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든 하나인 만화계의 원로 이종진 선생은 1957년 ‘소년 감찰사’로 데뷔를 해서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어린이만화 전성기에 활동했던 만화가이다.
애초 남양주에 있는 작가의 자택으로 찾아뵙고 인터뷰하는 일정이었지만 요즈음 계획하고 있는 자신의 개인전에 대한 자문도 구할 겸하여 부천을 직접 찾아주셨다.
노 작가는 오랜 갈증을 씻어내려는 듯 자리에 앉자마자 1958년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었던 자신의 히트작 철인28호에 대한 소회부터 털어내었다.
남다른 그림 솜씨를 눈여겨보던 동네 친구의 소개로 만화출판사와 인연이 닿았지만 당시의 그는 스토리 구상부터 칸 연출 등 가장 기본적인 창작자로써의 경험이 전무했었다.
그래서 검은별, 소년 감찰사 등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고만 고만한 작품으로 유통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창작자로서의 답답한 데뷔 시절을 보내던 그는 우연히 길거리 좌판 대본소에서 일본만화 철인28호를 발견하게 된다. 좌판 대본소는 전쟁 후 곤궁한 시대적 상황에서 등장한 일종의 야외 만화방이었다. 하기야 그 무렵에는 복덕방도 전봇대에 종이로 만든 간판을 붙이고 영업을 하던 시절이었다.
요코하마 미츠테루의 철인28호, 그것도 조악한 번역 쪽지가 원본 만화 페이지 위에 덕지덕지 붙은 상태였었지만 마땅한 만화 작법 관련 자료 한 점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이종진에게는 최적의 자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때부터 이종진에게 <철인 28호>는 빛과 그림자가 되었다.
좋은 소재의 독특한 작품에 영감을 준 <철인 28호>의 캐릭터를 있는 그대로 차용한 초보 작가 이종진의 선택은 만화 작법은 물론 만화에 대한 개념의 ‘무지함’으로 생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수였지만 한국 만화사에 있어서 역량 있는 만화가를 평가절하 받게 만든 안타까운 “주홍글씨" 가 되고 말았다.
작업 초기, 독서광이기도 했던 이종진은 독서로 익힌 지식과 타고 난 상상력으로 철인 28호의 틀을 크게 벗어나 나름의 세계관을 설정하고 에피소드를 만들어내어 이종진 브랜드의 로봇 만화를 만들어내었고, 작품은 출간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이후 독자적인 작품 세계와 캐릭터를 창조해내었고 인기 작가의 반열에서 오랫동안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지만, 원로 만화가 이종진에게 <철인 28호>는 영광과 수치심을 동시에 맛보게 한 영욕과도 같은 작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만화 캐릭터의 중요성을 미리 알고 초기 연출 단계에서 로봇 캐릭터를 조금만 바꿔 그렸다면 지금의 평가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노작가는 회한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문과 잡지에 게재되었던 시사만화와 단편만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그 당시 척박했던 만화계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꾸려가는 ‘단행본 이야기 만화’는 드물었다. 그러한 배경 때문이었는지 6.25전쟁 발발 직후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만화를 베껴 그린 모사 작품이 나름의 인기와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외국 만화에 영향 받은 수많은 만화가들이 활동하던 시대였지만, <철인 28호>는 새로운 장르와 캐릭터로 받은 인기 때문에 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회자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홍제동에서 태어 난 이종진은 모친과 함께 나이 터울이 많은 누이와 함께 6. 25. 전쟁 당시 피난 시절에는 대구 칠성동에서 살았다.
수복 후에는 잠시 서울의 용산국민학교에 다녔는데 1. 4후퇴 때 다시 내려가서 살던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어른들은 일자리가 없었고 마땅한 소일거리도 없었기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삼삼오오 화투를 즐겨했다. 당시 귀한 놀이감이었었던 화투의 정품을 구하지 못한 어른들은 이종진의 그림 솜씨를 알고 화투를 그려오게 해서 돈을 건넨 적도 있었다 하니 작가의 그림 재능이 어느 정도였었는지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고우영’은 중학교 때 같은 반에서 공부를 했었다. 고우영은 이미 그때부터 ‘함백희’라는 필명으로 단행본을 발표한 천재였는데, 만화에 관심이 없었던 이종진에게는 그냥 그림 잘 그리는 친구로만 알고 지낸 정도였었다고 한다.
