시의 연애 덕분에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1987)와 그의 몇몇 단편들을 읽을 수 있었고 그 독서들은 분명 20대의 내 생각과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중 특히 내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작품은 단편집에 실렸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1981)이다. 1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무척 짧은 이야기. 단편이라기보다 엽편(葉篇)소설, 그러니까 콩트(conte)다. 서점에서 책을 찾아 서가 앞에 선 채로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분량. (나는 하루키의 책을 주로 이런 식으로 읽는다, 서점이나 카페에 있을 때 스쳐 지나듯 읽기 좋은 문체랄까) 읽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읽은 후에는 10년 이상 마음 한 구석에 남았다.
한 남자가 4월의 어느 날 아침, 길에서 한 여자와 스친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그녀는 그토록 찾고 원했던 ‘100%’인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를 그저 스쳐 보내고 만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했을까? 그가 말해야했던 이야기란 이것이다.
옛날 옛적에, 어느 곳에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소년은 열여덟 살이고, 소녀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다지 잘생긴 소년도 아니고, 그리 예쁜 소녀도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외롭고 평범한 소년과 소녀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는 100퍼센트 자신과 똑같은 소녀와 소년이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길모퉁이에서 딱 마주치게 된다.
“놀랐잖아, 난 줄곧 너를 찾아다녔단 말이야. 네가 믿지 않을지는 몰라도, 넌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이야”라고 소년은 소녀에게 말한다.
“너야말로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인걸. 모든 것이 모두 내가 상상하고 있던 그대로야. 마치 꿈만 같아”라고 소녀는 소년에게 말한다.
- 무라카미 하루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中
△ 단편이 있는 구판과 개정판의 표지.
좌측, 옮긴이 유유정의 1992년 구판에 실렸던 제목은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실은 이쪽이 더 친숙하다.
여기서 ‘100%’란 이상형 같은 것이 아니다. “10점 만점에 10점”같이 100%가 꼭 상대방의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혹은 그녀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외롭고 평범한 사람이고, 오히려 혼자로선 부족함이 많은, 스스로 결핍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가슴 한가운데 영영 채우지 못할 퍼즐의 빈 공간이 있고, 누군가를 만나 그가 나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춰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산다. 이 이야기의 ‘100%’란 이런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곳을 채워 완전할 수 있는 사람. 나와 다르기에 나의 분신에 가까운 사람. 사실 어떤 누구도 자신과 상대방에게 100%일 수는 없다. 100%라는 개념은 헤어진 이후, 이미 인연을 스쳐 지나가버린 이후에야 나의 이기심이 불러일으키는 후회의 정념(情念)이다.
서로에게 100%가 되어줄 소년과 소녀(소년과 소년, 소녀와 소녀라도 괜찮다)가 만나서, 서로가 상대방의 100%임을 단번에 알아보는 일은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만나는 것 자체가 운이 좋은 일이고, 만남 다음에는 긴 시간의 배려와 노력이 필요하다. 연애는 일상의 사소한 균열 끝에 본질인 사랑을 포기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데이미언 셔젤의 <라라랜드>(2016)에서 서로에게 거의 100%로 보였던 두 사람을 떠올려 보자. 사랑은 만남으로 시작할 수 있어도, 완성은 되지 않는다. 100%의 완성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세계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나는 신카이 마코토(新海誠)의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볼 때마다 하루키의 이 소설을 떠올린다. 그가 실제로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한 적이 없듯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힌트로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일정한 테마 혹은 그가 매번 반복하는 이야기의 원형을 찾는다면,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10대의 소년 또는 소녀가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를 찾아, 그 인연이 서로에게 운명처럼 전해줄 무언가를 찾아, 이 세계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저 세계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이야기’라고. 이렇게 써보면 사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거창하거나, 특별히 놀라운 테마도 아니다. 하지만 가끔, 이런 이야기는 기적을 일으킨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이 흥미로운 점은 100%로 믿어 의심치 않을만한 상대방의 존재 자체보다는, 화자인 내가 그 상대방에게 도달하기 위해 100%가 되기 위하여 향하는 과정에 있다. 그의 세계에서 소년과 소녀는 한 번 맺어진 인연을 그저 스쳐 보내지 않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한다. 소년과 소녀는 한번 헤어졌던 당신과 다시 만나는 일만이 그들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행동한다. 나를 넘어 당신에게 도달하는 과정은 멀고 험하며, 그 숭고한 사명은 거의 종교적인 무게감마저 지닌다. <별의 목소리 ほしのこえ>(2002)에서 소년은 지구에서 몇 광년 떨어진 우주에서 전쟁 중인 소녀의 메시지를 몇 개월, 몇 년씩 기다린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雲のむこう, 約束の場所>(2004)에서 소년은 영원한 잠에 빠진 소녀를 깨우기 위해 세계의 전복을 무릅쓰고 약속의 장소로 향한다. <초속5센티미터 秒速5センチメ?トル>(2007)에서 소년은 소녀를 만나러 눈보라치는 날 인생 최초의 먼 여행을 떠나고, 그날 밤의 만남 이후 소년의 시간은 그리움 속에 내내 머문다. <별을 쫓는 아이 星を追う子ど>(2011)에서 소녀는 죽은 소년을 되찾기 위해 용감히 지하 세계로 내려간다. 이 모든 이야기는 마치 유한한 삶을 살 뿐인 인간이 누군가와 공유했던 소중한 ‘순간’을, 무한한 시간으로부터 ‘영원’히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들에 적(敵)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망각’이다.
△ 소년과 소녀와 엇갈리는 세계, 마코토 월드.
