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노블, 여전히 관심이 있나요?
그래픽노블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그래픽(Graphic)과 소설(Novel), 미술과 문학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그래픽노블(Graphic Novel)’이라는 용어의 탄생은 영미권에서 주로 사용하는 만화의 명칭 ‘코믹스(Comics)’가 갖는 언어적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웃기는’ 이라는 뜻을 내포한 코믹스라는 명칭이 만화의 인식을 낮추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방드 데시네(Bande dessinée, 프랑스어권), 사르야쿠바(Sarjaku-va, 핀란드), 빌더슈트라이펜(Bilderstreifen, 독일) 등으로 불리는 유럽 만화의 명칭은 연결된 그림, 띠로 이어진 이야기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만화가 갖는 본질적인 속성인 연속성과 맞닿아 있다. 이와 달리 ‘웃기는’이라는 뜻을 내포한, 주로 미국 만화를 지칭하는 용어였던 코믹스가 일반적으로 사용된 이유는 미국 만화의 산업적 영향력 때문이었다. 사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만화를 코믹스라 부르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라 보는 견해가 많다. 당시 코믹스의 대다수는 웃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70년대 미국의 주류 만화 시장이었던 코믹북의 대다수 작품들은 사건이 벌어지면 슈퍼히어로가 나타나 초능력으로 해결해 버리는 내용이었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는 미비했다. 물론 슈퍼히어로장르만 존재하진 않았다. 슈퍼히어로가 없는 탐정물인 윌 아이스너(Will Eisner)의 역작 <더 스피릿>은 뛰어난 연출에 드라마를 넣어 완성도를 높였다. 그는 자신의 만화가 코믹북이라 불리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진지한 작품으로서의 만화를 표방하며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이후 1978년 <신과의 계약, A Contract with God>을 출판하며 그래픽노블이라 명명했다. 1960년대 후반 만들어진 그래픽노블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 후반 윌 아이스너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사용되면서 아트 슈피겔만(Art Spigelman), 닐 게이너(Neil Gaiman), 프랭크 밀러(Frank Miller) 등의 작가들을 배출했다. 결국 그래픽노블은 영미권에서 만화를 뜻하는 코믹스의 ‘웃기는’이라는 용어의 한계를 벗어나 보다 더 진지하고 문학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만화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출발은 그러했지만 현재는 상당히 폭넓은 범주로 사용된다. 미국에서는 단행본 만화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과거에 코믹북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영웅만화 등의 완성도가 높아지며 그래픽노블과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수입되는 대부분의 만화를 그래픽노블 카테고리에 포함시킨다. 때문에 일반 독자들은 그래픽노블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미국에서는 보통 잡지 형식으로 연재하지 않은, 이야기가 완결된 구조로 된 단행본 형식의 만화책을 그래픽노블이라 부른다. 그러나 코믹 스트립 연재물을 재편집한 것을 그래픽노블이라 부르는 경우도 많아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본고에서는 좁은 의미의 그래픽노블에 대하여 살펴보되,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그래픽노블도 포함해서 언급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이분법적인 구분이 쉽지 않을뿐더러 일반적인 독자들이 인식하는 그래픽노블이란 대부분 마블이나 DC의 영웅 만화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를 빼 놓고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섭섭할 것이다.