이후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헤어졌는데 그 무렵 고우영은 형 ‘고일영’의 작품 <짱구박사>를 물려받아 이제 ‘추동성’이란 필명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종진은 여느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나이 터울이 많은 누이는 결혼을 해서 출가를 했고, 자신은 이제 모친을 부양해야 하는 집안의 가장이 되었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의 인생은 그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같은 동네에 살던 만화가 ‘이영복’이 만화 출판사를 소개 해 주었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출판사는 그에게 일감을 선뜻 내주었다.
그러나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만화 청탁을 종이 원고에다 그려 오라는 게 아니라 인쇄할 때 쓰는 아연판인 ‘징크zinc 판’에다 만화를 그려 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만화 작법도 모르는 신인에게 인쇄 공정을 짧게 해서 이윤을 높이려는 욕심 많은 출판업자의 요구대로 생계를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기분으로 신인 이종진은 무거운 아연판을 들고 집으로 와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 위에다 그리기도 쉽지 않은 신출내기 만화가에게 수정도 불가한 아연판 위에다 팔 받침대를 놓고 붓으로 30여 페이지를 그린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노역이었다.
당시 인기 만화가였던 ‘박기당’이나 ‘김종래’ 같은 삽화체 만화가들에게는 세밀한 선이 들어가는 그림체 그림이라 어쩔 수 없이 종이 원고지에다 만화를 그리게 했지만, 이종진의 작품은 반 삽화체여서 작업하기가 단순할 거라고 쉽게 생각한 업자의 약은 욕심에 초보 작가 이종진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제작비 절감과 좀 더 많은 이윤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리한 작업 지시가 계속 되었었지만 이종진은 징크판 원고 30여 쪽 작품을 2권까지 그려내며 악착같이 생계형 만화가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만화가 돈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 군소 출판사가 난립하던 시절이라 그림 잘 그린다는 소문을 듣고 이종진에게도 어느 듯 다수의 출판사에서 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만화계로 입문하도록 이끌어 준 이영복 작가에게 종이 고르기와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기, 펜 사용법 그리고 축소와 확대 개념 등 만화 작법에 필요한 기초를 제대로 배우고 익혔다.
이영복의 가르침대로 원고를 한 장씩 그리며 원고 한 권을 마감하고 나니 원고 제작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어졌다.
‘징크판’에다 그리는 것에 비해 종이에 그리니 편하긴 했지만 만화 작업 경험이 없었던 그에게 스토리부터 데생, 펜 터치와 마무리까지 모든 일을 혼자 한 달에 30여 페이지 만화 그리기에는 너무 고된 작업이었다.
원고 제작 경험 부족으로 요령도 없었고, 서툴러서 원고 마감을 하려고 해도 생각만큼 빨리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그의 원고료는 한 달의 생계를 유지할만한 수준이 못되었다.
앞서 서문에 언급했듯이 소설 <검은 별>,<소년 감찰사>등을 발표한 1957년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진의 원고를 찾는 출판사가 꾸준히 늘어나 <광문당>에서도 두 권 정도 그렸고, <독수리 문고(대표:강부호)>에서 드디어 <철인 28호>를 발표한다.
<땅꼬마> 캐릭터로 기라성 같은 인기 만화가들 대열에 합류하다.
<철인28호>를 통해 인기 만화가로서의 위상도 높아졌지만, 여전히 이종진은 작업 속도가 느려 출판사로부터 늘 원고 독촉에 시달렸다. 동료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던 탓에 남들이 다 하던 문하생 시스템에 대한 정보도 어두웠었다.
이종진의 원고를 받기 위해 출판사 사장이 집으로 찾아 와서 작업 끝나기를 기다리는 일도 여러 번 겪었을 정도였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어느 정도 만화 제작 공정에 대한 생리를 알게 된 이종진은 가끔씩은 스토리도 사서 쓰게 되고 문하생도 두기 시작한다.
요즘처럼 작가와 출판사 간에 전속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라 이종진 같은 인기 만화가의 작품은 탈고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출판사들 간의 경쟁이 벌어졌다.
텔레비전이 대본소에 비치되기 시작할 즈음 프로 레슬링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일본에서 활약 중이었던 박치기 왕 ‘김일’ 선수의 인기 덕분이었다.
