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함경남도 출생. 해방 후 월남해서 <서울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 와, 동향인인 신동헌과 사돈간이 되면서 만화계에 데뷔하게 된다.
1953년 피난지에서 청소년 단행본 만화 ‘돌아온 왕자’를 시작으로, 성인지 <아리랑>과 <신태양>, 그리고 여러 신문에 작품을 기고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서울로 환도한 후에도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성과 부지런함은 그 어느 누구도 당할 자가 없었다. 잡지마다 그의 작품이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였다.
그리고 잡지에서의 명성이 신문까지도 알려지면서 4대 일간지인 <경향신문>에 4컷 시사만화 ‘두꺼비’를 연재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판에 어두웠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중도하차하면서 연재 자리를 안의섭에게 양보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오랫동안 고민도 많았다고 한다.
신문에 ‘고구마’와 어린이난에서 ‘깔끔이’ 등을 선보이던 그도 신문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갔다.
1956년 청소년 월간 만화지 <만화세계>가 창간되면서 일대 폭풍을 일으키며 청소년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 ‘칠성이’를 연재하면서 주가가 높아진 그는 종합학생지로서 창간된 <학원>지에도 ‘허둥이와 매끌이’를 인기리에 연재한다.
△ 김경언 <칠성이 유격대> 13x19cm, 4·6판, 서점용, 128p, 1959.
1959년에는 깜찍한 명랑류 단행본 만화 ‘우락돌이 부락돌이’ ‘칠성이 유격대’ 시리즈 등이 125쪽짜리 캐주얼형 하드커버로 제작되어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이 시기 쉴 틈 없이 생산되는 그의 새로운 아이디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계속 질주하였다.
그때까지는 시대극화의 붐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 같은 새로운 단행물에 밀려 주춤거리기 시작하면서, 시대극화의 붐을 완전히 무너트리고 새로운 만화의 흐름 쪽으로 유행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해서 군사정변 후인 1960년의 대본 만화시대로 바뀌었을 때는 ‘칠성이, 일등병서 장군까지’를 비롯해 상상을 초월하는 작품 시리즈가 연이어 등장해서 히트를 치게 된다.
후반기의 대표작 중 ‘의사 까불이’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엄청난 다작 작가가 되다보니 나중에는 이름을 경인으로 바꾸어서 대본용 만화 약 5백종이라는 다작을 하였을 만큼 그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민주화 운동이 일어날 시기에 그는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그리고 1996년 이 만화계의 아이디어 왕은 고혈압을 이기지 못하고 타계하게 된다. 만화방 시대의 최고 인기작가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 만화가들의 모임. 당시 예술인들의 약속장소로 유명한 명동의 모나리자 다방에 모여 편집회의. (앞: 좌로부터 안의섭, 신동헌 / 뒤: 김경언, 김용환, 김성환), 1955.
△ 친구이자 사돈인 신동헌과 함께(좌로부터 김경언, 신동헌)
△ 국제신보사 주최 만화가 대 영화배우 교환 야구전 선전을 위한 동지同紙의 특집 만화. 만화가 야구팀 선수들의 작품을 조석간朝夕刊에 5~6회 게재했다. 국제신보, 1959.7.17.
△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사고를 일으킨 만화가 대 영화배우 교환 야구전 행사를 알린 국제신보 사고社告, 1959.7.14.
‘국제신보사 주최‘ 만화가 대 영화배우 야구대회 선전 광고를 게재했다. 많은 성원이 있었고 기대가 컸었다.
성황리에 야구시합이 끝나고, ‘시민 위안의 밤’ 행사가 운동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날 밤 7시부터 야외 특설무대에서 진행된 ‘만화, 무용, 노래, 코미디 쇼’를 3만 명 이상이 시청하고 있던 중, 8시경 폭우성 소나기가 퍼붓자 좁은 입구로 저마다 뛰어 나가려던 관중에 압사한 시민들이 다량 발생했다. 68명 사망, 24명 중상을 당해 ‘시민 위안의 밤’은 순식간에 ‘시민 참사의 밤’이 되고 말았다.
