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온 편지: 2021년 ‘그래픽 스토리텔러’ 보고서와 한국의 ‘웹투니버스’
2021년, 한국의 웹툰 플랫폼들이 새로운 성장기를 맞았다. 1조원 가량의 인수전이 펼쳐진다는 뉴스가 나오는가 하면, 단일 NFT(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능토큰) JPG 파일 하나가 수백만 달러를 호가하던 때, 호주예술가협회(Austrailia Council for the Arts, ACA)는 56페이지 분량의 <직업으로서의 그래픽 스토리텔러: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Storytellers at Work: Cross-industry opportunities for cartoonists, illustrators and comics-makers)라는 보고서를 펴냈다. 호주의 정부발 예술기금을 관리하고, 예술가와 예술단체를 위한 자문기구인 호주예술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다양한 방식에 대한 새로운 산업 인식과 ‘그래픽 스토리텔러(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등)’의 직군간 교차문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호주의 시드니 공과대학(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와 멜버른 대학(University of Melbourne)과 로열 멜버른 공과대학(Royal Melbourne Institute Technology University)의 학술연구원이 공동으로 작성한 이 보고서에서는 주요 창작산업과 기업, 기타 업체들의 실무자들을 인터뷰했다. 디자인, 시각 커뮤니케이션, 창작 분야는 물론 만화가, 작가, 그래픽 노벨 제작자 등 다양한 분야의 의견을 종합해 새로운 인사이트를 제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럼에도 <직업으로서의 그래픽 스토리텔러> 보고서에서는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웹툰산업, 즉 국내외 디지털 만화의 창작과 유통, 소비 붐의 원동력을 살펴보는데는 실패했다.
웹툰 산업을 간과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아직까지 호주에서 웹툰을 비롯한 디지털 만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부족하다는 점을 반증한다. 창작자가 주도하는 웹툰은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 모두에게 생산적인 활로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그래픽 스토리텔링’ 분야에서 최근 가장 빠르게 판도를 변화시키고 있는 주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웹툰이 왜 이 보고서에서 빠졌는지는 수수께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고서는 한국의 독자들과 공유할 가치가 있는 흥미로운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업계 종사자 260명을 대상으로 설문, 인터뷰, 법률, 정신건강, 노동조합 등의 분야 사례연구를 바탕으로 조사해 발간된 <직업으로서의 그래픽 스토리텔러>는 호주 만화 창작환경의 당대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전통적 코믹스 산업’이 아닌, 내부 지향적인 ‘그래픽 스토리텔러 공동체’의 일부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보고서를 통해 동시대 산업계 종사자들이 공유하는 주요 관심사 중 일부를 기록하고, 문서화했다는 점이 특기할만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호주 내 인쇄물 및 디지털 만화 시장의 규모가 비교적 작고, 밀착되어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골 마을’과 같은 분위기인 셈이다. 이러한 요인들은 호주의 실무자들이 만화업계 종사자로서 직업의 기회를 탐색할 때, 비슷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실무자의 생계에 대한 주요 과제로는 재정적인 문제, 노동시간, 유급노동 시간, 출판의 기회, 정부의 예술기금이나 만화, 삽화, 창작에 대한 공공 지원이 모두 포함됐다(보고서 24페이지). 물론 한국의 만화-웹툰 창작자 역시 아마추어 단계에서는 비슷한 문제들에 직면해있다는 점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l 보고서가 보는 호주 만화계는 ‘활황’
