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평북 선천 출생.
1958년 〈부산해동고등학교〉 졸업. 학창시절부터 미술 선생이 눈여겨보며 특별지도를 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이 만화계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됐다.
1958년 단행본 ‘물레방아’를 완성해서 이것을 들고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작품이었으나 이것이 그의 데뷔작이 된다.
그 시절 16쪽의 떼기만화로 쓰였으며 원고료도 극히 적은 액수였지만 학비를 위해서는 큰 도움이 되었다.
부산 국제시장 만화도매상 승리상회에서 <국제문고>를 출간, 딱지만화, 떼기만화 류의 책들을 출간하는 3류 출판사를 운영했다. ‘산송장’, ‘철쭉꽃 피는 고향’등을 펴냈는데 기본기를 익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59년 정국이 안정되자 서울로 상경, <월간 소년소녀>지에 ‘팔삭동이’를 연재하는 행운을 잡으며 본격적인 만화가로 활동한다.
군사정변이 일자 잡지 붐이 수그러들고 만화계가 잠시 휴식상태에 빠져들게 되자 애니메이션계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1968년 TV동양방송의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 제작 부서에 애니메이터로 취업, ‘황금박쥐’, ‘요괴인간’ 등 제작의 핵심멤버가 되어 맹활약을 펼쳤다.
△ 황금박쥐 포스터
△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 요괴인간 원화셀(1965년 ~ 1968년) 애니메이터 김우영이 캐릭터를 착안하였다.
△ 동양 TBC의 한일 공동제작 애니메이션 ‘황금박쥐’, ‘요괴인간’ 에 참여한 애니메이터들 중앙 모리가와 노부히데(森川信英)총감독과 김우영(1965년)
1970년 <삼우실업>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실장으로 2년간 재직하며 전문가로서의 수완을 보여준다.
1979년 <소년중앙>의 인기 연재만화로 만화 공로상 수상.
1990년 <소년 조선일보>에 4컷 명랑만화 대장편 ‘뚱딴지’를 연재하기 시작, 이때부터 본격적인 출셋길이 열린다. 그동안 역사, 전쟁, 무협, 모험, 괴기 등 치열하게 경쟁하던 장르가 아니라, 학습만화 분야에서 독보적인 작가로서 청소년들의 영웅 ‘뚱딴지’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 소년조선 인기 연재만화 ‘뚱딴지’ 7995화(2016. 12. 12.) 1990년부터 연재를 시작하여 현재도 연재 중
1993년 ‘뚱딴지 만화일기’, ‘뚱딴지명심보감’등 계속적인 대박을 터뜨리며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의 인기 붐과 쌍벽을 이룰 만큼 그 인기가 대단하였다.
△ ‘뚱딴지’ 단행본 작품들
2001년 <국민일보>에 선교만화 ‘하느님의 진실과 선’을 연재하기도 한 크리스천이다. <한국만화가협회> 내 <기독만우회> 회장도 지냈다.
뜻이 맞는 원로만화가 동료 조항리, 오원석, 임웅순, 윤준환 등 5인방이 오랜 모임을 갖고 있다.
△ 기독만우회 회원들과 함께(좌 : 백성민, 조명운, 최경탄, 김우영회장, 차영)
2004년 ‘고바우 만화상’ 수상
2009년 아동문학회 ‘색동회’상 수상.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활력 넘치는 모습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의 건투를 빈다.
△ ‘뚱딴지’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 신문광고에 소개된 ‘뚱딴지’ 학습만화들
△ ‘뚱딴지’ 캐릭터 스토리 만화로 활약 (아시아 만화대회 원화전 출품작 1997년 9월)
△ ‘달리와 오이지’ 선교지 ‘모래알 전우’ 작품소개(2001년)
△ 대표작 ‘뚱딴지’ 4컷명랑만화 (2002년 11월 만화의 날 기념출품작)
△ 신년 축하 카툰 (한일 만화가 연하엽서 교류전 출품작 2004년)
△ 1998년 원로만화가 초청 신년회 (앞 좌 : 이범기, 이근철, 김기태, 손의성 / 뒤 : 김동화, 김우영, 권혁준)
△ 1998년 원로만화가 초청 송년회 (앞 좌 : 박기준, 권영섭, 이원수, 장은주, 신동헌, 김기백, 박진우, 정훈, 김우영 / 뒤 : 김동화, 이희재, 사이로, 이두호, 조관제, 김원빈, 이근철, 이소풍, 최석중, 손의성, 이현세, 김수정)
1945년 인천 출생.
누구라도 그런 기억이 있겠지만 임웅순도 학창시절 수업 중에 만화를 보다가 들켜 선생에게 흔쭐이 나는 일이 빈번했던 만화광이었다.
