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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제 漫步만보_ 원로 만화가 순례 ④ 사이로

시적 운율과 영상미를 카툰이라는 장르를 통해 구현하기 위해 50여년을 매진해온 사이로’ 선배를 만났다. 사이로 작가는 일반인은 물론 만화계의 동료들도 조차도 난해해마지 않는 그야말로 두리뭉실한 ‘카툰 작법’을 구사하는 창작자이다. 흔히들 ‘만화는 소설, 카툰은 시’라고 비유하곤 하는데, 그의 작품은 그야말로 화폭에 담긴 한편의 시와 같다.

2017-06-04 조관제




미술 선생님 ‘한성철’의 영향으로 만화에 눈을 뜨다.

시적 운율과 영상미를 카툰이라는 장르를 통해 구현하기 위해 50여년을 매진해온 사이로’ 선배를 만났다. 사이로 작가는 일반인은 물론 만화계의 동료들도 조차도 난해해마지 않는 그야말로 두리뭉실한 ‘카툰 작법’을 구사하는 창작자이다. 흔히들 ‘만화는 소설, 카툰은 시’라고 비유하곤 하는데, 그의 작품은 그야말로 화폭에 담긴 한편의 시와 같다.

1965년 ‘아리랑’잡지에서 ‘귀로(歸路)’로 데뷔 한 ‘사이로’는 ‘생소했던’ 카투니스트의 길을 개척하며 꾸준히 걸어 왔다.
삼척시 도계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이로는 중학교 시절 미술교사 한성철을 만나면서부터 만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잘 그린 풍경화나 인물화가 아닌 간단하면서도 메시지가 정확한 교사 한성철의 만화풍 그림에 크게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한성철 선생은 시험 감독으로 들어온 교실에서 컨닝을 하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말로써 전달하는 대신 칠판에다 간략한 만화로 그려서 표현하곤 했는데, 이런 그림들은 학생들의 주위를 단숨에 환기 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철부지 미술반 친구들은 한성철 선생은 그림을 못 그리는 미술 선생님이라고 빈정거리기도 했었지만 어린 사이로에게 그의 그림은 너무나 매력적인 예술 작품으로 다가왔었던 것이다.

한성철 선생은 짧은 교편생활을 접고 그 이후 서울에 있는 모 경제 신문사로 이직을 하게 된다. 연재만화를 즐겨보던 사이로는 여러 잡지를 통해 이제 교사 한성철이 아닌 열정적인 전업 작가로 활동하게 된 만화가 한성철을 자주 접하게 된다. 사이로의 중학교 어린 시절 은사 한성철은 이제 당대의 인기 만화가 고바우 김성환, 두꺼비 안의섭, 너털주사 신동헌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들과 함께 릴레이 만화에 참여하기도 하고, 서울신문에서는 가정 만화 <털털이>도 연재하게 되었다. 아마도 존경하는 미술 선생님 ‘한성철’의 이런 인생 역정이 어린 사이로를 만화가의 길로 이끌어낸 것이 아닌가 미루어 짐작해본다.

사이로는 우연히 우리 시대의 카투니스트 중 가장 독특하고 개성적인 카툰을 발표하고 있던 미국의 유명한 카투니스트 ‘솔 스타인버그 (1983, Saul Steinberg)’의 작품을 처음 접하면서 유머와 해학이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타인버그의 카툰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 매력에 빠져들었던 사이로는, 신문만화, 네 칸 만화, 만평까지 모든 카툰이 그의 관심 대상이었으며, 카툰의 범주로 모든 것을 소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이조차도 귀한 궁핍한 시대였었지만, 넉넉한 집안 환경 덕분에 부담 없이 남보다 많은 종이를 구할 수 있어 좋아하는 만화 습작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때 사이로가 만화공부에 몰두하여 습작한 종이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 수준의 분량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존경받는 카투니스트로 사이로를 만든 것은 그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작가가 아니라 이런 습작기에 가진 카툰에 대한 열정과 노력 덕분이라고 노작가는 말하곤 한다.