보고서에서는 ‘그래픽 스토리텔러 커뮤니티’의 형태와 방향을 간략히 정리해 인구 통계, 재정과 교육현황, 호주의 노동자들의 현황을 통한 ‘모범 사례’를 탐구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보고서에서는 그래픽 스토리텔러가 일반적으로 25년 이상 경력을 가진 베테랑과 지난 2년 이내에 경력을 시작한 신입사원이 비슷한 규모로 파악됐다. 응답자 중 거의 절반 이상은 이 분야에서 10년 이상 근무했고, 단순히 만화를 제작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실무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25페이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보고서에서는 ‘디지털’이나 ‘온라인 콘텐츠’ 등의 용어는 지나가는 말로 언급하고, 그 다음 소프트웨어와 장비, 이미지를 개념화하고 모델링하는데 필요한 관련 기술, 그리고 학습 요구사항 등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놀랍게도 ‘한국’과 ‘아시아’라는 용어 또한 보고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 호주에서는 수백만의 열성 팬들이 그래픽 노블이나 만화, 그리고 웹툰을 쉴새없이 소비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마도 연구원들은 글로벌 트렌드에 맞춰 디지털 및 소셜미디어 엔터테인먼트 플랫폼 산업 전반에서 일하는 정통한 실무자들을 인터뷰하고 조사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에서 드러나는 제한된 관점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유야 어찌 됐건, 한국 밖의 실무자들은 웹툰에 대해 이미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제작에 나서고 있다. 글로벌 확장을 본격적으로 이뤄내고 있는 웹툰이 디지털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성장하고 있다는 말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웹툰과 디지털 만화영역에 대한 신호를 무시하고는 있지만, 이 보고서에서는 그래픽 스토리텔링, 만화 제작, 삽화, 만화 창작 분야에서 지속가능한 커리어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가정하에 호주인들은 다른 나라의 예술가 지망생보다 이 산업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보인다.
조사 대상 실무자의 약 25%가 전업, 즉 소득의 100%를 창작으로 벌고 있고, 이 중 43%는 이른바 ‘고소득자’로 10만 호주달러(한화 약 8천 7백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건 한국에서 웹툰 산업이 보여주는 작가들의 평균소득보다도 높다. 전체적으로 봐도 약 상위 1%가 올리는 수익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만화가 지망생들은 보통 낮에는 일하고, 밤에 창작활동을 하는 겸업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만화시장의 규모를 생각했을 때, 로열티, 정부 보조금이나 상품으로부터 창출되는 부가수입 역시 적을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이 보고서에서는 프랑스, 일본과 같은 국가에서는 ‘일반적인 문화 형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호주에서는 만화 제작이 아직 ‘음지의 관행’으로 여겨진다고 이야기한다(7페이지). 하지만 호주의 입장에서 한국 역시 만화를 ‘일반적 문화형식’으로 여기는 국가다. 물론 아직까지 저소득 위주로 시장이 편성되는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았지만, 전세계적으로 그래픽 스토리텔러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다.
l 호주만화가협회, 보고서 내용에 “현실과 다르다”
호주만화가협회의 일부 회원들은 이 보고서에서 산업 현황에 대해 그다지 매력적으로만 들리지는 않는, 최소한 보고서에 앞서 밝힌 것 보다 덜 낙관적인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많은 경우 창작자들이 다른 직업을 알아보거나,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이 실질적인 창작 지속 방법이라고 말한다. 호주만화가협회는 1924년 설립된, 아마도 가장 오래된 단체로 알려져 있다. 보고서 발표 며칠이 지나지 않아 많은 회원들이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서 보고서 발표 내용과 다르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아래는 호주만화가협회 회원들의 코멘트를 번역한 것이다.
“보수가 좋고 수요가 많다”니, 정말인가? 입금된 금액은 그렇지 않은데.
“최근 10년동안 최고 불황인데? 젠장,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고요.”
“인생은 롤러코스터와 같죠. 근데 왜 우리는 놀이동산에 갔어야 했을까요? 곧 좋아질 거라는 말만 할 거라면 말이죠.”
“보고서에 나온 10만 호주달러 이상 버는 사람들이 누군지 모르겠네. 제발 누군지 좀 알려주세요.”
“이 리포트의 결과는 두가지를 모두 포함하네요. 다른 산업에서 돈을 벌기 위해 만화를 하면서 취득한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고, 1/3의 만화 인구는 가난하다.”
