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상인들에 의해서만 판매되던 ≪ Zero(제로) ≫라는 신문사에서 일을 하던 Francois Cavanna(프랑소와 카바나 1923~)와 Georges Bernier(죠지 브헤니에 1929~2005)는 제로의 디렉터가 사망하자60년에 월간지 ≪ Hara-kiri(아하키히) ≫를 만든다. 이 둘이 제로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이 신문을 판매하던 행상인을 만난 카바나는 궁금증에 같이 그림을 그리던 친구 Fred(프레드)와 함께 이 신문사를 찾아간다. 마침 다음 호 신문을 찍어야 하는데, 한 페이지의 공백이 있어 편집자는 고민에 빠져있었고, 이를 이 두 젊은 작가가 메꾸어 주면서, 이 둘은 54년부터 제로 신문사의 그림 작가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이 둘 중 카바나는 이후 이 신문사의 편집장 역을 하기도 한다. 당시에 신문 일러스트들은 남편, 아내, 장롱 속에 숨어있는 아내의 애인. 셋이 나오는 뻔한 개그가 전부였는데, 제로 신문은 그외의 다른 것도 받아들였다고.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에 참전하고 돌아온 젊은 브헤니에는 일거리를 찾아 제로출판사에 와 행상일을 시작했다. 신문이 아닌 무엇이라도 다 팔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인 그는 바로 남들보다 몇배의 판매기록을 세우며 곧 제로의 행상인 총책임자가 된다.
편집장은 카바나가 맡고, 자금 조달, 회계, 판매 등 돈과 관련된 모든 일은 브헤니에가 맡으면서 아하키히는 시작된다. 초기에 아하키히에 참여한 작가들은 Topor (토포 1938-1997), Fred (프레드1931-2013), Reiser (하이져1941-1983), Wolinski (월랑스키1934-), Gebe (제베1929-2004), Cabu(까뷰1938~)등으로 다들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 카바나도 본래 그림을 그렸으나, 곧 이를 그만두고, 점점 글에 치중한다. 편집장 카바나가 초기에 신문의 방향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신문은 작가들 자신이 맡은 페이지들을 자신들이 책임하에 알아서 했으며 이 ≪ 작가 맘대로 ≫라는 원칙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한다. 이 초기 작가들 중 프레드는 65년까지만 아하키히에 참여하고 나간다. 사실 아하키히는 프레드가 함께 하기에는 좀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그 모습이 변하고, 계속 그 방향으로 갈 것이므로, 그가 아하키히에서 일찍 나갔음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하키히에 실린 프레드의 초기 만화들 중 ≪ Le petit cirque(작은 서커스) ≫는, 훨씬 어둡긴 하지만 이후 그가 잡지 삘로뜨로 가 진행할 만화 ≪ 필레몽 ≫의 분위기를 이미 느낄 수 있다.

△ 초기 잡지 표지는 63년 중반까지 작가 프레드가 맡았다. 아하키히는 일본식 자살을 뜻한다.
Le petit cirque (작은 서커스, 프레드 작) △ 이미지(위) : 작가 프레드가 60년대 아하키히에 실었던 만화 중 하나이다. 서커스 단장인 남편, 마차를 끄는 부인, 이들의 아이가 길을 가면서 만나는 짧은 이야기들로 이후 70년대에 출판사 Dargaud(다르고)에서 단행본으로 나왔다.
이미지(아래) : 서커스 단의 아이가 저기에 야생 ≪ 광대 말 ≫들이 있다고 하자 이를 잡기 위해 사냥에 나선다. 잡힌 광대 말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삶이 얼마나 좋은지를 자랑하고, 사냥에 나섰던 이들은 이에 혹해 스스로 광대 말이 된다. 그리고 이전의 말이었던 이들은 드디어 자유를 얻었기에 떠난다.
프레드와 같이 초기에 아하키히에 참여하고 나갔던 작가 토포는 영화, 연극, 소설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그는 애니메이션 ≪ La Planete Sauvage(판타스틱 플라넷, 1973) ≫에 관여했는데, 이 곳의 이미지는 그의 그림에서 나왔다.
△ 아하키히에 게재되었던 일러스트
△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플라넷. 감독 Rene Laloux. 시나리오 Rene Laloux, Topor (원작 Stefan Wul)
작가 월랑스키의 만화에는 생기발랄한 여성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 중년부부의 집에 한 여자가 찾아와 자신을 매춘부 릴리라고 소개하며 필요한게 없느냐 묻는다. 남자는 매우 정중하게 없다고 대답하고, 누가 찾아왔었냐고 묻는 부인에게 매춘부 릴리였다고 대답한다.