당시 일간신문사에는 독자 만화 투고란이 유행이었던 시절이었는데, 1959년 대학 1학년 때부터 사이로는 자발적으로 주제를 기획해서 <동아일보> 독자란에 ‘이고산(李古山)’ 또는 ‘용명’으로 이라는 필명으로 번갈아 사용하면서 투고를 한다. 초창기의 독자 투고란 성향은 가정, 생활 만화 장르가 주류를 이루다가 차츰 시사만화로 바뀌었지만, 아이디어이든 그림이든 자신이 있었던 사이로는 그저 부지런하게 작품 투고를 했다고 한다. 그의 열정적인 활동은 서울신문 시사만화 <까투리 여사>의 작가 고 윤영옥이 쓴 <한국신문만화사>에도 신문 독자 투고란의 주요 인물로 언급되어 있을 정도이다.

서울로 유학 온 사이로에게는 독자투고 활동은 만화수업을 겸한 반 아르바이트였다. 그 당시로서는 원고료가 꽤 많은 편이어서 그때 받은 원고료로 친구 3~4명과 함께 극장도 가고 짜장면도 사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한다. 신문사에서 보낸 원고료를 소액환으로 받으면, 학교에서 가까운 왕십리 우체국으로 가서 환전을 하는데 그때마다 창구에 앉은 담당 여직원은 사이로를 잠시 기다리게 한 다음, 손을 베일 정도의 빳빳한 새 돈으로 일부러 골라 바꿔 주면서 ‘축하 한다’며 응원했었다고 한다.

가짜 이고산(李古山)까지 등장할 정도의 인기 신문투고만화가.

그 무렵의 사이로에게 어느 날 독자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다방에서 만난 그 애독자는, 만나자 마자 대뜸 자기가 아는 ‘이고산’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이가 알고 있던 가짜 ‘이고산’은 사이로가 투고한 작품들을 ‘진짜’보다 더 착실히 스크랩을 해서 가지고 다니며 진짜 행세를 한 것이다. 이렇게 사이로의 작품은 ‘가짜’ 이고산까지 나타나, 영남 일대를 돌아다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전국의 만화 지망생들에게 이미 많이 알려진 유명 인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이로가 데뷔할 시절에는 만화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대본소용 단행본 인기 만화가’가 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 방향으로 진출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 보편적인 추세였다. 그러나 그는 신문 투고만화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대본소 만화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아,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김산호 작가의 ‘라이파이’조차도 몰랐을 정도로 자기만의 작품 세계에 빠져 있었다.

사이로를 동료 만화가들이 대단히 건방지게도 볼지도 모르겠으나 자신은 ‘사진 찍듯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싫었었다고 스스로를 평가하곤 한다. 내가 그린 그림에 나만의 유머와 나만의 해학을 담는 일이 더 값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이로는 카툰을 그리는 것 외, 극화를 그려보자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이런 그의 만화 철학에 대해 함께 오랫동안 카툰 활동을 한 동료 ‘김마정’은 기존 만화계에서 거론도 되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만화계에서 큰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은 만화계의 생리를 비춰볼 때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닌가 하고 평가한다.

사이로의 부친은 자유당 시절에 민선 도의원을 지냈고 삼척, 도계 근동에서는 산부인과 내과의로는 알아주는 소탈하고 인심 좋은 ‘명의’였었다. 그런 집안의 아들이 서울로 유학을 가긴 하였으나 취직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만화라는 걸 하겠다고 하니 부친은 물론 형제들까지도 극구 반대를 했다고 한다. 사이로의 학력과 배경이라면 번듯한 기업의 직장인이 되어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배고픈 ‘그림쟁이’가 되려고 했으니 당연히 집안의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필명을 ‘사이로’로 바꾼 이유

평범한 직장인이 될 것인가? 인기 만화가가 되기에는 늦은 나이에 돈벌이가 되는 ‘극화’도 아닌 생소한 카툰을 그릴 것인가? 두 갈래길 ‘사이로’ 방황하는 사이로에게 그의 모친은 ‘한 번 뿐인 인생, 네가 하고 싶은 건 하라’며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셨다.

만화를 보는 것만 해도 ‘불량하다’고 여기던 시대적 정서를 생각해보면 모친의 든든한 후원은 작가 사이로를 만들어낸 결정적인 환경 중의 하나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사이로라는 그의 필명에는 자연인 이용명으로서 짊어져야 할 두 가지 고민이 담겨 있다. 생활인과 예술인 사이를 오가며 ‘만화의 길’에 충실하고 인간으로서의 길도 잘 살아내고 싶은 그의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신인 작가 사이로는 그 시절 만화가 지망생들이 데뷔를 할 수 있었던 대중지 <사랑> <아리랑> 등에서 출발을 했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청탁을 한 주간신문, 전우신문 등에서부터 1976년부터는 일간신문 <영남일보>에서 시사만화와 만평을 담당하며 서울지사에 매일 출근하면서 5년간 활약을 했다.

