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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디즈니 컴퍼니] 설립 90 주년과 사람들

애니메이션, 즉 우리가 만화영화라고 불리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만든 시초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2013년 12월 설립 90주년을 기념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번 9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지난 10일 화요일에 버뱅크의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축하 파티가 열렸다.

2013-12-26 오필정


월트 디즈니 컴퍼니 90주년, 그리고 함께 했던 사람 [존 라세터]

애니메이션, 즉 우리가 만화영화라고 불리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만든 시초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2013년 12월 설립 90주년을 기념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번 9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지난 10일 화요일에 버뱅크의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축하 파티가 열렸다. 행사에는 특별 게스트 [존 앨런 라세터(John Alan Lasseter, 월트 디즈니 수석 크리에이티브)], [에드 캐트멀(월트디즈니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사장)] 외 다수의 디즈니 아티스트들이 모였다.

여기서 잠깐 디즈니 컴퍼니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우리가 월트 디즈니라고 알고 있는 디즈니 컴퍼니는 1923년 10월 월트 디즈니와 그의 형제 로이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설립한 회사로써, 현재는 미국의 대형 엔터테인먼트 종합 회사다. 구조상 디즈니 컴퍼니 내부에 프로덕션 스튜디오 부서가 있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자회사)의 시작이다. 또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현재의 디즈니 컴퍼니를 애니메이션 제작의 살아있는 전설로 만든 회사기도 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전설이 된 계기는 1938년 개봉해 큰 흥행을 이룬 장편만화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이다. [백설공주]는 영어권 국가 최초의 극장판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디즈니사에서 개발한 멀티 플랜(다엽식) 카메라와 그들의 노하우가 담긴 테크니컬러를 이용한 작품이라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다엽식 카메라가 있는 촬영 부서에서. 가운데 월트 디즈니>

이후 1966년 디즈니가 사망한 후 이렇다 할 흥행을 못 하다가 1989년 [인어공주]를 기점으로 디즈니 르네상스를 시작, [알라딘], [라이온 킹] 같은 명작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또한, 2006년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인수하여 CGI 영화부분에 큰 성과를 내고 있으며, 재미있는 점은 픽사 인수 이후에도 기존의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합병하지 않고 개별 제작 체제를 유지하며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월트디즈니 컴퍼니는 테마파크 외 [터치스톤 픽처스], [ESPN], [ABC] 등 여러 TV 방송사와 [마블 엔터테인먼트] 외 다양한 분야의 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디즈니의 역사를 바탕으로 이번 90주년 행사에서 주목을 받는 인물은 디즈니의 애니메이터이자 이메지니어링, 그리고 수석 크리에이티브 책임자인 [존 라세터, 1957년생]이다.


라세터는 대학생 시절 이미 [Lady and the Lamp (1979)], 와 [Nitemare (1980)]로 학생 애니메이션 아카데미상을 휩쓴 재원이었다. 졸업 후 바로 월트디즈니에 들어가 실력을 인정받아 성공 가도를 달린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에는 [101마리 달마시안]으로 작품제작의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그는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술도입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던 디즈니의 방식을 강도 높게 지적하는 아티스트였다. 결국, 그는 디즈니와 결별을 하게 되고 [루카스 필름]. [픽사]를 거치며 100센트 CG 애니메이션 제작의 선구자 역할을 한다. 이후 2006년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면서 라세터를 픽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양쪽의 수석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로 임명하였고, 현재도 그는 디즈니·픽사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다.

라세터는 애니메이션 제작의 변화기를 직접 격은 애니메이터 겸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로서 큰 의미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이번 90주년 파티 인터뷰에서,

“할리우드가 번창할 때 당시 두 명의 큰 스타가 있었는데, 한 명은 찰리 채플린이고 나머지 한 명은 바로 미키 마우스였습니다.” 라고 말했다.

또한, 라세터는 디즈니의 성공작으로 업계 최초 혁명을 이룬 1937년 [백설공주] 극장판 초연을 꼽았다.

△ <1937년 처음 상영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그 시절의 만화영화나 카툰은 반바지에 우스꽝스러운 캐릭터가 등장해 개그를 하는 이미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당시 월트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이 일반 영화처럼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고, 사람들은 그(월트 디즈니)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개봉했고, 백설공주가 독 사과를 먹고 쓰러져 난쟁이들 사이에서 누워있었을 때, 극장 안의 모든 관객은 울고 있었습니다. 관계자 모두 놀랐고, 당시 유일한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는 그 해 최고의 영화가 되었습니다. 이 또한 할리우드의 혁명이었습니다.” 라고 라세터는 말했다.

그가 디즈니에 입사한 뒤 해고당하고 픽사로 옮겨진 상황에 관해서도 이야기 했다.

“나는 과거 새로운 기술접목을 과감히 시도하던 디즈니에서 일한다는 사실에 정말 기뻤습니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신입 애니메이터로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나는 컴퓨터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탄생과 발전 가능성을 보게 되었고, 이것을 이용해 더 다양한 차원을 접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디즈니 관계자들은 이 기술에 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는 새로운 기술도입을 주장했고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음과 동시에 날 해고했습니다. 하지만 난 그때에도 컴퓨터, 툴, 프로그램이 종이, 연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기술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그도, 제작에 있어 더 중요한 것 대해 말해 눈길을 끌었다.

“나날이 기술이 진보되고 있지만, 제작자와 아티스트는 관객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토리와 캐릭터 등 아이디어는 사람의 영감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기술 발전이 제작환경과 결과물에 큰 변화를 주었지만, 모든 창작의 시작은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월트 디즈니 가족 박물관 최고 경영자 다이앤 디즈니 밀러 별세
그 밖에 2013년은 디즈니 패밀리 중 월트 디즈니의 친딸 [다이앤 디즈니 밀러] 작고의 안타까운 소식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 <다이앤 디즈니 밀러, 좌 생전 디즈니 가족사 박물관에서, 우 아버지 월트와 두 자매>

지난 11월 19일, 월트의 딸 디즈니 밀러가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서 만 7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나파밸리에서 멀지 않은 샌프란시스코에는 그녀의 아버지인 월트 디즈니의 업적과 역사를 기록한 [월트 디즈니 가족 박물관, The Disney Family Museum)]이 있으며, 그녀는 이곳의 최고 경영자이었다. 이 박물관은 디즈니 가족재단이 설립한 것으로 월트 디즈니의 업적을 홍보하며 그의 창조적인 세계관과 삶을 연구하기 위해 탄생했다.

아버지가 그랬듯 딸인 밀러도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살았다. 또한, 디즈니 컴퍼니 부분은 물론 다양한 예술분야와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여 아버지 월트와 함께 조명되는 가족 중 하나였다.

그녀가 별세함으로 월트 디즈니와 생을 같이 했던 직계 가족은 이제 없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친족들이 아버지로써의 디즈니와 디즈니 작품세계의 홍보·연구를 위해 박물관을 세웠듯, 밀러는 창조의 상징인 아버지의 명맥과 관련 업계의 유산이 미래에도 이어져 주길 바랐을 것이다. 현재도 그녀를 추모하는 손길이 가족사 박물관과 웹사이트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그녀가 지키려고 했던 것이 후세에도 이어지길 관련 업계에 발을 담근 필자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