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가치에 대해 : 스포츠 웹툰이 안 보이는 이유는?
‘스포츠 웹툰이 안 보이는 이유’라는 주제의 글을 의뢰받았을 때, 몇 가지 굵직한 이유가 떠올랐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스포츠물은 다른 장르에 비해 손이 많이 가고, 그리기 어렵다. ‘사이다(속 시원한 캐릭터, 스토리 등)’, ‘먼치킨(원펀맨 같은 극강의 주인공)’을 원하는 MZ세대 독자의 입장이라면 스포츠 웹툰의 주인공은 성장하는 속도가 너무 느려 보일지 모른다. “초반 기대는 높았는데… 발암 공갈빵이잖아!”라고 외치며 조기 하차를 결정하기 십상이다.
이런 접근법이라면 “스포츠 웹툰은 더 이상 이 시대의 생산, 소비 구조에 맞지 않다”라고 단호하게 결론 내리고 글을 마무리할 수도 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필두로 1980~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스포츠 만화의 영광은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인가? 스포츠 웹툰의 ‘참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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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소설/축구가 너무 쉬움!/엉심킬러
스포츠 웹소설이 잘 보이는 이유는?
스포츠 자체는 글로벌화, 중계 기술의 발달 등과 함께 생생함으로 더 인기를 얻어 가고 있다. 분절된 칸의 표현을 추구하는 스포츠 웹툰이 라이브 콘텐츠와 정면대결을 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웹소설계에서는 스포츠물이 쏠쏠한 인기를 얻고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남성향이 강한 웹소설 플랫폼들에서는 스포츠물이 꽤나 강세다. 인기 순위를 보면 10위 안에 최소 1~2개씩 진입해 있다. 주로 축구, 야구물이지만 생산되는 작품의 수도 적지 않다. 스포츠 웹소설의 인기 비결을 잠시 살펴보자.
정통 스포츠물은 판타지가 득실거리는 웹소설계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스포츠 웹소설은 판타지가 섞인 형태로 초반부터 주인공이 엄청난 재능과 활약을 보인다.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 <지상 최강의 홈런왕>, <축구가 너무 쉬움!> 등처럼 제목부터 먼치킨이다. 스토리는 또 어떤가. 예를 들면 축구물에서 유능한 미드필더가 부상을 당해 망했다가 회귀해(1, 2회 내에 발생) 슈퍼스타가 된다는 식이다. 더 뛰어난, 완벽한 스포츠맨이 되기 위해 n차 회귀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포츠 웹소설의 인기는 판타지에 의존하지 않는다. 회귀라는 설정의 판타지는 ‘돕는 손’일 뿐이다. 먼치킨 주인공을 둔 스포츠 웹소설은 손흥민의 극장골에 비할 바 없는 극적인 장면을 독자의 뇌리에 전송한다. 라이브 스포츠 같은 거친 숨소리, 역동성이 꿈틀거리는 표현, 폭발하는 열정이 인기의 관건이다. 작가는 스포츠의 전문성을 한껏 살려 극적인 순간을 쓴다.
“내 앞에 공간이 열렸고,
상대 골키퍼 홀로 그 공간을 보고 달려 나온다.
그래,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툭!
골키퍼의 키를 넘는 공.
난 그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환히 웃을 수 있었다.”
스포츠 웹소설은 비교적 손쉽게 글로서 축구 경기를 직접 보듯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골키퍼의 키를 넘겨 골을 넣는 똑같은 장면을 웹툰으로 표현한다고 가정해 보자. 웹툰 작가의 머릿속에는 앵글, 연속 컷의 숫자, 컷 안 등장 인물의 숫자, 선수 복장 및 관중석 묘사 등의 숙제가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스포츠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웹툰 작가라면 그 숙제의 고통을 오롯이 감당하겠지만.
“불길의 열기”를 지핀다면
표현의 문제가 전부는 아니다. 스포츠의 진정한 핵심 가치는 열정이다. 그것은 라이브 스포츠든, 웹툰이든, 웹소설이든 마찬가지다.
열정을 불태웠다면, 패배가 곧 실패는 아니다. 스포츠는 우리 인생에서 열정의 가치를 가르쳐 준다. 과거의 스포츠 만화를 돌아보자. <공포의 외인구단>, 박원빈의 아이스하키 만화 <공포의 보디체크>,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농구 만화 <슬램덩크> 등에서 주인공과 그 동료들이 원하는 승리를 거두었나? 그 결말은 요즘 용어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였고, 감동적이었다.