작가 하이져는 당시에는 보기 어려웠던 특유의 거칠고 자유분방한 펜선과 그림체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작가이다.
△ 이미지(위) : 하이져의 한 만화 캐릭터 Gros Degueulasse
이미지(아래) : 하이져는 일찍 암으로 세상을 뜨는데, 이때 아하키히는 그를 기리기 위해 그가 살아 생전 주간 샤흘리에 이용했던 일러스트를 재이용한다. ≪ 하이져는 이제 잘 지냅니다. 묘지에 걸어서 갔네요. ≫ 본래는 하이져 대신에 프랑코(독제자)가 쓰여있었다.
만화, 사진, 일러스트, 글등이 있던 월간지 아하키히는 허나 뉴스를 다루지는 않는다. 일단 주간지가 아닌 월간지이기 때문에 당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그게 그들의 목표도 아니었다고. 아하키히의 개그는 너무 과하여 한번은 한 독자에게서 ≪ 당신들은 멍청하고 나쁘기까지 하다 ≫는 편지를 받게 되는데, 이때부터 ≪ 멍청하고 나쁜 신문 아하키히 ≫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 이 독자의 편지는 자작극으로 카바나 자신이 직접 그 편지를 썼다 한다.
또 한번은 모든 독자들이 다 이들의 개그를 이해하는건 아님을 깨닫고, 애프터 서비스를 실시한 적도 있다. 신문에 사무실 전화번호와 함께 방문 애프터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글을 실은 것인데 정말로 문의하는 이들에게 방문 서비스로 대답했다고. 예를들어 ≪ 우리 남편이 이해를 못하겠다더라 ≫라고 문의 전화를 하는 아주머니 집에 수리공 차림으로 찾아가 남편분이 이해 못한다는 그 페이지들을 뜯어내고 다른 신문(앞에서 말한 남편, 아내, 아내의 애인류의 개그물이 있는)을 갖다 붙여주고 돌아오기도 했다 한다.
아하키히는 1,2호는 행상 판매 되었고, 3호부터는 키오스크(신문 가판대)에서 판매되기 시작한다. 3호의 판매량은 약 1천5백부. 그 다음이 2천5백. 다음은 4천부로 점점 늘어나지만 오랫동안 아하키히는 대중들에게 알려졌다기 보다는 같은 분야 전문가들사이에서 소문이 나는 수준이었다 한다. 회계 담당을 하던 브헤니에는 ≪ 쇼홍 교수 ≫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아하키히 사무실이 있던 거리 명인 ≪ 쇼홍 ≫을 따서 만든, 잡지의 철학을 대변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 이 ≪ 쇼홍교수 ≫라는 이름으로 브헤니에는 62년부터 아하키히 내의 각종 사진 만화에 등장한다.
삭발한 머리에 단정한 양복차림으로 이런 저런 엉터리 수리 수선 팁을 알려주기도 하고, 고민에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아하키히에는 점점 사진을 많이 사용된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도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진만화도 하는 등 이야기를 푸는 데에 사진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사진이 패러디에 적극적으로 활용된 예들은 이전에는 찾아볼수 없었다 한다.

△ 아하키히의 표지는 63년 말부터 사진으로 바뀐다.
△ 이미지(오른쪽 위부터 왼쪽, 아래순)
1964년 5월. 프랑스에서는 5월 1일에 사진에 있는 꽃(뮈게)를 누구나 팔 수 있다./
1966년 3월. 여자가 몸에 두른 것은 돼지 피로 만든 ≪ 부당 ≫이란 이름의 순대와 비슷한 음식./
66년에 당한 출판 금지가 풀린 후 다시 나오기 시작한 67년 1월호의 표지. ≪ 아하키히가 돌아왔다. ≫ 사진의 남자가 아래에서 말할 ≪ 쇼홍 교수 ≫다./
1968년 10월호 표지. 학생과 전경/ 1972년 6월. 성교육 : 아이들에게 모든걸 다 말해야 할까?/
1978년 8월. 이 표지 Bison bourre(비죵 부헤, 술취한 들소)는 막힌 길, 도로상황을 알려주던 방송 ≪ Bison fute(비죵 퓌떼, 약은 들소) ≫의 페러디. 이 술취한 들소는 ≪ 밟어 ! ≫라고 조언하고 있다. 사진의 할아버지는 당시 아하키히 사무실이 있던 건물의 수위였으며 작가 하이져의 만화 ≪ Gros degueulasse ≫의 모델이기도 하다.