△ 만화가 야구선수들이 덕아웃에서 대기중 (좌로부터 이상호, 김경언, 정한기)
△ 문화인 야구대회 출전, 만화가 야구팀 (앞: 좌로부터 이소림, 김경언, 정한기, 이상호, 박기준 / 뒤: 김용환(단장), 신동헌, 박현석, 정운경, 휘문고 야구 코치, 안의섭, 박기정), 서울운동장 야구장, 1959.
△ 왕, 4·6판, 서점용, 1962.
1936년 회령 출생. 해방 이후 월남하여서 형인 신동헌과 함께 활동한 형제만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김용환의 ‘흥부와 놀부’를 보고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만화가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신동우 역시 한국전쟁으로 인한 고난의 길은 피할 수 없었다. 중학시절 피난지 부산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노상에 만화를 펼쳐 놓고 대본업으로 끼니를 연명했던 적도 있다. 이때 팔아야 할 상품으로 신간만화를 들여야 했는데, 구입비를 확보하지 못했을 때는 자신이 직접 그린 만화까지 내놓고 이를 빌려 주었다 한다.
휴전이 길어지던 1952년 어느 출판사에 의해 ‘땃똘이의 모험’을 출간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데뷔작이 된다.
이어서 발표된 ‘정의의 삼용사’ ‘깡깽이 박사’ ‘이상한 요술소년’ 등이 휴전기간 동안의 그의 작품들이다.
정부가 서울을 수복하며 안정을 찾게 되자 신문잡지 출판계도 다시 힘차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형과는 다르게 그는 청소년 대상의 만화를 선호했는데, 때는 바야흐로 <만화세계>를 비롯, <만화학생>, <만화소년소녀> 등 월간 잡지와 단행본의 거듭된 창간으로 이어지던 출간의 황금시대였다.
당시의 신동우는 성인만화가 아닌 청소년 만화가로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가일 뿐만 아니라 만화계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신동우는 <서울미대> 응용과를 다니면서 만화가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으므로 대학에서도 그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아르바이트 일감에 서로가 목말라 하던 시절, 동료였던 박현석, 송영방, 김근배 등을 잡지 및 출판사에 소개해서 활동할 수 있게 해 준 우정이 밑바탕이 된 미담은 만화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김용환이 회장으로 있었던 <대한만화가협회>에 그 역시 회원이자 선전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 항일 만화 <안중근>, 1959.
1958년의 극화 붐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의사 안중근’ ‘모던 강감찬’ ‘아리랑 결사대’ ‘장고산의 만찬’ 같은 하드커버 책자로 새로운 명랑만화 붐을 일으키면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개척자로도 손꼽힌다. 그가 항상 즐겨 사용한 장르는 명랑, 모험, 역사, 고전 설화 같은 소재였다.
1959년에는 초기 만화학원의 강사로 출강하여 형 이하 여러 선배들과 함께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 각종 잡지, 단행본, 신문에 등장한 캐릭터들
△ 소년조선일보 연재 <홍길동>, 선푼적 인기로 애니메이션화까지 진행했다.
그의 전성기는 1954년부터 60년에 이르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으며, 1967년에는 <소년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장편 ‘홍길동’을 가지고 형과 함께 국내 최초의 애니메이션을 제작, 만화계를 놀라게 했다.
그 후 TV에 단골 출연하는 즉흥 만화가로도 명성을 높였고 후반기에는 학습만화도 많이 출간했다.
△ 후반기 홍보만화, 학습만화가로도 활동했다.
1991년에는 아동문학가 단체인 <색동회>로부터 공로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가 서울대 재학시절, 당시 학장이자 원로 동양화가이며 나중엔 장관이 되었던 모씨가 미술 전공자로서 만화를 그리는 그를 비판하자, 그에 대한 부당함을 과감히 반박하면서 학교를 자퇴한 일을 두고 만화계에서는 두고두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4년 지병인 위암으로 한창 일할 시기에 타계, 주옥같은 작품들만 남긴 채 독자들과 이별하게 되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신동우의 만화 쇼]
△ 신동우는 현장 그려주기, 속필 만화가로 유명하다. 동양 TV 방송에 동료들과 출연, 신기한 만화쇼를 연출해 갈채를 받기도 했다.
△ 국제만화 전시회, 즉석 그려주기를 하는 신동우
△ 보여주기 스케치를 위해 종종 야외 나들이도 했다.
△ 행사 때 즉석 그려주기도 하여 국민 만화가로 불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