‘장영철’, ‘천규덕’ 선수가 나오는 프로 레슬링 경기가 텔레비전에서 중계를 하면 만화대본소에서 만화 보던 청소년들이 환호를 했다. 이종진의 대표 캐릭터 ‘땅꼬마’ 는 바로 그 무렵 레슬링 붐을 타고 태어났다.
내용도 시대에 맞았지만 이종진 특유의 커다란 눈동자 안에 두 개의 빛으로 나타난 캐릭터는 독자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한 독창성이 있었다.
시대 흐름에 힘입어 그의 작품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당시 최고 인기 만화가 ‘산호’의 <라이파이>와 경쟁이 붙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발표한 작품들마다 인기를 얻고 여유로워진 주머니 사정 탓에 이종진은 다소 나태해진다.
단행본 만화의 인기 비결은 제 날짜에 정기적으로 대본소에 비치해서 독자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작품 출고시기를 몇 번 놓치는 바람에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당연히 <라이파이>와는 경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순위가 밀리게 된다.
요즘과는 다르게 당시의 만화에는 만화 칸 마다 들어가는 말풍선 속의 글씨를 독자들이 읽기 쉽게 또박또박 쓰는 일도 만화 그리는 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었는데, 작업 속도가 느린 이종진에게는 글씨 쓰기 작업까지 해결하느라 시간과 힘이 많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땅꼬마> 캐릭터에 이어 <불동이> 캐릭터로 인기를 구가하던 이종진은 과감하게 장르를 바꿔 늑대 속에서 자란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한 <늑대소년 왕그루> 시리즈로 다시 한 번 인기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당시 인기 작가의 단행본 작품 뒷면에 ‘독자만화 투고란’이 있었는데 만화가를 꿈꾸는 전국의 청소년들에게는 자신의 솜씨를 뽐내는 꿈의 경연장으로 열기가 대단했다.
전국의 수많은 독자들이 이종진 만화의 주인공 캐릭터를 그려 보내면 작품 뒷면에 출품자의 이름과 등급, 그리고 간단한 평까지 실었었다 한다.
인터뷰 자리에 자료로 가져 온 <늑대소년 왕그루> 단행본 뒷면에 실린 ‘이현세’와 ‘이희재’의 투고 작품을 보여 주며 자랑스러워했다.
우리 만화계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현세’, ‘이희재’도 그 당시 다른 만화가 지망생처럼 이종진 작품의 독자투고 단골손님 중 한 사람이었다니 참으로 감회가 새로워지는 순간이었다.
술도 못 마시며 동료 만화가들과의 술자리 교류
늦게 만화가들과 교류를 시작한 이종진은 개성 있는 캐릭터로 활약했던 고인 ‘정파’, ‘박기당’, ‘김종래’, ‘최상권’과 가깝게 지냈고, 이종진보다 늦게 데뷔한 나이 많은 후배 ‘유세종’과는 특별하게 가깝게 지냈다.
동양화를 공부한 유세종에게 큰 작품을 선물 받기도 했으며 가족들끼리도 유대가 깊었다고 한다. 이종진이 꽤 심각한 관절 수술로 병동에 입원해 있을 무렵 절친 “유세종”은 임종을 했고 그를 끝까지 배웅 못한 것에 대해 지금도 미안하고 안타깝다고 했다.
매달 만화계 선배와 동료인 ‘박기정’, ‘박기준’, ‘박진우’, ‘유세종’, ‘노석규’ 등과 같이 있는 시간이 좋아서 술 한 잔만 해도 얼굴이 빨개져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그였었지만 술자리에는 자주 참석을 했다.
애주가인 ‘김종래’와 ‘박기당’에게 수시로 불려 나가 어울리는 것은 좋았지만, 강권에 의해 억지로 술 한 잔 마시고는 일찌감치 쓰러져 버리면 동료들은 술도 못 마시면서 왜 나오느냐는 핀잔을 주기도 했다.
‘아동만화 자율위원회’가 1968년 10월에 해체되고 문공부 산하의 ‘한국아동만화 윤리위원회’가 설립되자, 만화가들은 자구책으로 새로운 협회 창립 준비를 했고, 이때 이종진은 ‘신동우’, ‘손의성’, ‘김기백’, ‘권영섭’, ‘박부성’, ‘하고명’, ‘최백산’, ‘박기준’ 등 9명으로 구성된 <한국아동만화가협회 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를 한다.
