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장르, 비평과 일상 사이의 거리감
로맨스 장르는 과연 여성들의 장르일까? 이러한 정의는 자연스러운 사실인 듯하면서도 동시에 강력한 편견이기도 하다. 이처럼 뭐 하나 정의하는 일 자체가 복잡한 로맨스 장르에 따라붙는 전통적이고 일상적인 평가로는 ‘뻔하고 유치하다는’ 말이 있다. 이때 특히나 유치하다는 평가는 여성들이 로맨스를 즐기는 건 이야기 속 남자 주인공 같은 남자를 만나길 상상하고 원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그런가 하면, 로맨스 장르는 제법 오래전부터 페미니즘 문화비평의 주제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의견은 양쪽으로 갈린다. 한쪽에서는 여성이 성적으로 억압을 겪고 있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욕망을 그리는 장르라는 점에서 로맨스 장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다른 쪽에서는 여성을 남성에게 성적으로 종속시킬 뿐만 아니라 그걸 낭만화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로맨스 장르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평생을 로맨스 소설을 읽어온 독자이자 여성이다. 기실 내게 최초의 소설은 귀여니의 인터넷소설이었으며, 로맨스 소설뿐만 아니라 순정만화, BL 소설, 팬픽 등을 지금껏 다양하게 읽어왔다. 이런 나는 앞서 언급한 의견들을 접할 때면 이 말도, 저 말도 어느 정도는 다 일리가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로맨스 소설을 읽는 내 일상은 그런 말들이 가진 크기와 넓이에 빗대어보자면 사실 굉장히 작게 느껴진다. 작기만 한 게 아니라, 그러한 말들과 달리 로맨스 장르를 향유하는 나의 삶은 그다지 일관되어 있지가 않다. 오히려 이것저것 굉장히 복잡하게 엉켜 있다. 그래서 그 말들과 내 일상 사이의 거리가 끝내 꽤 아득하게 느껴지곤 한다.
△ 그림 ‘로맨스’ 하면 떠오르는 장면. 사실 이정도면 보통의 일상과도 거리가 있지 않나?
이 글은 그 아득한 거리감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로맨스 장르는 과연 “여성서사”인지 아닌지 혹은 로맨스 장르는 여성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 하는 질문들이 다시금 부상하고 있는 국면에 닻을 내리고 있다. 그러니 그곳에 나름대로 참여해보기 위하여 먼저 작고 일관되어 있지 않은 내 로맨스 독서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작고 일관되어 있지 않은 내 로맨스 독서사
10대 시절의 내게는 이성을 좋아하는 일과 연애하는 일 모두가 삶의 청사진으로 한치 흔들림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 이때 나는 분명 로맨스 소설을 ‘가장 정석적으로,’ 즉 여성들은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그런 사랑을 하기를 꿈꾼다는 말을 딱히 편견 아닌 것으로 만들면서 읽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로맨스 소설은 유치하다는 말과 충돌할 일 없게끔 알맞게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독자층 안에서도 적장자를 자처할 수 있었던 그 시기엔 이것저것 신나게 읽었더랬다.
그런데 20대에 막 들어서면서 로맨스 소설을 읽는 시간이 조금 모습을 달리하게 되었다. 연애를 꿈꾸던 나이에서 연애를 실천할 수 있는 나이로 진입했는데, 들어와서 보니 내게 연애란 ‘해선 안 될 것’이 되어 있었다. 그건 그 시절 내가 내 삶의 화두가 나의 부모임을 깨닫고선 내 삶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비틀려 있는지를 알아채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가족의 대들보가 되어야 하는 입장에서 연애와 같은 개인적인 일에 시간을 할애하는 건 내 삶이 뿌리째 흔들리는 일처럼 느껴졌다. 돌아보면 그 시간은 그것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무성애자(asexual) 정체성과 처음으로 만남을 시작하던 때였던 셈이지만, 곧바로 그 정체성을 주워 올리기엔 내 취미 생활이 내 성적 정체성을 내게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하게 확언해주곤 했다. 로맨스 장르를 어릴 때부터 줄곧 즐겨온 사람이라는 그 사실 하나로 나는 내가 이성애자 여성임을 그때까지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그때 나는 자신을 모종의 이유로 삶의 일부분을 잠정 파업 중인 ‘K-장녀’로만 여겼다. 그래서인지 로맨스 소설을 전보다 먼발치에서 몰래 지켜보듯 읽으며 두 주인공이 주고받는 이해의 감각에 기대어 내 ‘이상함(queerness)’을 달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들이 하는 ‘사랑’을 언젠간 꼭 한 번쯤 해야 내 이상함이 어느 정도 무마될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좀 더 나이를 먹고 나서, 나같이 이상한 사람들(즉, 퀴어들)이 제법 있는 공동체에 들어서게 되면서 내가 로맨스 소설을 읽는 시간은 또 한 번 모습이 바뀌었다. 