2. 그래픽노블에 대한 관심과 웹툰 시장의 관계?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그래픽노블 작품은 플리처상을 수상한 아트 슈피겔만(Art Spigelman)의 <쥐>, 영화화되며 흥행에 성공한 프랭크 밀러(Frank Miller)의 <300>, <씬 시티>,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된 마르얀 사트라피(Marjane Satrapi)의 <페르세폴리스>, 봉준호 감독이 연출하여 주목받았던 뱅자맹 르그랑(Benjamin Legrand), 장 마르크 로셰트(Jean Marc Rochette)의 <설국열차>등이 있다. 사실 <쥐>를 제외한 대부분은 원작의 영화화로 주목을 받은 작품들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범주를 조금 더 확장해서 한국 서점에서 그래픽노블로 분류되어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마블과 DC의 작품들, 그중에서도 <아이언맨>, <캡틴아메리카>, <스파이더맨>, <배트맨> 등 영화에서 인기를 얻은 캐릭터의 작품 비중이 높다. 사실 한국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그래픽노블이 큰 인기를 얻은 적은 없다. 만화와 웹툰을 즐겨 보는 독자들 중에서도 소수만이 그래픽노블을 읽었다. 웹툰을 보지 않고 그래픽노블만 보는 독자도 왕왕 있다. 그만큼 소비층이 다르다. 웹툰을 주로 읽지 않았던 소비자들이 드라마 <미생>을 보고 단행본 <미생>을 구입했듯, 영화를 보고 궁금증을 가진 관객들이 그래픽노블에 관심을 갖고 구매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 영화 <아이언맨> 포스터, 존 파브로 (출처_네이버영화)
비슷한 관점에서 그래픽노블에 대한 관심도 증가의 원인을 가장 쉽게 예측해 볼 수 있는 것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이하 MCU)의 성공이라 볼 수 있겠다. 2008년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2012년 <어벤져스>가 나올 때까지 만화 팬들의 큰 이슈가 되었다. 이후 2019년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이어진 MCU의 성공과 함께 세계관에 대한 궁금증, 영웅들과 빌런들의 관계, 향후 전개될 이야기 등에 대한 복기와 예측이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다뤄졌다. 이를 원작과 비교하거나 세계관,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마블의 그래픽노블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마블의 세계관 확장은 2010년대 대중문화의 큰 사건이었기에 한국의 다양한 콘텐츠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비슷한 핏줄인 웹툰 시장에서는 마블과 같은 슈퍼 IP 열풍이 불었다. 대표적으로 2015년 발표된 MCU의 웹툰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와이랩의 ‘슈퍼스트링(Super String)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와이랩은 한국의 마블을 표방하며 거대한 세계관을 내세워 15편이 넘는 작품을 선보이며 관심을 끌었다. 다만 방대한 세계관 설정에 따른 높은 진입장벽과 아직은 초입 단계라는 점에서 슈퍼 IP로서의 가시적 성과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하겠다. 또 다른 관심으로는 여성작가의 약진을 들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여성인권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관련 작품들이 다양한 미디어에 소개되었다. 만화를 구매하는 남녀 비율이 약 50:50으로 거의 같은 것에 비해 그래픽노블을 구매하는 여성의 비율은 남성에 비해 약 1.5배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높아지는 여성인권에 대한 관심과 연결된 개인의 정체성이나 내면의 이야기, 젠더, 철학 등의 주제를 많이 다루는 것이 그 원인으로 파악된다. 그 외의 관심으로 수상 이력이 있는 작품들을 들 수 있다. 플리처상을 수상한 아트 슈피겔만의 <쥐>, 맨부커상 후보작에 오른 닉 드르나소의 <사브리나>, 한국 최초로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서 수상한 앙꼬의 <나쁜 친구>, 만화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하비상을 수상한 김금숙 의 <풀> 등 ‘수상작’이라는 수식이 붙은 작품들이 대부분 높은 판매를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찐 팬’들의 지속적인 관심이다. 주간연재 형식으로 오랜 기간 연재되는 웹툰과 달리 한 권으로 끝나는 완결성을 가진 이야기, 만화의 예술적 시도와 형식 등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이라 볼 수 있겠다.
상술했던 이유로 노블코믹스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지만 출판만화를 보는 독자들이 30% 이내이며 이 중 그래픽노블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또한 최근 들어 그래픽노블에 대한 관심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MCU를 필두로 한 슈퍼히어로에 대한 피로감, 여성인권에 대한 보편적 인지, 점점 늘어나는 웹툰을 포함한 디지털만화 독자 증가가 그 원인으로 예측된다. 특히 웹툰 시장의 경우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튜디오 중심의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론칭하며 웹소설 팬들을 웹툰 플랫폼으로 끌어들이며 외연을 확장하고 있어 그래픽노블의 형식적인 완성도가 주는 차별성이 희석되고 있다.