‘한국 신문회관’에서 발기인 총회를 가진 <한국아동만화가협회>에서 이종진은 ‘대의원’으로 선출된다. 초대회장 ‘박기정’이 이종진, 정한기 등 쟁쟁한 인기 만화가들은 원고에 바쁘니 ‘이사’ 대신 ‘대의원’으로 동참만하라고 해서 참여를 했지만 작업에 쫓겨 협회 일에는 관여 하지 못한다.
이종진 역시 다른 만화가들에게 수많은 고초를 겪게 만들었었던 사전심의 기구인 윤리위원회의 제재를 피할 수 없었다.
<철인 28호>에 이어 야심차게 준비하며 고심해 만든 강렬한 눈빛의 캐릭터 ‘땅꼬마’의 눈동자 안에 흰 빛이 두 개인 것이 보편적 눈동자가 아니라면서 수정을 강요해서 설득시키느라 무지 고생했었다.
1960년 작품 <원시인 바바>와 1967년 <늑대소년 왕그루>는 원시인이기에 당연히 긴 머리로 표현을 했는데, 머리카락이 길어 어린이 정서를 해친다며 짧게 잘라 그리라고 강요도 당했다.
1969년 작품 <진기스칸(징기스칸)> 표지로 징기스칸이 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어린이들에게 폭력적인 정서를 주입시키는 이미지라며 징기스칸이 활 대신 다른 걸 들고 있는 것으로 그려 넣으라고 해서 활 대신 부채를 들고 있는 그림으로 수정을 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수정을 한 표지와 본문의 작품 수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 시절 이런 검열로 인해 시달린 원로 작가들은 이런 일관성과 전문성 없는 검열 때문에 우리나라 만화가 독창성이 결여된 예술 장르로 전락했고, 결국엔 일본 만화의 자유로운 표현에 상대적으로 압도당한 것이라고 원로 만화가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으곤 한다.
서울의 지가(紙價)를 올렸던 이종진에게도 어린지 잡지용 작품에 대한 연재 청탁이 있었지만, 단행본 작업에 만족하고 있었던 터라 번번이 거절을 했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판단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출판과 유통의 권력자 <합동>에 미운 털 박히다.
1967년에 설립한 <합동>출판사는 만화출판과 유통의 독점으로 만화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했으면서도, 만화가와 만화계의 발전에 대한 기여에는 안중에도 없고 폭리만 취하느라 80년대 초까지 만화가들에게 횡포를 부렸다.
<합동>은 서울 시내에 있던 고물 기계를 사 들여 값싼 종이로 단행본을 찍어내어 원고의 내용이 제대로 인쇄 될 수가 없었다. 지질이 나쁜 종이에 낡은 인쇄기와 조악한 잉크로 인쇄한 합동 출판사의 만화는 캐릭터의 한 쪽 눈이 없어지고 글자가 깨지는 등 좋은 만화 출간을 기다려온 만화가와 독자 모두에게 공분을 샀다.
출판사 임의대로 작품 원고의 권수를 제한하여 작가의 생계를 위협하고 민원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신출내기 초보 만화가들을 대거 데뷔시켜 만화가를 출판사에 소속 된 ‘화공’으로 전락시키는 전횡도 서슴지 않았다.
<합동>의 이런 불의에 대항하기 위해 만화가들은 ‘박광현’, ‘박기당’이 주축이 된 출판사 <오성문화사>를 설립했고 이에 이종진도 참여를 했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오성출판사>에 거래를 했던 많은 만화가들을 회유한 <합동>은 인기작가 이종진도 회유를 했다. 그러나 그는 <합동>에 합류하는 대신 ‘유세종’, ‘조원기’, ‘엄희자’, ‘고우영’ 등 인기 작가 일곱 명과 협동조합 같은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오복문고> 설립을 주도한다.
만화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막강한 힘을 가진 <합동>은 <오복문고>를 쓰러뜨리려고 거래처인 총판과 인쇄소에 치졸한 압력을 가해 방해 공작을 펼친 끝에 결국 <오복문고>가 손을 들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진은 굴복하지 않고 <합동>으로 가지 않았다.
이종진은 나름의 팬덤을 확보한 인기 작가였기 때문에 <합동>에서 대접을 해주겠다는 회유도 많았지만, 만화가에게 횡포를 부리며 핍박하는 <합동>출판사에 합류하는 게 마땅찮았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종진은 <합동> 측으로부터 기피 작가로 분류되어 오랜 동안 만화를 그리지 못하게 된다.