고(故) 신문수 화백의 야구 만화 <삼봉이야구단>(1987)에서 주인공들의 도전은 더 초라했다. 야구와는 무관해 보이는 명랑 만화의 거장도 야구 만화를 했다는 사실이 지금 보면 놀랍다. 그만큼 스포츠는 작가들을 혹하게 하는 매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박수동의 <번데기야구단>(1977)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삼봉이야구단>은 야구를 전혀 모르는 시골 중학생들(경남 돌다리중학교)의 야구 도전기다. 우여곡절 끝에 야구팀이 창단되고, 과거 유명 야구선수 출신 공배팔 감독이 부임해 아이들을 지도한다. 학부모들의 반대로 야구팀 지원은 끊기고, 감독은 사임한다. 돌다리중학교 야구부 선수들은 자비로 상경해 전국대회에 처녀 출전한다. 서울팀과 맞붙은 1회전에서 0대 15 패배. 돌다리중학교 야구부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더 열심히 연습한다. 이 모습을 본 학교가 야구부에 지원을 재개하고, 공 감독은 아이들에게로 돌아온다. 여기서 작품은 끝나고 만다. 그럼에도 독자는 돌다리중학교 교장, 공 감독, 학부모처럼 패배에 굴복하지 않는 돌다리중학교 야구부의 열정에 감동하게 된다. “정정당당하게 시합에 임하고 전력을 다했다면 득점판에 쓰인 숫자와 상관없이 우리는 승리한 것이다”라는 명장 페프 과르디올라(스페인 출신 축구 선수, FC바르셀로나의 황금기를 이끎)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스포츠 웹툰의 방향성도 여기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독일 문학의 거성인 괴테의 용어로 “불길의 열기”, 즉 열정의 표현 여부다! 물론 스포츠 웹툰이 작가에게 얼마나 도전적 영역인지는 인정해야 한다. 숱한 야구 만화를 그린 이현세는 과거 “(야구) 장비와 유니폼 그리기가 힘들어 야구 만화를 그만두었다”고 고백했다.
또한 스포츠에 대한 전문지식도 충분해야 하고, 종목에 대한 작가의 호불호도 존재한다. 이현세는 축구 만화를 딱 한 편(<억세게 재수 없는 녀석들>(1987))만 그린 이유에 대해 “축구만화는 사람을 많이 그려야 한다. 공에 따라 사람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축구에 인생 이야기를 집어 넣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반면 야구는 공 하나 던질 때, 칠 때, 틈새의 시간이 존재하니 갈등 요소를 집어 넣을 수 있다. 한마디로 축구는 원초적인 스포츠, 야구는 작전이 좀 더 많이 필요한 스포츠랄까”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심장을 뜨겁게 하자!
나는 개인적으로 스포츠 웹툰의 미래가 비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포츠 웹소설과는 다른 스포츠 웹툰의 성공 사례가 튀어 나오고, 스포츠 웹툰의 문법이 창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훈의 복싱 웹툰 <더 복서>, About 911의 축구 웹툰 <빌드업> 등은 꽤나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회귀, 환생 등의 판타지 요소 없이, ‘각본 없는 드라마’라 불리는 스포츠의 매력과 열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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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웹툰/더 복서/정지훈
<더 복서>는 기획단계에서 먼치킨의 트렌드를 의식한 듯하다. 복싱 천재인 주인공은 거의 신에 가깝다. 타인에 비해 시간을 느리게 느끼는 주인공은 괴물 같은 맞수들의 주먹을 다 피해낸다. 그러면서도 피와 살이 튀고, 상대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듯한 생동감을 극대화했다. 복싱에 대한 주인공의 미친 열정이 점점 강도를 높이는 이 작품은 여러 인물 관계, 선수들의 과거 등을 다채롭게 보여주어 스토리의 짜임새까지 탄탄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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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웹툰/빌드업/911
<빌드업>의 주인공은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와 사랑’에 빠진 강마루다. 그의 포텐이 빨리 터지는 것이 아니지만, 축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독자를 설득하는데 모자람이 없다. 축구 지식, 실감나는 동작 묘사 등이 웹툰을 종횡으로 엮으며 스포츠의 매력을 오롯이 살려낸다.
여러 편의 개그 야구 웹툰을 연재하고 있는 최훈은 독자를 한 발짝 앞서가는 전문성, 작가만의 탁월한 식견, 반전 및 개그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선수들을 만화체로 표현해 그림에 지나치게 에너지를 쏟지 않는 전략이 먹혀든 셈이다. 그는 만화의 재미가 반드시 멋진 그림에서 나온 것만은 아님을 입증하는 작가다.
야구 만화 <스터프 166㎞>(1999)를 발표한 만화가 김성모는 “나도 박산하의 축구 만화 <미들맨>을 보며 스포츠 만화에 감동했고, 야구 만화에 도전했다. 남들이 안하는 것을 하는 것이 성공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지금 웹툰 작가들이 도전할 만한 장르가 바로 스포츠다. 거기에는 열정, 우정, 로맨스 등 모든 것이 녹아 있다. 심장을 뜨겁게 하자, 안주하지 말고”라고 말했다.
스포츠 혹은 스포츠 웹툰이 전하는 열정의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 열정 안에는 인간사를 관통하는 감동이 팥빵의 앙꼬처럼 깊이 박혀 있다. 스포츠 웹툰에서 그 거친 열정이 지금의 트렌드에 살짝 비켜나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돌아올 수밖에 없다. 스포츠 웹툰에 도전하는 작가들이 늘어난다면, 그 시점이 더 빨라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