연애를 하는 게 아닌데도 서로의 이상함을 어느 정도 알아보고 그걸 곧잘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이들과 지내게 되면서, 난 애초에 이해를 주고받는 일에 왜 반드시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형태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는지 그 전제 자체에 대해 질문하게 됐다. 그 질문과 만난 순간, 내 이상한 삶은 생각지도 못하게 안정을 찾았다. 그래서 이제는 로맨스 소설을 예전처럼 목을 축일 샘물을 찾듯 읽지 않는다. 소설 속 주인공들을 그저 구경하듯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나를 아예 분리하지도 않은 채로 그들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과정을 거치며 어떤 이유로 자신들의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는지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또한 사랑을 할 때도 손해를 보지 않는 게 중요한 요즘 세상에서, 내 살만 깎아 먹기 십상인 그 ‘사랑’을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마주하고 그 감정에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지를 들여다보는 게 요즘 내 독서의 즐거움이다. 로맨스 독자이자 여성이며 무성애자인 나는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남자와의 사랑을 꿈꾸진 않지만, 여전히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무언가를 위로받고 또 무언가를 이해받는다. 그리고 내 이러한 경험을 ‘로맨스 소설은 여성의 친구인가 아니면 적인가?’ 하는 질문으론 잘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로맨스 장르와 여성 독자 사이의 흔들거림
이 작은 역사 탐방기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건 한 사람이 로맨스 장르를 즐기는 일상은 이처럼 개인적인 정체성과 삶의 맥락,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적 자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분명히 내 여성이라는 성별 역시 내가 로맨스 소설을 읽는 데 적지 않는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내가 진공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아니라는 데 있다. 나뿐만 아니라 어떤 여성이 되었든 로맨스 장르를 향유할 때 그는 단지 여성이기만 한 그런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다양한 맥락과 사건과 이유가 나의(그의) 삶을 가로지르고 있는 만큼, 내가(그가) 로맨스 장르를 즐기는 경험은 아무리 여성이라는 정체성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일관적이지도 않으며 그 이유를 계속 달리한다. 나와 그는 ‘그냥’ 여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름과 얼굴과 몸을 가진, 매일매일 시간 속을 살아가는 여성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대중문화 영역에서 ‘페미니즘’은 첨예하고 긴요한 비평의 언어이자 도구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러한 가운데 소위 ‘여성서사’ 담론이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즉, 로맨스 소설이 여성서사인지 아닌지, 여성서사라면 어떤 점에서 그러하며 아니라면 어떤 점에서 그러하지 않은지, 로맨스 장르를 두고 무엇을 비평할 수 있으며 로맨스 장르를 향유할 때 무엇을 지양하거나 혹은 지향해야 할지를 묻고 답하는 말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로맨스 장르를 ‘여성문화’로 위치 지으며 페미니즘과 로맨스의 접점을 만들고자 노력해온 비평 작업을 밑바탕 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로맨스 장르를 향유하는 여성들은 ‘당연히’ 이야기 속 여자 주인공과 자기를 동일시하고 그에게 이입한다는 전제가 굉장히 자연스럽게 통용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말 자체를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여성들이 로맨스를 즐기는 경험이 마냥 그 말 같지도 않다는 게 중요하다. 바로 이 말을 하고자 앞서 내 로맨스 독서사를 쭉 풀어낸 것이다. 나는 10대 때는 로맨스 소설과 ‘당사자’로 관계 맺었지만 이후 나를 ‘위임자’로 새롭게 위치시켰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관찰자’로 로맨스 소설과 만난다. 그때그때 하나의 포지션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내가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 이 세 개의 포지션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포지션은 언제나 교차하고 교섭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로맨스 장르와 ‘나’, 여기선 특히나 로맨스소설 속 여자 주인공과 ‘나’ 사이의 거리는 계속해서 모습을 달리한다. 향유자 한 사람의 역사 안에서조차 그러하다.
△ 그림 <비포 선라이즈>(1996)의 명장면.