<오복문고>가 폐업을 하고 <합동>과는 거래하기 싫었던 이종진이 손을 놓고 있을 때, 대지 영화사 사장으로 호텔도 운영하던 자산가 김길용 사장을 소개 받아 그의 생각에 동조하던 인기 작가들을 규합하여 <대지출판사>를 출범시킨다.
합동과 경쟁을 하게 된 <대지출판사>의 출범은 사장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만화가들을 초대하며 영화인들과 함께 하는 잔치를 열며 호기롭게 출발을 했다.
하지만, 만화 시장을 만만하게 봤던 <대지출판사>는 생각보다 많은 원고료가 들어가는 지속적인 지출과 판로 확보에 애로를 겪으며 <합동>과 힘겨운 싸움을 하는데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다.
<대지출판사>의 이런 딜레마를 눈치 챈 <합동>에서 ‘지금까지 들어 간 운영비 모두를 보상해 줄 테니 만화 사업에서 손 떼라’고 하는 제안을 하자 <대지출판사> 김 사장은 합의를 하고 만다.
두 회사의 합의에 의해 <대지문화사> 소속 작가들은 <합동>에서 다시 작품을 할 수 있었지만, 이종진은 이후로 6개월 가까이 작품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합동에서도 언제까지나 인기작가 이종진을 그냥 놓아두는 것이 아까웠던지 인기작가 다운 대접을 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했고, <소년한국일보사>에서 만화 사업을 하기 전까지 다시 합동과 원고를 거래 했다.
이종진의 작품은 지인의 소개로 사회에서 버림받아 억눌려 살고 있던 깡패가 프로 레슬러로 성공한다는 내용의 작품 <블랙 마스크>를 미국에서 출판을 하기도 했다.
스토리는 미국인이 쓰고 그림은 이종진이 그렸는데, 자율위원회에서 잔인하거나 폭력적인 장면이나 말을 지적당한 트라우마가 있었던 이종진은 미국 출판사의 좀 더 폭력적이고 잔인한 묘사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심의실에서 지적받은 관성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종진은 지금도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이놈’이란 소리는 못하고 ‘이 녀석’이라고만 한다.
미국 출판사측의 요구대로 피 튀기거나 잔인한 장면 묘사를 하지 못한 것은, 검열에 대한 강박관념이 남아 있어서 작품에서의 표현 방법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성까지 바꿔버린 것 같다며 스스로 놀라워했다.
아직도 ‘김형배’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인기 작가였지만 이종진은 문하생을 많이 두지는 못했다. 이종진의 독특한 캐릭터를 배우기도 힘들었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결백증도 한 몫을 했다.
오랫동안 애써서 가르친 문하생이 작품 제작에 동참을 시킬만한 실력으로 키워 놓으면 배운 재주를 믿고 대우를 잘해 준다는 다른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종진은 많은 문하생 중에도 ‘김형배’를 특히 잊지 못한다. ‘김형배’는, 그림도 잘 그리고 재주도 좋아 ‘안아주고 싶을 만큼 좋은 제자이자 후배’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김형배’는, 섬세한 선과 특유의 스타일로 SF와 전쟁만화 그리고 음악을 다룬 만화를 꾸준히 발표한 원로작가이다. 작품의 대량생산으로 수익 창출을 높일 수 있는 전통적인 만화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상업성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해 오며 주제와 소재, 연출, 스타일에 있어 모두 진지한 작품 발표로 후배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이종진이 <합동>과 싸워서 ‘미운 털이 박혀’ 작품 거래를 중단했을 때도, 다른 문하생들과 달리 그의 재주를 탐내는 많은 만화가들의 스카웃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하고, 이종진이 다시 합동과 거래를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동참해 준 착한 심성과 의리의 ‘김형배’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같이 생활하는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도 스승으로서 ‘김형배’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빚이 많은 듯해서 이종진은 아직도 미안해했다.
1972년 2월에 만화 출판에 관심을 가졌던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은, <합동>의 횡포에 불만이 많았던 만화가들을 규합하여 신문사에 만화사업부를 만들었다.
이때 이종진도 만협 회장이었던 ‘박기정’과 많은 만화가들과 함께 한국일보에 합류를 했다.