김정파의 만화 ‘촌놈 솔봉이’를 보고 마음이 통해 습작하다가 1960년 〈한국만화연구소〉에 등록하게 된다. 이곳에 신동헌, 신동우 형제와 김경언, 임수, 김정파 선생이 강사로 있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 만화를 배우려고 선택한 <한국만화연구소> 안내서 신동헌, 김정파 등 강사진이 막강(1960년)
1963년 임수 선생의 주선으로 대본용 ‘독수리 삼형제’ 퉁을 펴냈으나 작가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애니메이션 제작사 〈유니버셜 아트〉에서 근무하며 실력을 키웠다.
1973년 리얼한 그림 실력이 따라주지 못해 스토리 작가로 변신한다. 이재학 선배의 스토리작가로 협력하면서 무협코믹 극화 ‘만두명인’, ‘생사고락’ 등을 펴내는 동안 서서히 스토리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75년 <한국만화연구소>에 함께 다녔던 한희작과 합작하여 작품을 내기 시작한 것이 주효, 인기가 상승하며 정상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500여 편의 단편과 장편의 스토리를 써서 스토리만화계의 개척자 4인방이라는 닉네임도 붙게 된다.
1982년 한희작과 합작하여 만든 ‘서울 손자병법’이 주간 경향에 연재되며 폭발적인 성인만화 시대가 열리게 된다. 옛날 만화학원에 함께 다녔던 콤비가 다시 인기 정상에서 함께 하게 된 것이다.
△ 성인극화 스토리를 작화가 한희작과 콤비를 이루어 화재를 불렀던 작품 (1982년 주간경향 연재)
△ 서울 손자병법 본문 동경, 희구, 욕망, 대상의 서울에서 좌절, 배신, 아픔을 주인공들이 겪는 에피소드 모음. 대사와 해설이 돋보이는 작품(1984년 바른사 발행)
일본만화는 물론 훨씬 이전부터 성인만화가 활개를 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1983년에 이현세의 스포츠 극화 ‘공포의 외인구단’이 만화계를 석권하며 성인극화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현세의 작품 또한 합작한 작품으로 이로써 스토리작가들의 주가는 한결 높아졌다.
특히 성인만화의 스토리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신세대의 감각적인 언어 구사는 물론 젊은 층의 성풍속도에 대한 관심 및 센스가 뛰어나야 한다.
△ 한희작과 합작으로 펴낸 성인 극화 ‘놀다보니’ 주간 빅점프 연재 후 단행본 발행 (주간 빅점프 1999년 9월호)
△ 방오만과 합작해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아마걔돈’ (일간스포츠 1999년 11월 15일)
△ 성인 극화 스토리를 합작한 작품 (좌 : 만화 인물 중국사, 커피플리즈)
1992년에는 <스토리 작가협회>가 창립, 임웅순은 회장 경력도 있는 베테랑이다.
1993년 <벅점프>에 연재된 ‘여자 아리랑’은 영화화되어 빅히트를 치기도 하였다.
1996년 한희작과 <빅점프>에 ‘모래여자’를 연재한다.
1982년부터 <소년조선>에 실었던 4컷 만화 ‘팔방이’가 꾸준히 인기 폭발하면서 이후 명랑만화작가로도 활동한다.
‘팔방이 천자문’, ‘로마 이야기’ 등 학습만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하다.
△ 작가의 대표 캐릭터로 소년조선의 인기 연재만화 ‘팔방이’ 9901화 (1986년부터 연재를 시작하여 현재도 연재 중)
△ 명랑만화 ‘팔방이 만화일기’, ‘팔방이 명심보감’ 베스트셀러 학습만화 단행본들(대교출판 발행)
△ ‘팔방이 만화편지’ 속표지와 등장인물들(계림닷컴 발행 2001년 1월)
△ 이웃 일본대중잡지에서도 이 베스트 셀러 작품과 두사람을 크게 다루었다. (좌 : 한희작, 임웅순 / 코리안코믹스토리 1989년 5월호)
△ 절친 한희작이 그려준 임흥순 캐리커쳐(2007년)
△ 커피숍에서 동료작가 들과 함께(2014년) (좌 : 한희작, 잉움순, 최종철)
△ 식당에서 동료 작가들과 함께(2014년) (좌 : 임웅순, 최종철, 우 : 허어, 박문윤)
△ 안동화회마을 학봉종택 종가를 방문한 만화스토리작가 협회 회원들(2014년 9월) (앞좌 : 유광남, 이화성, 승정연, 배서연, 고순정, 정윤미, 최은영, 심경희, 김지완, 오영석, 김승민 뒤 둘째 : 홍연환, 허희원, 최금락(전회장), 최재봉(전회장), 임웅순(초대회장), 학봉종손 부부, 정기영(현회장), 최철규, 박종우, 류승철, 신동욱, 우무석, 박성진, 이상운, 한지혜, 김영훈)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시절부터 아이디어가 기발했고 그의 그림 실력을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러나 1967년 한국외국어대학 일본어학과에 진학할 때만 해도 자기가 만화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학업을 중퇴하고 적성에 맞는 애니메이션 회사에 입사 애니메이터로 일하는 동안에 아마 그의 만화가적 소양이 길러졌고 만화가를 향한 관심도 높아졌던 것 같다.