쇼홍교수의 멍청하고 나쁜 놀이(Le jeu bete et mechant du professeur Choron) △ 62년부터 아하키히에는 쇼홍교수를 이용한 여러 사진만화 시리즈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그 중 ≪ 쇼홍교수의 멍청하고 나쁜 놀이 ≫. 이번 놀이의 재료로는 아가씨와 뚜껑이 덮힌 스포츠카가 필요하다. 시나리오는 작가 제베가 맡았다.
1. 스포츠카 앞에 서성이는 아가씨에게 차 문이 고장이 났다고 거짓말을 한다. 2. 아가씨가 애써서 창문을 통해 차 안에 들어가면, 중간에 차 문을 열러버린다. (아가씨는 길바닥에 떨어진다) 3. 차를 몰고 조금 멀리 간 뒤에 멈춘다. 4. 다시 차 문을 열었을 때 아가씨가 와 차에 올라 타려고 한다면 우리에게 ≪ 당신들이 이겼어 ! ≫ 라 편지를 보내시라.
△ (좌)쇼홍교수가 알려주는 수선팁들. 복숭아 씨 제거법으로 의자를 활용했다.
(우)한 발로 서있을 수 있는가? 가 흔하고 음주 테스트였던 듯 하다. 이 수선 팁을 활용한다면, 당신은 아무리 술에 취해 있어도 음주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다.
아하키히의 판매량은 오랫동안 6만부 정도에 멈추어 있었다. 사실 이 부수는 서점 판매와 비교했을 때는 엄청난 것이지만 대부분 키오스크에서 판매되는 출판물의 경우 서점과는 판매부수가 많이 다르다. 그러다가 63년부터 이들은 많은 이들의 조원을 받는다. 아하키히의 열렬한 독자였던 한 텔레비젼 프로그램 관계자가 자신의 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쇼홍 교수를 초대하기도 했고, 역시 아하키히의 독자였던 한 인기많은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가 자신의 방송에서 아하키히의 광고 구호였던 ≪ 사방 팔방 뿌려댈 돈이 있다면, 멍청하고 나쁜 신문 아하키히를 사시오. 아님 훔치시오 ! ≫를 반복해 불러댔으며, 덕분에 65년과 66년 판매량은 약 25만부가량이 된다.
아하키히가 생겨난 60년 프랑스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특히 점점 더 돈이면 다 되고, 남들처럼 나도 소비를 해야 하는 분위기로 가고 있었기에 아하키히는 이에 반대하는 개그를 펼쳐보인다. 아하키히는 잡지에 광고를 싣지 않았는데 대신 실제 존재하는 상표를 가지고 이들을 희화화하는 가짜 광고들은 아하키히에 자주 등장한다. 이때문에 많은 소송을 당하고 그때마다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으나 계속 했다.
잠시 아하키히에서 연재되었던 몇몇 만화를 소개한다.
Pravda la survireuse (시나리오 : Thomas Pascal그림 : Peellaert Guy) △ 60년대 말에 아하키히에 연재되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그래픽.
Gens de France (프랑스 사람들) Jean Teule(쟝 똘레, 1953~) 아하키히에 연재되었던 사진만화들 중 하나. 작가는 가장 이상한 사람들만을 찾아다가 인터뷰를 해 이 ≪ 프랑스 사람들 ≫이란 만화를 만든다. 그중 한 에피소드 :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뒤 별에 심취하게 된 한 시골 남자 쟝 끌로드는 어머니에게 매일 저녁 별 이야기를 한다. 별들 중 가장 아름다운 별은 ≪ 알따이 ≫.
아들의 이야기에 같이 빠져든 어머니는 자신이 죽으면 알따이에 뭍히고 싶다 하시니, 수리 수선에 능한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비행접시를 만든다. 산소를 위해 비행접시 안에 화분을 가져다 두는 것과 식량으로 통조림은 잊지 않았다. 비행시험을 하는데 아차, 통조림 따게를 안가져왔다. 여하간 비행실험 실패로 그는 몇날 몇일을 바다 위에서 떠돌다가 지나가던 배에 의해 간신히 구출이 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완벽한 비행접시를 만들기 위한 그의 시도는 멈추지 않는다.