만화 시장 독점에 대한 사회적 비난에 대한 부담 때문에 이영래의 <합동>과 장기영의 <소년한국일보사>는 공존하기로 타협하는데, 이영래 사장은 만화 시장 장악의 끈을 늦추지 않기 위하여 직원과 친척들 명의로 합동출판사 외 다른 출판사로 등록하여 출판을 하는 꼼수를 쓰며 시장을 다시 장악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의 문화 개방 정책의 흐름을 타고 한국 만화출판 시장으로 무단 복제한 일본 만화들이 쏟아져 들어와 독자들을 열광시켰다,
그동안 사전심의에 의해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해 허덕이던 우리 만화계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 만화를 복제해서 유통시키던 ‘불법복제 만화출판사’ 15개소를 당국에 고발하기도 했다.
한국만화가협회에서도 일본만화 불법복제 자료집과 불법 일본만화 추방운동으로 토종 만화계의 경쟁력을 높이려고 노력을 했지만,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일본 만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서울문화사> <대원>같은 대규모 출판사들이 본격적으로 일본 만화를 잡지에 게재하면서 국내 만화계는 서서히 몰락하면서 이종진의 활동도 위축된다.
자비로 출판사 등록과 운영하며 문하생을 독립시키다.
출판사들은 국내 만화가의 작품으로 출판을 해 봤자 적자를 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원고료와 출간 할 작품 권수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출판사에서 주는 원고료로는 작품을 제작할 형편이 되지 않은 많은 한국 만화가들이 만화 작업에서 손을 놓기 시작한다.
이종진 역시 이런 환경에 피할 수는 없었지만 결국 한계를 체감하며 <서진출판사>에서 발행한 ‘그늘진 태양’을 마지막 작품으로 단행본 작업에서 손을 놓았다.
이종진 나름의 문하생에 대한 배려는 오래 함께했던 문하생이 신인작가로 데뷔를 할 수 있도록 도우는 일이었다.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출간하여 독립을 하고 싶어 하면 문하생 중에게 신인작가 데뷔작 표지에 인기 작가 이종진의 이름과 공저로 해서 출간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 주는 것이다.
신인작가로 데뷔해서 새로운 단행본을 출간 해 보지만, 신인작가의 의욕과 달리 독자들은 보수적이라 인기 작가 작품 이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홀로서기’하기에는 많은 시간과 장애가 있었다.
이런 환경의 만화출판 시장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인기 작가 ‘이종진’ 이름을 신인작가 이름과 같이 붙여줘서 독자가 신인작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도록 하는 전략으로 제자의 성공을 바라며 애썼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쏟아지는 일본 만화의 쓰나미로 인해 국내 만화 출판시장이 급격히 기울어져 출판사들이 하나 둘 없어지기 시작해서 더 이상 화실을 운영할 여력이 없어질 때, 이종진은 문하생들을 위해 자비로 출판사를 등록하고 운영한다.
그 동안 도와 준 문하생들에게 자신의 출판사를 통하여 독립할 수 있도록 단행본 원고를 모아 출판하여 작가로 데뷔시키기 위해서였다.
만화계에서 오랜 활동을 한 이종진은 전국의 만화단행본 지방 총판들 대표들과 관계가 돈독했었다. 그들에게 신인 만화가들의 작품판매에 협조를 요청해서, 그 당시 손익 분기점의 적정선인 3,000부를 훌쩍 넘긴 10,000부를 찍어 전국에 뿌린다.
자신은 돈 한 푼 벌지 못하더라도 문하생들이 만화가로 홀로서기에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신인 만화가의 작품과 작가를 홍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도한 성과로 그때 데뷔했던 문하생 중에는 스포츠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활동을 하며 지금은 인기 작가 반열에 서서 활동하고 있다.
이종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 ‘유세종’, ‘김원빈’이 생각난다는 그는 요즘 손의성과 자주 연락하고 지내고, 만화가였으며 출판사를 운영하는 오명천과도 가까웠지만 근래에는 출판사 대표로 바쁜 일정 탓에 서로 소원해졌다고 한다.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초대를 받고 갔을 때, 그의 일을 도우며 신세졌던 후배 만화가들이 원로 대접을 받고 있는데, 정작 원로 대접을 받아야 하는 이종진에게는 배려가 없는 만화전문기관의 정보 부재에 대해 섭섭해 했다.