일주일에 70여 작품 수준의 청탁이 쏟아질 정도로 그의 인기는 날로 상승했다. 그의 전문 영역인 카툰을 많게는 2페이지부터 네 칸 만화, 한 칸 만화 등을 주간지 월간지 그리고 전문지에서 청탁을 받았다. 그의 재능을 알고 부산 <국제신문>에서는 정규 직원 화백으로 초빙을 하기도 했었지만 신군부시대의 언론 통폐합 정책 때문에 두 달 만에 실직을 하기도 하는데, 사이로로서는 최초의 직장 생활이 될 뻔 했었지만 두 달로 끝이 난 것이다.

그러나 사이로의 작품은 워낙 수요처가 많아 카툰 활동만으로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만한 규모가 되었으나, 모든 문화 예술인들을 힘들게 했던 IMF 사태를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와 인생고락을 함께 했었던 많은 매체들이 IMF를 계기로 폐간 또는 휴간을 하게 되고 작가 사이로의 자리도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수시로 닥쳤지만 카툰에는 ‘마약’처럼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렇지만 사이로는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마치 동면하듯, 안 쓰고 지내면서도 결코 카툰 외의 것은 생각하지를 않았다. 초창기에는 갈등도 많았지만 카툰에 입문해 외길을 걸으면서 선택에 대한 후회를 한 적은 없다. 그래서 사이로는 처음 마음 작정한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이로가 해외의 카툰 작품과 작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일본 ‘요미우리신문’에서 주최하는 <국제만화전> 2회 때부터였다. 매회 투고한 작품이 여러 번 입선을 했고, 87년에 심사위원들이 주는 ‘특별상’을 수상한 다음부터 그만두었지만 ‘요미우리 신문’에서 노출된 사이로의 작품을 접한 캐나다, 벨기에, 터키 등지에서 작품 의뢰가 쏟아졌다.

당시 만화계에서는 외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지 못하던 때라 활발하게 활동한 작가는 사이로가 최초가 되는 셈인데, 카툰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유고슬라비아, 터키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을 정도다. 세계적인 만화 잡지 ‘위티 월드 Witty World’ 에서는 창간호부터 한국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국 카툰을 해외에 알리기도 했었다.

한국 최초의 카툰 단체 <서울카툰회> 창립을 주도하다

평생을 카투니스트로만 살아 온 사이로는 후학들을 위한 사명감으로 뜻을 같이하는 만화가들을 규합하여 1990년 초 김마정, 원만희, 조관제, 강창욱, 서서영, 오영식, 강동헌, 이해광, 김정진, 조기영, 강일구 등과 함께 주축이 되어 <서울카툰회> 결성을 준비 한 다음 1991년 4월 마포 아현동 작은 사무실에서 창립을 했다.

‘생계수단으로만 그리는 것이지, 카툰에 대한 치열함에 도전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럽다’라고 말하는 일부 동료들의 가치관에 대해 사이로는 크게 실망도 했다. 작가로서의 ‘겸손’이나 ‘엄살’인지는 몰라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툰에 대한 정열 하나로 버티어온 사이로는 ‘먹고 살기 위해’ 카툰을 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모독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로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좋다 나쁘다’에 대한 평가에 대해선 뭐라고 해도 감수를 하겠지만, 카툰에 대한 정열은 그 누구한테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자부심으로 산다.

2004년 첫 개인전 이후, 매년 책을 내거나 전시를 열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성실히 지켜오고 있는 사이로는, 마땅히 작품을 발표할 만한 지면도 전무하고, 수요도 없는 상황에서 대중과의 활발한 소통을 통해 카툰을 향유하는 독자들을 위해 문턱도 낮추고, 잊히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하루에 한 편 꼴, 1년이면 300편이 넘는 작품을 탄생시킨 사이로는 한국 카툰계에서는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을 만큼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중이다. 그가 이렇게 열심인 이유는, 소설가다 시인이다 하면서도 1년에 한 편도 안 쓰는 사람이 후배들을 나무랄 수 없듯이 스스로 실천해야 후배들한테도 큰소리칠 수 있다는 프로정신 때문이다.