“잘나가는 웹툰작가 한명 아는데, 이 사람들이 ‘호주 만화가’라고 밝히지 않는데 이런 설문조사에 참여는 했을지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이 보고서를 보고 ‘이제 나는 만화가가 아니야’하고 인정해야 될 시기가 궁금해졌어요. 그래픽 산업 촉진, 좋죠. 근데 그래픽 디자인은 같은 기술을 사용해도, ‘만화 창작’이라고 볼 수는 없잖아요. 만화를 만들지 않는데 만화가인가요.”
“보고서는 만화가들이 돈을 많이 버는게 사실이라고 하죠. 아, 뭐 그 사람들이 아주 가끔 만화를 만들 수는 있겠죠. 만화가가 된다는 것과 만화를 가끔 그린다는 건 아주 다른 문장이잖아요. 이전에 만화를 보던 관점과 완전히 달라진 것이 보입니다. 만화가 새로운 분야를 접목시키기에 아주 좋다는 건 알겠네요.”
이러한 논평에서 절망과 희망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호주의 낙관적인 그래픽-만화 산업의 풍경에 대한 반응으로 표현된다. 또한 작가들은 만화 커뮤니티가 훨씬 넓음에도 불구하고, 만화 커뮤니티의 아주 작은 부분만 포착했다고 비판했다. 일부 작가들은 “NFT를 발행해서 6,900만 달러에 팔기만 하면 된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 만화를 포함한 그래픽 스토리텔링 산업이 활황이지만, 호주에서는 보수가 좋고, 꾸준히 일거리가 있고, 현재 진행중인 만화 관련 직업이 제한되어 있다. 호주의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완전히 디지털화되고 글로벌한, ‘앱’이 지배하는 웹툰 산업의 수용이 너무나 더디다는 점, 그리고 호주 콘텐츠 산업의 수용력이 낮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업계도 따라잡아야 할 과제가 산더미다. 호주만화가협회 정관에서는 신문, 잡지, 제작사 등에서 일하는 만화가와 캐리커쳐, 일러스트레이터, 애니메이터, 디지털 아티스트는 전문적으로 종사해야만 정회원 자격이 주어진다. 결국 전업 작가가 아니면 협회 가입 자격조차 없는 셈이다. 고용과 재취업이라는 측면에서 웹툰 산업과 창작자 주도의 디지털 만화산업이 초기 단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부분의 웹툰 작가들은 가장 오래된 협회에 가입할 조건조차 달성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때문에 산업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조차 못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호주 시장이 낙후되어 있긴 하지만, 실행가능한 직업 선택의 기회로 가득 차 있다고 강조하지만, ‘그래픽 아티스트’의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극소수의 일부 실무자들에게만 기회가 열려있는 셈이다. 물론, 향후 전세계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만화 창작에 필요한 비유, 비유를 적용하기 위한 관찰과 소통, 공감능력 등의 복합적인 기술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보고서에서 밝힌 바 대로, 그래픽 스토리텔러가 복잡한 메시지를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들은 커뮤니케이션, 스토리텔링, 전략적 사고와 시각적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고, 보건, 의료, 사회 안전망은 물론 교육과 같은 비 예술 산업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따라서 그래픽 스토리텔러의 가장 좋은 ‘취업 가능성’은 성공의 기회로 연결되지만, 만화산업과는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이 보고서에서는 호주처럼 만화가 아직 창작산업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음지 산업’ 처럼 여겨지는 곳에서 실무자가 ‘그래픽 스토리텔러’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논의하는데 도움을 준다. 호주 전역의 실무자들이 아주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디지털 만화 시장(즉, 웹툰과 다국어 서비스)에 대한 인지도를 넓히고, 동시에 디지털 경제 성장이 제공하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기를 기대한다.
떄문에 이 보고서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향으로의 작은 발걸음이며, 디지털 만화 시장의 잠재력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펴낸 <한국의 웹투니버스와 디지털 코믹 레볼루션>(2021)은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분명한 건, 웹툰 산업이 전세계 창작산업의 확고한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고, 이 주제에 대한 연구가-호주와 같이 만화가 아직 확실히 자리잡지 못한 곳에서도-필요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