오래 세월동안 대본소용 단행본을 그렸던 만화가들은 어린이들의 콧물 묻은 돈을 갈취하는 ‘사회악’의 하나로 취급을 받으면서도 버티어 왔고, ‘심의’라는 굴레에서도 떠나지 않고 꿋꿋하게 한국 만화의 맥을 이어 온 만화가들인데, ‘대본소 만화’라는 편견 때문에 작가와 작품에 대한 연구와 고민도 없이 무조건 폄하하는 풍토에 많이 불편해 했다.
그런 원로들 노력 덕분에 오늘 같은 한국 만화계가 세계적으로 위상을 더 높이게 발전하게 된 것인데,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문화 전문기관인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라도 어느 곳에서도 찾아 주지 않는 ‘대본소 단행본 만화가’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 주기를 부탁했다.
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은퇴한 후배 만화가들에게 자존심이라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의 캐릭터를 활용한 산업적 활용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해 주는 역할을 기대한다고 했다.
한때는 한양의 지가를 올렸던 유명한 만화 캐릭터들의 독창성을 살려 산업적으로 키워 달라고 만나는 이들에게 이야기 해 봤지만, 과거의 것이라고 그냥 흘려듣고 그 누구도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원로 이종진의 자랑은 자신만큼 오랜 기간 동안 작품 활동을 한 만화가가 없다는 것이다. 작품의 양으로 따진다면 ‘대량생산 시스템 작가’에 비해 훨씬 떨어지겠지만, 작품에 손을 놓지 않고 오랫동안 그린 작가는 자기뿐이었다는 자부심이다.
만화가의 원고료로만으로 2남 2녀의 아버지로서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키느라 힘이 들었다는 이종진에게, 자녀들은 아버지가 만화가라는 것에 대해 특별한 자부심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근래에 들어서야 고맙게도 아버지 작품에 대한 아쉬움으로 장녀가 나서서 ’아버지 이종진의 만화 캐릭터 원화전’을 준비할 테니 작품 준비를 하라며 응원한 덕분에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처음 장녀의 제안을 받았을 때는 그림 그리는 일에 손을 놓은 지 오래 되어서 자신이 없었는데, 작업을 시작하자 옛 솜씨가 되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란다.
아무래도 전성기에 비해 어설프지만 옛날 작품에서 자료를 찾고 그때 생각을 반추하며 작심을 하고 전시회 준비를 시작 했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시력이 나빠져 데생을 한 원고에다 정확하게 선을 긋기도 힘들어 한다. 데생을 한 연필 선이 두 개씩 보이고, 손도 떨려 매끈한 선이 마음먹은 대로 나오지 않는 데는 재간이 없다고 하면서도 종이 재질과 번지지 않는 먹물에 대한 탐구심으로 캐릭터 원화전 준비에 분주하다.
아직도 현역을 자처하는 이종진은 그 동안 발표했던 작품들을 한국 만화가들이 많이 참여한 모 인터넷 대여점에 올리고 있다.
요즘은 인터넷에 공짜 만화가 많고 한정된 작품 수로 인해 한 번 본 독자들이 떠나 좀 한산하기는 하지만 원화전으로 다시 한 번 그의 존재감을 나타 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만화에 대해 문외한이어서 생계를 위해 만화를 그려왔고, 많은 독자와 동료의 도움을 받아 왔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많은 고마운 이들에게 받은 사랑에 비해 우리 만화계를 위해 해놓은 게 없다는 것을 이종진 선생은 부끄러워했다.
아직도 차를 몰고 다닌다는 선생은 승용차 뒤 유리창에 붙이고 다니는 ‘초보 운전’이니 ‘아기가 타고 있어요’ 같은 글자를 만화 캐릭터로 바꾸면 멋질 거라면서 연구 해 보라고 하고, 한국 만화 역사 제자리 찾기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역할을 기대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이종진
1937년 서울 홍제동에서 출생.
1957년 소년 감찰사로 데뷔.
1958년 공원 꼬마, 철인 28호 발표
1960년~1970년 땅꼬마, 철인, 한 밤의 공포 외 단행본 84 타이틀, 214권 발표.
1980년도 웃기는 아이들, 젊은 야망, 제3국인, 죽음의 헌터 외 단행본 80 타이틀, 430권 발표.
1990년도 저격자, 자치생 시리즈 외 단행본 164 타이틀, 642권 발표.
1997년 마지막 작품 ‘그늘진 태양’을 끝으로 단행본 작업 마침
현재 남양주시 오남 읍에 정착. 캐릭터 원화작품 전시 작업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