사이로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서정카툰’은 고향 동네 ‘도계’의 그림 같은 풍광, 아버지의 왕진가방과 낚시도구, 왕진료 대신 받은 광 속의 곡식 등에 대한 기억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강원도 촌놈 출신답게 눈여겨보지 않는 자연을 관조하며 녹여, ‘자연이 사이로고 사이로가 자연’이 되도록 표현하며, 간략한 선으로 이심전심의 의미로 바쁜 현대인들에게 주막 같은 쉼표로 고단한 마음을 보듬어 준다.

카툰이건 다른 무엇에서건 사이로는 답답한 걸 싫어한다. 꽉 차 있고 숨 쉴 틈 없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고나 할까. 사이로는 언제나 시원스럽게 그리려고 노력하고, 무조건 화면을 비우기보다는 치밀한 계산 안에 여백을 남긴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볼지 모르지만 그의 작품은 일부러 작정하고 비운 ‘여백’이 특징이다. 여백이란 표현을 하고 어쩔 수 없는 남는 빈 곳이 아니라, 공간을 먼저 생각하고 그 공간들이 화면을 지배할 때 그 공간을 여백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끝없이 변하고 새롭게 도전하는 사이로의 ‘카툰 세계’

국내외 만화 이론서는 많지만 유난히 카툰에 관한 이론은 정립되어 있지 않아 안타까움을 느끼던 사이로는 국내외 작품과 작가들을 분류하여 ‘선(線)’과 ‘아이디어’ 별로 열심히 목록을 만들고 자료를 모아 정리해서 교재 <카툰의 길>을 출간 했다. 카툰이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보일 수 없을까 하고 시도한 ‘카툰 목판화’로 새로운 영역을 찾는 시도를 해서 전시회를 열어 호평을 받기도 했다.

‘종이를 떠난 카툰’이라는 주제로 카툰 입체 작품전도 생각 중이라는 사이로는, 헝겊, 토기, 널빤지 등 다양한 소재로 구성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모으며 나날이 진화 중에 있다.
"나는 아침에 한 가지씩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작품 제작이란 자기 희열"이라는 그의 고백처럼 ‘좋아서 매달리는 자’로부터 혁명은 저절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느꼈다.

지금은 웹툰작가 양성 전문학교로 명성이 높은 <청강문화산업대학>이 초창기 만화 창작과를 개설했을 때, 카툰을 이해하고 존중했던 학과장 손기환(현 상명대학교) 교수가 나이 육십이 넘은 사이로를 교수로 초빙해서 5년 동안 학교에 근무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의 직장생활이다.
그때 함께했던 손기환 교수를 비롯 박인하, 모해규, 최호철, 홍윤표 교수 외 젊은 교수들의 존중과 함께, 당시 이수형 총장의 전폭적인 지지로 마음껏 카툰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던 일에 대해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만화를 좋아했고 특히 카툰을 좋아했던 이수형 총장은 집무실에 사이로와 동료 카투니스트의 카툰을 걸어 둘 정도로 좋아했던 후원자였다.

카툰으로 표현되고 담겨진 아이디어는 흔치 않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카툰의 발상은 끊임없는 노력과 심오한 의식을 가진 위대한 작가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극화에 비해 늙어도 그릴 수 있는 장르가 카툰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라고 주장한다. 생활을 위해 직장을 다니는 것은 시인들이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처럼 카투니스트들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생활이 되지 않아 스스로 그만 둔 동료들도 많은데, 직장생활 하면서도 카툰 작업을 꾸준히 하는 후배들에게 대단하다며 응원을 보낸다.


진정한 카투니스트라면 카툰 작업을 하루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이로는, 다른 일에 매달리느라 카툰을 완전히 잊고 지내는 이들을 카투니스트라 인정 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52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루 한 작품의 원칙을 지키며 창작에 매진하여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꾸준함이 첫 번째요!”, “여백의 미를 강조하며 비우는 것이 곧 채우는 과정이다. 간결함 속에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아낸 사이로 표 그림체가 그 두 번째요!”, “일상의 소재를 서정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게 하는 대중성이 그 세 번째” 라는 사이로 선배의 철학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돈 따위는 꿈의 실현에 비교 될 수가 없지.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해서 거절당하는 걸 취미로 실험을 한 에피소드인 “지아 장(Jia Jiang)의 <거절당하기 연습> “이란 책을 읽고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거절을 당하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해서 새로운 도전을 위해 준비 중이다.


