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무엇일까? : 웹툰작가가 본 장애와 편견
내가 어린이 집에서 근무할 때, 반 아이들에게 ‘장애’에 대해 설명하면서 장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햇님반 아이들은 생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하고 천진난만하게 그게 무어냐고 되물었다. 이 아홉 명의 아이들은 한국에서 4년 하고도 반 평생을 살아 오면서 장애인 한번을 마주쳐 본 적도, 장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길거리는 장애인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장애인들만의 왕국이다. 흠, 나는 눈앞의 하얀 백도화지 같은 이 아이들에게 ‘장애’를 어떻게 설명해주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26년 평생을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장애라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기억도,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마주친 경험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기껏 해봐야 눈을 가리거나 휠체어를 타보면서 신체적 장애의 불편함을 직접적으로 체험해본다던가, 그들을 길에서 마주치면 무조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는 둥의 전형적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이론적인 배려문화를 배운 것이 전부였다. 확실히 그런 내가 혼자서 아이들에게 장애교육을 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 사실 어른들에게도 장애인 차별과 관련된 교육이 필요하다 (출처: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그 날 오후,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나는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장애 관련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한 때 어린이 집 교사로서 말하건데,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그야말로 최고의 매개체이다. 시청 이후에 보호자의 부연설명과 이야기 나누기 시간을 가지는 등의 추가적인 교육활동이 덧붙여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어른에 비해 상대적으로 집중력이 짧은 아이들에게 애니메이션을 통한 교육은 단시간 안에 간단한 예시를 시각적으로 풀어 설명 함으로서 이해도를 높이고 비교적 쉽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장애라는 개념조차 알지 못하는 햇님반 아이들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의 교육용 애니메이션 컨텐츠가 무엇보다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밤새 유튜브를 뒤적거리며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찾았다. 그런데 웬걸, 아무리 찾아보아도 관련 애니메이션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도 ‘장애를 이겨낸 목이 짧은 기린이야기’가 전부였다. 비장애인들이 건설한 이 왕국 속에서 장애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결과물이었다. 발견된 컨텐츠의 제목까지도 불쾌하고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장애란 이겨내는 것이 아닌 단지 존재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또한 누구나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질 수 있고, 후천적으로도 장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는 장애라는 것을 타자화시키고 스스로를 그것에서 매우 먼 존재로 인식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공통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노화의 진행이다. 후천적인 장애라 함은, 대부분 예기치 않은 사고로 장애를 얻는 상황만을 떠올리지만 우리는 모두 나이가 들면서 신체의 기능이 저하되는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그렇게 누구나 자연스럽게 장애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나 또한 후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다. 어린이 집 교사를 관두고 작가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악플에 시달리다가 그간의 스트레스가 폭발하면서 공황장애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판정 이 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기적으로 약을 받으러 병원에 다니며 지내다 보니 마주치는 사람들 속에서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애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장애가 아니더라도 심리적 장애나 인지 장애 등 많은 사람들이 장애를 가지고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도, 드러나지 않는다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가도 창 밖을 내다보면 평화롭기만 한데, 저 ‘평화로움’이 특권층에게만 해당되는 평화로움이라니. 장애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일구어낸 저 ‘평화로움’에서 위화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장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장애를 대하는 비장애인들의 태도에서 괴상한 현상이 드러나게 되는데, 비장애인들의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 그들의 기준에 장애의 정도가 얕다면, 그 정도는 장애가 아닌 정도로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내 눈에 비장애인처럼만 보이면’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 되는 것이 그들만의 평화로움을 유지하는 하나의 ‘너그러운 배려’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참 비장애인 다운 분류 기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반면에 그들이 눈으로 분류하는 기준으로부터 파생되는 두려움도 있으니,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장애다.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은, 비장애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그들을 판단하고 배제시킬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들의 존재는 평화로운 왕국을 위협하는 존재로서 실제 그들의 장애 경중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혐오대상이 되고 만다.
사실 내가 품고 있던 아홉 명의 아이들 중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 장애는 아니지만 경계성 자폐증상을 보이는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돌발 행동이나 강박적인 반복 행동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와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 했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그런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함께 돌보는 것에 대해서,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대해주고 신경 써줘야 할 텐데 그런 점이 어렵지 않느냐”고 물어오곤 했다. 아이를 돌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그렇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매우 힘들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닌 아홉 명 이나 되는 아이들, 거기다 자기주장이 생기기 시작한 미운 네 살의 아이들을 혼자서 돌보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내가 힘들었던 것은 ‘그런 아이’가 아홉 명의 아이들 중에 섞여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아이를 ‘남 다르게’ 신경 써야 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아홉 명의 아이들 모두를 ‘다르게’ 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을 다르게 가지고 있다. 발달속도도 모두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나 성격도 모두 다르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발달장애나 자폐 또한 그 아이가 가진 하나의 특징일 뿐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특성을 유심히 관찰하고 고려하여 같은 공간 같은 상황이지만 아이들마다 다른 해결책을 제시해주며 교육하는 것이 교사나 부모를 포함한 보호자들의 역할이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 모두가 특별하다.