3. 그래픽노블을 즐기는 방법
그래픽노블을 즐기는 독자는 많지 않다. 그러나 누구나 접했을 히어로 영화, 노블코믹스 원작 영화 등을 통해 관심을 갖는 일반 독자들이 꽤 있을 것이다. 웹툰에 비해 형식, 속도감이 달라 적응이 잘되지 않더라도 읽다 보면 빠져드는 작품들이 많다. <쥐>와 같은 작품은 가뜩이나 그림도 투박한데 글도 엄청나게 많다. 그러나 주인공 아버지의 강박 행동과 말투를 읽어나가다 보면 묘하게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되며 색다른 형식에 익숙해진다. 그래픽노블이 궁금하지만 뭘 봐야 할지 모를 독자들을 위해 그래픽노블을 즐기는 방법을 소개한다.
① 영화화된 작품 읽어 보기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을 읽어보는 것이다. 특히 영화화가 된 작품에 영향을 준 작품들을 읽어본다면 이미 알고 있는 세계관과 캐릭터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 <배트맨: 다크나이트 리턴지 30주년 에디션>, 프랭크 밀러 (출처_시공사)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시리즈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다크나이트 리턴즈>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대표 캐릭터인 <아이언맨: 익스트리미스>, <시빌 워: 캡틴 아메리카>등으로 시작해 보는 것이다. 슈퍼히어로 외에도 <설국열차>, <파란색은 따뜻하다>등 유럽 그래픽노블을 원작으로 한 작품을 영화와 비교해 보는 것도 좋겠다.
② 수상작 읽어 보기
수상을 했다는 것은 작품성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수상작 코너에 있는 작품을 보면 다소 지루한 경향이 있듯 그래픽노블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일본 만화나 한국 웹툰의 빠른 전개, 역동적인 작화를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할 수 있다. 약간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 <사브리나>, 닉 드르나소 (출처_아르테)
앞서 언급한 <쥐>나 <사브리나>같은 작품을 처음 접하면 ‘이게 잘 그린 그림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지나치게 생략됐거나 투박한 그림이 익숙하지 않겠지만 읽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작품 속으로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 <초속 5000 킬로미터>, 미누엘레 피오르 (출처_미메시스)
솔직히 그렇게 재미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씩 작품 속 장면이 떠오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수상작이 꼭 실험적인 작품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11년 앙굴렘 만화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한 미누엘레 피오르(Manuele FIOR)의 <초속 5000 킬로미터>는 지극히 섬세한 사랑의 궤적을 아름다운 수채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시간, 계절, 날씨에 따른 색감의 변화로 감정을 표현한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한 긴 여운을 남긴다.
③ 새로운 문화를 읽어 보기
우리가 콘텐츠를 보는 목적 중 한 가지는 다양한 문화의 경험이라 볼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미국 문화를 간접 체험하고 OTT 플랫폼 콘텐츠를 통해 다양한 국가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새로운 문화를 쉽게 접하게 되었다. 그래픽노블은 작가주의 성향의 작품이 많은 만큼 새로운 문화, 사상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빅토리아 제이미슨의 <롤러 걸>은 2016년 뉴베리문학상을 받은 작품으로 여자 어린이 주인공이 위험한 스포츠인 ‘롤러 더비’를 하며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발레나 댄스가 아니라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여자아이들에게 운동이 장려되지 않는 분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칼데콧상을 받은 데이비드 위즈너의 <인어 소녀>는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를 길들이는 양태를 고발하는 내용을, <야나의 유령>은 사춘기 소녀의 외모에 대한 내용을, <익명의 엄마들>은 싱글맘 주인공이 엄마들 모임에 나가 자아를 되찾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픽노블이라는 명칭은 이제 우리에게 꽤나 익숙해졌다. 출발은 코믹스라는 용어의 반발에서부터였지만 이후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다. 만화의 디지털 소비가 점점 확장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그래픽노블이 갖는 예술적 형식과 새롭고 다양한 이야기를 많은 독자들에게 선보이기 위한 판로 개척을 기대한다.
김기홍, ‘코믹스’ 용어에 대한 재 고찰, 만화비평 6호, 2017.
문일완, 그래픽노블은 어떻게 탄생하고 성장했을까, 채널예스, 2021.
이규원, 그래픽노블의 정의와 감상 방법에 관하여, 채널예스,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