젊었을 때는 체면 때문에 부탁을 못했고, 거절당했을 때는 서글프기도 했던 기억도 남아 거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이로이지만, 그 내용을 읽다보니 그런 일도 즐길 수 있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면전에서 거절당하는 민망했던 시대보다 인터넷을 활용하면 훨씬 부담도 없을 것 같아 ‘거절당하려고’ 영문 이력서를 준비했다. 다시 유럽과 미국, 일본 등 카툰을 존중해 주는 선진국에 작품을 보내려는 준비를 하며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준비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카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글이 있어야만 책으로 인식하는 ‘지성인’들의 무지에 대한 반동으로 캡션이 한 글자도 들어가지 않는 순수 카툰집을 자비를 들여서라도 고급스럽게 출간하여 본때를 보여 주고 싶고, 카툰 독자들의 저변 확대를 위해 징검다리 역할도 해야 하고, 후배들에게 좋은 카툰을 그릴 수 있도록 참견해야 하고..., ···하고..., ···하고... 해야 할 많은 일 때문에 좋아하는 바둑 두러 기원에 들르는 기회마저도 뜸한 요즈음 이다.
뿐만 아니다. 카툰 작업을 하면서 언뜻 언뜻 스치는 생각을 소설로 써 보는 취미도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의 글쓰기라면 장편 소설이나 단편 소설을 생각 하겠지만 사이로의 글쓰기는 꽁트보다 짧은 A4 한 장 정도에 들어 갈 ‘한 뼘 소설’로 그 동안 써놓은 작품을 출판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을 담은 사이로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나잇값을 한다는 것이 결코 나이가 들면서 그냥 따라오는 부산물이 아니라, 힘겹게 얻어낸 성취임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인간답게 늙어가는 집안 어른 같은 사이로를 보며 후학들이 더욱 그를 존경하는 것이라 믿는다.

스케치 북을 펼쳐 놓고 펜을 잡으면 카툰이 저절로 완성되어 나를 쳐다보고 묻는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드느냐?"고... 그러면 나는 "좋다"라는 대답으로 서명 한다’라고 말하는 사이로! 그가 카툰을 사랑 하듯이 이제는 카툰이 사이로를 사랑하기 시작한 모양이라는 말을 하는 그의 자부심을 통하여, 사이로 카툰으로 카툰 문화를 향한 대중들의 안목이 눈 뜨는 계기가 되고 카툰의 위상이 더 한층 높아질 수 있도록 후배들도 열심히 따르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만 하고 헤어졌다.

사이로 史二路 (본명 : 이용명)

1940년 강원도 삼척 생
삼척 도계 초등학교 , 삼척중, 삼척공고 졸업
1963년 한양대학 법정대 졸업
1965년 “아리랑” 잡지에서 ‘귀로’로 신인 만화상 수상.
1970년 영남일보, 국제신문에 카툰 연재.
주간경향, 스포츠동아, 신동아, 스포츠서울, 조선일보 등에서 카툰 연재.
1979년 카툰 국제 공모전에 다수 입선.
1987년 일본 요미우리신문 주최 국제만화전에서 특별상 수상.
1991년 국내 최초 카툰작가모임 서울 카툰 회장 선출.
1995년 ‘사이로 카툰집’ 전4권 발간
2000~2005년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사)한국카툰협회 회장
2003년 카툰집 <사이로 여행기> 만화애니메이션학회 만화저작상 수상
2004년 부천국제만화축제 카툰부문 만화상 수상
2005년 만화가협회 공로상 수상
2006년 PISAF 교육부문 공로상 수상
2009년 제9회 고바우 만화상 수상

저서 : 무풍대, 조가비양, 움직이는 산(전3권), 물구나무로 본 세상, 반칙 게임, 하늘 찌르기, 사이로 여행기, 꿈꾸는 선, 카툰의 길(카툰 교재) 외 다수.
전시 : 개인전 사람과 사람 사이로 외 9회, 단체전 70여회
현재 : (사)한국카툰협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