하지만 여성 독자와 이야기 속 여자 주인공을 별다른 의심 없이 평면적으로 1:1로 대응시켜버리면, 여성 집단의 실존에 관한 문제가 로맨스 장르 속 여성 주인공의 재현에 관한 문제와 한 치 틈 없이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렇게 되면 여성의 안전과 생존이 화두가 될수록 이야기 속 여자 주인공을 남을 밀쳐낼 수 있을 만큼 능력 있게, 사회경제적으로 독립적이게, 그렇게 ‘안전하게’ 재현하는 것만이 모범적인 여성서사로 자리 잡는다. 대중문화 영역에서는 그러한 전형을 기준 삼아 여성서사인 것과 여성서사가 아닌 것을 구별하게 되며, 로맨스 장르 속 재현이 그러한 기준에 어긋나거나 여성 독자들이 ‘어긋난 재현’을 읽고 즐기는 모습을 보일 때 그러한 현상을 설명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진다. 선택지는 둘로 좁혀진다. 여성이 로맨스 장르를 통해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이유로 긍정하거나, 로맨스 장르는 여성이 ‘왕자님’을 끊임없이 욕망하게끔 만든다는 이유로 부정하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로맨스 장르를 두고 페미니즘 비평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일례로, 로맨스 장르에서 자주 재현되고 심지어는 정당화되는 것 같기도 한 성폭력을 비평하는 것은 분명 유의미한 작업이다. 그러나 로맨스 장르를 향유할 때 여성 독자의 좌표는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그 좌표는 그때그때 바뀌고 있고 언제든 이동할 수 있음을 놓치지도 말아야 한다. 그 좌표들은 굉장히 잠정적이고, 따라서 불안정하며, 살아 움직이며 끊임없이 흔들거리고 있다. 그러니 ‘단 하나의’ 혹은 ‘근본적인’ 설명으로는 붙들어둘 수 없는 로맨스 장르와 여성 사이 그 흔들흔들한 거리감을 알아챈다면, 텍스트 자체만을 두고 그게 페미니즘적인지 반페미니즘적인지를 따져보거나 혹은 어떤 것이 여성서사가 될 수 있거나 될 수 없는지를 판별하는 일은 그리 긴급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로맨스 장르는 여성의 친구인가 아니면 적인가?’ 하는 질문을 재구성하기
그렇다면 여기서 이 글의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나는 로맨스 장르는 여성의 친구도, 적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로맨스 장르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모든 여성이 로맨스 장르를 향유하는 것이 아니며, 로맨스 소설을 향유하는 이들 모두가 여성인 것 또한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로맨스 향유층은 여성이 다수를 이루고 있으며(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거기서 로맨스 소설은 ‘여성문화’라는 호칭을 얻는다. 이처럼 생각보다 꽤 우연한 로맨스 장르와 여성 사이의 관계가 알려주는 바는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로맨스를 읽는 게 아니라는 것이며, 내가 로맨스 독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한때 자연스레 이성애자 여성으로 여겼듯 로맨스를 여성의 것으로 할당하고 로맨스와 여성을 자연스럽게 묶는 담론 안에서야 비로소 로맨스를 읽는 행위가 읽는 이의 여성됨을 인식하고 수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로맨스 장르가 본질적으로 여성이라는 성별과 관계 맺지는 않는다.
하지만 로맨스 장르를 여성의 친구로 생각하든 적으로 생각하든 간에, 그러한 인식은 로맨스와 여성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자연스레’ 전제하면서 바로 그 지점에서 여성이 로맨스를 읽는 행위에 의미를 해방적으로 또는 한계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한번 로맨스 장르와 여성 독자 사이의 흔들거림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앞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흔들거림을 묘사해보자면, 퀴어도 로맨스를 읽는다. 남성도 로맨스를 읽는다. 물론 이에 누군가는 ‘어쨌든 읽는 이들 다수가 여성이며, 퀴어나 남성이 로맨스를 읽는다고 해도 그 수는 비교적 소수에 불과하다.’ 하는 말로 답해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양적 추론이 과연 얼마만큼 정당화될 수 있는지와는 별개로, 이미 현상이 로맨스 장르는 ‘여성 공간’이라는 인식을 이탈하고 있다면 이때 필요한 건 ‘로맨스 장르는 여성의 친구인가 아니면 적인가?’ 하는 질문을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그 질문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까? 로맨스 장르라는 공간 안에 놓인 ‘우리’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여성과 로맨스를 하나로 묶는 담론을 기민하게 인지하면서 그 의미를 정치적으로 탐색하되, 그렇다고 해서 그걸 자연화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비평을 갱신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로맨스 장르를 이미 경계가 확고하게 그어져 있는 ‘여성 공간’으로 여기게 되면, 여성서사에 대해 논하고자 할 때 로맨스 장르 속 이미지와 서사적 재현의 흘러넘치는 다종성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그 다종성 앞에서 취약해지기 쉽고, 그걸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역시 쉬워진다.
다시금 말하지만 나는 로맨스 장르에 대한 페미니즘 비평이 필요하지 않다거나 로맨스 장르를 ‘무해한’ 장르라고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며, 나는 그러한 담론장 안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대어보고자 하고 있다. 왜 로맨스의 장르적 재현과 여성의 실존은 아예 혹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는가? 로맨스 장르와 여성이 자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 담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한다면, 장르에 대한 현재의 비평은 왜 로맨스 장르에서 당연하게 ‘여성’을 읽어낼 수 있다고 곧잘 여기는가? 그때 추출할 수 있는 ‘여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위치와 경험 안에 놓여 있는 여성을 이르는 것인가? 어쨌든 나 같은 퀴어 여성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로맨스 장르를 여성의 적 혹은 친구 둘 중 하나로 결정하려는 걸 넘어, 로맨스 장르와 여성의 관계를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로맨스를 읽는 여성의 위치와 경험을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상상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여성은 로맨스 장르 안에 거주해야 할 필요도 없고 그것을 거부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로맨스 장르와 여성 사이의 공간감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여기서 다시 한번 새롭게 발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