작가는 이후에 프랑스외의 다른 곳의 이상한 사람들도 취재하여 ≪ Gens d’ailleurs(다른 곳 사람들) ≫이란 만화도 만든다. 둘 다 카스테르망에서 80년대에 2권의 단행본으로 나왔었으며, 2000년대에는 출판사 에고꼼엑스에서 이 두권이 1권으로 묶여 ≪ Gens de France et d’ailleurs (프랑스 와 다른 곳 사람들) ≫이란 이름으로 다시 나왔다. 작가는 현재 만화는 하지 않고 소설가로 활동중이다.
△ (좌)에고꼼엑스에서 2005년에 복간된 Gens de France et d’ailleurs.
(우)비행접시를 하늘로 띄우기 위한 쟝 끌로드의 계산. 배들이 사라진다는 저주받은 버뮤다 삼각지에 비행접시를 갖다 놓아야 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이 여기에서 사라진 배들을 찾겠다고 계속 바다 밑은 살펴보는데, 배를 찾지 못하는건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 배들은 바다 밑에 가라앉은게 아니라 하늘로 날라갔으므로. 비행접시발사의 적격지가 아닐 수 없다. 사진에 보이는 둥근 것은 그가 만든 비행접시.
기존의 질서를 힘차게 놀려대던 이월간지는 61년과 66년에 정지를 한번씩 당한다. 61년에는 포르노라며 청소년 보호를 위하여 금지를 당하는데, 6개월간 지속된 이 금지기간동안 브헤니에는 지방에서 행상인들을 통해 아하키히를 판매하기도 한다. 66년에 당한 금지는 이들에게 특히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는데, 이 때 많은 작가들이 아하키히를 떠나게 되고, 브헤니에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게 된다.
허나 아주 막바지까지 가 압류를 당하는 위기에서 브헤니에에게 반한 한 재력가 마나님의 도움으로 한 숨 돌리게 되었었다고. 그 분 덕분에 빚을 8년에 나누어 갚아도 되게 되었다 한다. 아하키히 내의 자금을 담당하던 브헤니에는 인쇄비를 내지 않기 위해 매번 인쇄소를 바꾸거나, 작가들에게 고료를 지급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때문에 나간 작가들도 많았다 한다. 여하간 금지가 겨우 풀린 뒤 아하키히는 67년 1월부터 다시 나오게 되는데, 신문가판대는 이 신문이 또 언제 금지될지 모른다며 받아들이기를 꺼려했고, 덕분에 판매량은 이전의 25만부에서 8만부~10만부로 크게 떨어진다.
그리고 68년 5월 68혁명이 찾아온다. 기족의 보수적 질서에 반대하는 68혁명을 보면서, 아하키히는 자신들이 이 운동을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보게 된다. 이에 사회에 더 참여해야겠으며, 그를 위해서 시사 주간지도 만들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에 Les edition Square(스쿠아 출판사. 아하키히 출판사였다가 이름을 바꾼다. 이곳에서 단행본을 포함 아하키히와 관련된 출판물들이 나왔다.)는 69년 시사 주간지 ≪ 주간 아하키히 (L’hebdo Hara-Kiri)≫를 만든다. 이곳에는 월간 아하키히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작가들이 계속 참여했다. 월간지와 주간지 둘 다를 맡기에는 일이 너무 벅참을 느낀 카바나는 주간지만을 자신이 맡고, 이때부터 월간지의 편집장은 작가 제베 맡게 된다. 또한 동시에 만화 전문 잡지 ≪ 월간 샤흘리(Charlie mensuel) ≫ 도 발행하기 시작한다. ≪ 샤흘리 ≫는 이 잡지에서 번역 연재되었던 만화 ≪ 스누피 ≫의 캐릭터 ≪ 챨리 브라운 ≫에서 따온 이름이다.(찰리의 불어 발음은 샤흘리) 브헤니에는 이 두 잡지의 탄생이 전체 판매에 활력을 줄것이라 기대했으나 월간 샤흘리는 1만 5천부, 주간 아하키히는 3만부 정도만 나가면서 빚만 계속 쌓여갔다.

△ 주간 아하키히. 표지는 작가 월랑스키의 그림이다. / ≪ 만화 말고 다른 책도 읽을 수 있는 독자들이 읽는 유일한 만화잡지, 월간 샤흘리 ≫. 월간 샤흘리에는 스누피나 크레이지 캣 같은 미국 클래식 만화도 소개되었으나 당시의 많은 유럽 만화가들이 참여했다. 이 이 표지는 작가 Pichard(피샤 1920~2003)의 그림이다.
△ 이태리 작가 Crepax (크레팍스, 1933~2003)의 Valentina. 프랑스에서는 68년부터 월간 아하키히, 70년부터는 이어서 월간 샤흘리에서 연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