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관련 행사로 시끌벅적한 최근 미국에서는 전 세계 코믹스팬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해 논란이 되었다. 지난 4월 12일,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마블의 한 유명작가가 해고되었음을 비중 있는 기사로 쏟아냈다. 이번 사건은 마블의 엑스맨을 그린 인도네시아 그림 작가 ‘아르디안 샤프’가 신간 「엑스맨 골드(X-Men Gold)」볼륨 1권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와 관련한 상징적인 문구를 삽입해 논란이 되었다.
△ <문제가 된 4월 5일 출간된 X-Men Gold #1 표지>
△ <해당 볼륨의 논쟁의 장면 컷. 상단 티셔츠 위의 QS 5:51과 하단 숫자 212>
여기서 QS 5:51이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친구로, 그리고 보호자로써 택하지 말라. 그들은 서로가 친구들이라. 그들에게로 향하는 너희가 있다면 그는 그 무리의 일원이거늘 하나님은 이 우매한 백성들을 인도하지 아니하시니라.’
(국내 출판된 「성 꾸란」 한국어 번역본 참고)
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이 문구를 들어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관련된 모든 것이 적대세력임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212’는 인도네시아 이슬람 과격파의 시위 구호로 쓰이는 것이다. 샤프는 2012년 배트걸 시리즈에서도 정치적인 내용을 내포하는 정치인의 얼굴을 그림에 넣어 논란이 있었던 작가다.
아이러니하게도 논란의 글자는 마블 내에서 걸러내지 못한 채 독자에 의해 발견돼 알려졌다. 마블에서 연재 하는 작품은 출시와 동시에 E-book과 스마트 어플리케이션 서적으로 전 세계에 동시 출간된다. 4월 5일 해당 작품이 출간되고, 수일 후 마블 본사 고객센터에 이슬람권 독자들의 제보로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또한 이 사실이 알려진 후 전 세계 독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는데, 표현의 자유를 떠나서 「엑스맨」이라는 작품 자체가 지난 반세기동안 전 세계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각종 사회적인 문제를 일관되게 다룬 히어로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작품 자체가 갖는 세계관적인 메시지에 반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마블의 대변인은 논란이 붉어지자 4월 10일 공식입장을 밝혔다. 대변인은,
“해당 작품의 묵시적 언급은 마블의 관련 글 작가, 편집자, 감독 등의 의견과 견해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입니다.(중략)”
라고 회사 측 이하 관련 제작진들이 그림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음을 언급했다. 또한 마블은 4월 12일 수요일 작가 샤프의 해고소식을 알리며 「엑스맨 골드」의 즉각적인 서비스 중단을 발표했다. 그리고 후속 볼륨 두 권이 이미 인쇄돼 배포되었기에 해당 작가의 작품이 여전히 노출되어 있지만, 「엑스맨 골드」의 그림 작가 교체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출시가 지연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해당 작가는 팬들의 비난에도 자신은 신념과 종교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일관된 주장을 펼쳤다.
△ <X-Men Gold #1을 그린 작가 아르디안 샤프의 해고통지 후 페이스북 포스팅>
또한 마블의 해고통보 이후 작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 만화 경력은 이제 끝났다.”라면서 자신이 그림에 삽입한 ‘212’과 ‘QS 5:51에 대해서는, “이것은 정의의 숫자이자 사랑이다. 이것은 코란과 마지막 선지자 알라에 대한 나의 사랑을 뜻한다.”라는 등 굳건한 신념과 믿음을 드러내 관련 아티스트와 일반 팬들까지 아연실색하게 했다.
이번사건으로 인해 아티스트의 표현의 자유와 지양 점의 개념이 도마 위에 올랐다. 당연히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미국에서는 누구나 말하고, 표현할 수 있고, 행동의 자유가 있다. 설령 그 표현의 방법과 도구가 터부시되는 무언가라도 실행하는 아티스트에게 맹목적인 비난이 돌아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이것이 보편적 가치를 침해하는 경우는 예외이다. 아무리 개인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이 확고해도 그것으로 인해 지금까지 아파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가 있다면 그 행위 자체는 예술이 아닌 정신적 학대의 연속으로 보기 때문이다. 샤프가 엑스맨을 통해 범한 오류는 마치 나치즘 마크를 전신에 두른 캐릭터가 홀로코스트는 정당했다고 외치는 모습을 미디어 예술에 끼어 넣는다던가, 욱일기를 모티브로한 명품을 ‘내가 봤을 땐 좋은 것’이라며 일제강점기 생존자들에게 선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인 것이다. (반대로 터부시되는 무언가를 단지 ‘차용’했다는 것만으로 아티스트가 비난받는 사례는 엄연히 구분지어서 바라보아야할 것이고, 그것이 곧 성숙한 관람자의 역할이다.)
장르를 떠나 예술에서의 표현과 자유, 그리고 아티스트 본연의 색깔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 내적으로 외적으로 누군가가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되지만, 표현의 당사자도 자유를 터무니없는 무기로 오용하는 것은 오만한 행위지 않을까? 자유와 신념은 보편적 가치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게 하는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