인연은 곧 세계의 확장이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선, 생전 처음으로 어디론가 가야 한다. 나의 틀을 깨고 나와서, 세계의 시간과 그 속도와 물리적인 거리를 버텨내야만 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리를 해야 하는 주인공들은 사실 지금의 트렌드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성의 하렘 한가운데 내가 있거나, 내가 가진 평범한 능력이 이세계(異界)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스펙이 되는 등 잉여의 역전 현상이 만연하고 점점 더 ‘자동 레벨 업’ 게임에 가까워져 가는 이쪽 업계의 온갖 장르물과 비교할 때(물론 이러한 현상은 계층간 이동이 막힌 현실 세계에서 청년들이 겪는 좌절이 반영된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이야기는 캐릭터들에게 거의 고루할 정도의 진정성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제 ‘노오력’을 혐오하지만,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쉽게 새로운 인연을 찾기보다 처음의 인연을 놓치지 않으려는 주인공들의 집착. 하루키조차 심드렁하게 스쳐 보낸 이 한 순간의 인연에 신카이 마코토는 도리어 더욱 집착한다. 너와 나의 인연 없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재미있는 것은 인연을 계속 이으려는 100%의 노력이 수직과 수평 운동의 양상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거칠게 나누자면, 판타지 배경의 작품들은 수직적이고, 현실 배경의 작품들은 수평적이다. 우주 전쟁 설정에 메카닉이 등장하는 <별의 목소리>는 우주의 소녀와 지구의 소년 사이의 거리가 수직적이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 소녀를 꿈속에 가둔 평행세계의 구조물은 하늘과 땅을 수직으로 잇는다. <별을 쫓는 아이>에서 소녀는 소년을 찾아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이들 작품에서 내가 있는 이 세계와 그가 있는 저 세계는 마치 이승과 저승처럼 나누어져 있다. 이에 반해 현실 배경인 <초속5센티미터>에서 소년과 소녀의 거리감은 수평적이다. 눈 내린 지평선 위를 종종 멈춰서며 계속해서 수평 이동하는 기차의 이미지는 얼마나 왔고 얼마만큼 더 가야 하는지 거리의 감각을 아득히 뭉갠다. 소년이 소녀를 만나기 위해 전철을 타고 처음으로 낯선 지역으로 간다는 내용을 이다지도 멀고 괴롭게 표현할 애니메이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막연한 거리감을 표현하기 위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항공우주적인 배경으로 수직의 이미지를 다시금 불러오지만, 소년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는 새로운 소녀가 고백할 용기를 얻기 위해 먼저 하는 행동은 바다를 수평으로 가르는 서핑이다. <언어의 정원 言の葉の庭>(2013)에 이르면, 어느 비 오는 날 공원에서 만난 소년과 여자는, 같은 자리를 떠났다 되돌아오길 반복한 끝에 같은 학교의 학생과 선생이었음을 알게 된다. 두 개의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인물이 되는 아이러니. 그들이 주고받은 만연집(萬葉集)의 단가와 답가가 의미하듯, 중요한 건 비가 내리느냐 내리지 않느냐가 아니라 둘이 함께 머문 장소 그 자체였다.
△ 마코토 월드의 100% 완성형. <너의 이름은.>
이제 우리에게 온 신카이 마코토의 최신작 <너의 이름은. 君の名は.>(2016)은 그가 추구해온 만남과 인연의 이야기와 반복적인 테마의 집대성이며, 현실 배경에 접목시킨 판타지를 통해 수직과 수평의 운동이 함께 작용한다. 이제 소년과 소녀는 거리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소년 속에 소녀가 들어가고, 소녀 속에 소년이 들어가면서 거리의 문제는 초월된다. 문제는 다만 시간이다. 이미 지나간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소년은 시간을 초월하여 소녀를 만나야 한다. 우주에서 지구상으로 수직 하강하는 혜성은 하나에서 둘로 갈라졌고 이 나뉨이 비극을 일으켰다. 원래 하나였던 둘이 다시 만나 헤어지지 않는 일, 좋아하는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이 곧 세계를 구하는 일이다. 수직 낙하하는 혜성 아래 소년과 소녀가 서로 상대방의 몸으로 달려 수평으로 원을 그리며 마침내 만나는 장면은 신카이 마코토가 도달한 100%의 경지다. 앞에서 가끔 이런 이야기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했다. <너의 이름은.>은 정말로 기적을 일으킨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다. 작년에 극장에서 보고 눈물을 멈출 수 없었던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2016)이었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155명의 탑승객 전원을 구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어른 관객에게 당연히 세월호의 참극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왜 우리는 저렇게 하지 못하였는지, 왜 우리는 원칙조차 없는 세계를 일구었으며 또한 지금껏 방치했는가에 대한 가슴에 사무치는 부끄러움과 울분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영화가 재연한 현실이 이 세계의 관객에게 준 울림이었다. 이제 <너의 이름은.>을 극장에서 보면서, 나는 이 애니메이션이 구현한 판타지가 다시 가슴을 헤집는 기분을 느꼈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을 끝내 가능하게 만든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왜 지금의 소년소녀 관객들과 공명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월호 이후 이 땅의 아이들은 누구나 모두 생존자들이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이 만화영화가 한낱 픽션임을 알면서도, 현실의 무너진 세상에선 어른들이 결코 주지 못하는 작은 위안을 이 작품에서 얻고 잠시나마 치유를 받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곧 전 세계를 구하는 것’이라는 말을 이 작품은 다시금 일깨운다. 이 애니메이션이 현실 세계에 전하는 귀중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