1960년 〈한국만화연구소〉에 등록, 신동헌, 신동우 형제, 임수, 김정파, 송영방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실력을 키웠으며, 그곳에서 만난 임웅순과는 평생지기 겸 스토리작가로서 콤비를 이루며 활동하게 된다.
그햐 단행본 ‘달나라로 달려라’를 발표하였고, ‘달을 쪼갠 사나이’에 이어 수십 편의 청소년 창작만화를 발표했으나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
계속 애니메이터로 일하면서 작가로서의 소양을 더 쌓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나 군사정변 시기라서 엄격한 검열로 인해 그리고 싶은 대로의 작품을 만들기에는 때가 좋지 못했다.
1972년 고우영의 ‘임꺾정’이 <일간스포츠>에 연재되면서 본격적인 성인만화 시대로 접어든다. 그리고 성인 주간지와 잡지가 속속 등장한다.
1982년 죽마고우 임웅순의 스토리를 받아서 그림 연출은 한희작이 맡는 콤비 형태로 <주간경향>에 성인극화 ‘서울 손자병법’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극화체 중간형의 이것이 기대했던 이상의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된다.
그의 출세작 ‘서울 손자병법’은 서울의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청춘 남녀들의 군상과 해프닝을 마치 르포 기사를 작성하듯 사건별로 흥미 있게 엮어냄으로써 신세대 청년층으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다.
1991년 <일간스포츠>에 ‘여자 러브러브’를 연재하였다. 이 ‘여자 러브러브’는 1991년에 ‘한희작의 러브러브’라는 재목으로 영화화되었을 만큼 또 히트작의 하나로 기록된다.
△ 한희작 임웅순의 합작 성인극화 ‘러브러브’(주간경향 연재)의 영화 개봉 화보(1991년 주간매주 소개)
이어서 ‘놀다보니’, ‘여자 아리랑’ 등을 속속 발표하면서 마침내 성인만화가로서의 그들의 명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 <일간스포츠> 인기 연재물 ‘여자 아리랑’ 영화화 오픈세레모니에서 주연배우들과 함께(1993년)
그때까지 성인극화의 3인방이라 불렸던 고우영, 강철수, 방학기의 뒤를 이어서 그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1996년 <빅점프>에 ‘모래여자’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여성지 <퀸>에는 ‘비처럼 음악처럼’을 연재하였다.
△ 아동만화에서 성인만화로 1960년도 ‘달나라로 달려라’로 습작 데뷔 후, 1982년 본격 성인용 극화체 중간형의 그림으로 펴낸 걸작들
임웅순의 탁월한 심리묘사와 빠른 스토리 전개도 매우 설득력 있게 묘사되었다. 이 스토리를 바탕으로 감칠 맛 나는 그림으로 연출해 내는 것은 한희작의 몫이었다. 독자에게 전달할 내용만 확실하게 드러내는 극화체(만화체와 극화체의 중간) 그림에 날씬하고 매력적인 8등신 미녀 스타일의 등장 여성 묘사는 보는 이들을 묘하게 사로잡는 한희작 식의 그림 연출이었다.
△ 한희작 극화의 등장인물 들
한희작, 임웅순 콤비는 ‘서울 손자병법’ 이후 오랫동안 우리 성인만화계의 명콤비로서 연일 상종가를 구가해 오고 있다.
이 두 사람의 콤비 활동으로 스토리 분업 시대가 일본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 한일만화가 연하 엽서 교류전 출품(카툰주제 : 신년원숭이해, 서울애니메이션센터, 2004년)
△ 코믹스 드라마 ‘날마다 날마다’ 연재(주간 만화위클리핫툰 연재, 2008년)
△ 방완과 합작으로 만든 성인극화 ‘압구정아리랑(스포츠 투데이, 2001년 12월 21일)
△ 애주가 한희작의 캐리커처(주간만화지, 1990년)
△ 사다리회 설악산 여행(좌 : 한희작, 허영만, 이우정, 강철수, 1989년)
△ 화실에서 작업에 들어갈 때(월간 대중문화 취재기사 중에서 1990년 6월호)
△ 원로만화가 송년회 (좌 : 이현세, 이두호, 한희작, 박기소, 사이로, 원혜영 의원, 박재동 등 원로작가 30여명 참석, 2006년 12월)
1941년 강원도 삼척 출생. 본명은 이용명으로 한양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법학도이다.