우리는 현재 비장애와 장애를 완벽하게 분리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런 분리가 교육에 있어서는 오히려 중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아니, 현재 주어진 현실 속에서 이러한 분리는 불가피하다. 비장애인들과 장애인들을 다른 곳에 분리시켜놓고 다르게 교육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어디서든 동일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교육에 있어서의 분리란 각자가 가진 재능과 특성에 따라 더욱 세분화되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권리에 대한 얘기다. 아이들의 특성에 따라 다른 해결책과 교육을 제시하듯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을 발견하고 발현 시키기 위해 다양한 경험과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비장애인들이 가진 특권과, 특권은 커녕 기본적인 인간으로서 존엄성 마저 무시 받고 있는 장애인들의 이 불합리한 간극을 메꾸기 위해서 분리될 필요도 있다. 만약 지금 현 사회가 장애유무가 무의미한 트랙이었다면 달랐을까? 그러나 애초에 한쪽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 트랙 위에서 모두에게 구분 없이 같은 출발점을 준다는 것은 결과를 정해놓고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지금 현 사회는 이미 비장애인들에게만 유리하게 건설된 사회다. 현재 비장애인들은 자신의 재능에 따라 특성에 따라 세분화된 길을 능력에 맞게 고르고 경험할 기회가 열려 있지만, 장애인들에게 그런 ‘선택’의 기회는 매우 한정적이다. 예로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에 소질이 있는, 혹은 스토리 텔링에 재능이 있는, 웹툰 작가를 꿈꾸는 장애인들은 많은데 그들이 가진 특성에 맞춰 교육을 해줄 기관이나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경험의 부재는 개인의 진로, 취업 문제를 일으키고 자금난으로까지 이어진다. 또한 지역, 국가적으로 봤을 때도 예술인, 전문가들의 발굴을 제한하게 된다.
△ 어떻게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는지를 그린 예롱 작가의 만화, <현수와 수호>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장애인들에게 다른 출발점을 주는 것을 두고 ‘혜택’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있다. 웃기게도 그들은 신체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는 가까운 마트도 가기 어려운 현실에는 관심도 없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이동권을 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당연하다고 여긴다. 어떤 이들은 장애인들이 겪는 불합리함들은 모두 무시한 채 장애인들을 대뜸 본인들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는 ‘민폐’라고 여긴다. 혹은 ‘장애를 이겨내라’고 한다. 누군가 에게는 편리한 지하철이 누군가 에게는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공간일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하지 못한다. 누군가 에게는 빠르고 편리한 키오스크 매장이 누군가 에게는 이용할 수 없는 곳이라는 걸 모른다. 매번 도움 없이는 생활하기 어려운 그들의 삶과 외침을 부정한다. 이런 인식이 주가 되는 사회이다 보니 장애인 스스로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같은 출발선상에 서지 못한다고 자존심 상해하는 경우들도 있다. 대학 진학을 앞둔 청소년 장애인 학생들이 사회배려자 전형을 제안 받았을 때 그런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비장애인들의 이기적이고 시혜적인 태도와 그에 바탕이 되는 사회적인 인식은, 이렇게 불필요한 죄의식이나 불편함을 생성하게 된다. 모두가 똑같은 출발점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현 사회가 이미 비장애인들 위주로 건설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의 특성에 따라 기회를 제공하고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혜택’이 아니다. 그들에게 채워지지 않는 소중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함이다.
장애인들이 현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혜택이나 특별함이 아니다. 단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권에 관한 것들이다. 휠체어가 다니기 쉽게 만들어진 도로, 배리어 프리한 도로는 모두에게 편안한 도로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개선이 시작되어야 할 부분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에 대한 인식개선, 올바른 인권성장을 위해 어린 아이들부터 교사, 부모를 포함한 보호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진정한 평등이란 지금 당장 모두를 같은 위치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특권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인정한 뒤에 근본적인 문제, 즉 기울어진 운동장을 재정비하고 모두가 같은 출발점에 설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동등한 인격체로서 인지하고 그들을 배제시키거나 타자화시키지 않는 것, 선의나 배려 또한 차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진정한 평등으로 나아가는 소중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