만화와 인연이 된 것은 <삼척공고> 때 미술지도를 해 주었던 한성철 선생이 한때 만화가였던 데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한다.
선생은 <매일신문(지금의 서울신문)>에 시사카툰 ‘털털이’를 연재했고, 월간<만화세계>에 ‘로이트진’이란 서구적인 만화풍으로 인기가 있었다.
그는 새로운 카툰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어 틈이 날 때면 세계 유명 카투니스트들의 작품을 보면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울로 진학하였을 때는 이 공부가 바탕이 되어서 아르바이트 일거리로 정착이 된다.
1965년 인기 최고였던 <아리랑> 지에 투고한 ‘귀로’가 당선이 된다.
△ <아리랑> 지 카툰신인 만화전 공모 당선작품 (주제 : 귀로, 1965년)
용기를 얻은 그는 각 신문마다 4컷 유머 카툰작품을 만들어 투고했는데, 그런대로 반응이 좋았던지 계속 실려 주어 학비 조달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지방지에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투고하였다. 동창들 이름을 빌려 사용하기도 하고 그림도 조금 변형시켜 보냈기에 계속 실릴 수 있었고, 이로써 졸업할 때까지 학자금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신문 시사카툰과는 또 달리 서구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유머 카툰을 다양한 채색으로 표현한 전시 위주의 카툰에 눈을 뜨게 된다.
1974년 <주간시민>에 ‘사이로 만평’ 연재.
1975년 카툰집 무풍지대 발행.
1978년 <주간경향>에 ‘조가비’ 2년 연재.
1979년 <주간스포츠동아> 만화 속의 스포츠 연재. 카툰집 ‘조가비’ 발행.
1987년 일본 <요미우리신문> 국제 카툰전에 출품하여 특별상 수상.
△ 일본 <요리우미신문> 국제카툰 대상전 특별상 수상작 ‘다 타고 나서’ 생명과 죽음의 테마를 사용(1987년 / 한국만화100년 기념도록 142pg. 발췌)
1990년 <스포츠서울>에 ‘서울 카툰 별곡’ 3년 연재.
1990년 <일간스포츠>에 4컷 ‘도루묵’ 5년 연재.
△ ‘도루묵’ 사이로 카툰(주간만화 연재)
1991년 아직도 카툰에 대한 사회 인식이 미진하다고 판단, 조관제, 신송균, 김마정, 서서영, 강창욱과 <서울카툰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한국카툰협회>로 성장하였다.
△ 카툰작가 북한산 야외모임(1990년)
△ 카툰을 응용한 상업광고, 출판물 등을 기획, 본격적으로 활동 협회 구성 (회지 카툰피아, 1990년 발행)
1991년 <조선일보>, <월요경제>에 만평 연재. 국제적인 카툰 붐이 일어서 국제 카툰 작가가 속속 등장하게 된 시점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대학에 만화 영상학과가 개설, 젊은 층까지 카툰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게 된다.
△ 스포츠조선 주최 국제 카툰전, 전시위주의 카툰붐이 각 대학 출품 러시로 대 성황을 이룸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 갤러리, 1991년)
△ 신동호 사장, 유혁인씨(한국 국제문화협회장) 등에게 작품을 설명중인 고우영 만화가협회장
△ 대상수상자(김이수, 우)와 심사위원들(좌 : 모즈(프랑스), 레이먼드(영국))이 소감을 나누고 있다.
△ 작품을 보면서 환담을 나누고 있는 신동우(좌)와 고우영 회장
△ 국제만화대상 공모전 안내장 표지화(1991년)
2001년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영상과 교수 역임.
2003년 카툰집 ‘사이로 여행기’ 발행. 국제 카툰협회 회장 역임. <한국 만화가협회> 상 수상.
△ 사이로 여행기(2003년, 초록배 매직스)
△ 카툰 ‘표현(좌)’, ‘첨단실사용(우)’ (사이로 여행기에서)
2009년 ‘고바우만화상’ 특별상 수상.
2011년 카툰 교재 ‘카툰의 길’ 발행. 현재까지도 새로운 카툰 전시를 위해 학구적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 ‘카툰의 길’ 카툰 창작의 이론과 실제를 담았다(2001년, 매직북스)
△ 만화삽화(현대경제일보, 1974년 1월 5일)
△ 시사만평 ‘뽈라구’ 우유부단한 정치인들 풍자(국제신문, 1990년)
△ 요미우리 신문국제카툰전 싸인회 (좌 : 박기준, 사이로, 서울롯데백화점, 1990년 9월)
△ 강일구 카툰전 테이프 커팅식 (좌둘째 : 사이로, 강일구, 박기소, 김마정, 인사동인테크화랑, 1995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