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로서의 만화와 웹툰
만화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몇 살 때인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참기름이나 고춧가루 등을 팔던 재래시장 안의 작은 가게와 연결된 큰아버지 댁의 다락방이었다. 제삿날이나 명절에 친척들이 모여 알아들을 수 없는 어른들의 대화로 집안이 시끌벅적해지면, 나는 잠시 나무 사다리를 타고 사촌형들이 숨겨 둔 만화책이 가득한 다락방으로 피신하여 흑백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해적판으로 출간된 만화책들이 많았던 시절, 그 안에 담겨 있는 무술가들의 이야기, 로봇과 공상 과학 이야기, 주인공과 함께 떠나는 온갖 모험 이야기가 가득한 환상의 세계에 빠져들다 보면 멀리 현실의 세계에서 아득하니 들려오는, 집에 돌아가자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무척 야속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사촌형은 그림을 참 잘 그렸다. 하지만 어른들은 형이 만화를 그리는 것을 그리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큰아버지 댁에 가면 사촌형이 서랍 깊이 숨겨 둔 그림들을 몰래 찾아 구경하는 게 나만의 비밀스런 놀이였다. 그리고 형을 따라다니며 새로운 그림을 그려 달라며 졸라 대던 기억이 난다. 좁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하얀 연습장에 펜 하나로 마치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 듯 마법처럼 그려지던 그림을 보며 종이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에 빠져들었고, 그렇게 받아 온 그림들 위에 얇은 종이를 대고 따라 그리던 경험들은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만화들의 시작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뒤섞인 다락방에서 나던 퀴퀴한 냄새는 그 만화들과 어우러져 나에게는 묘한 즐거움과 안정감을 주는 향기가 되었고, 지금도 참기름 냄새나 다락방에서 맡았던 냄새가 나는 곳에서는 (물론 그 냄새는 곰팡이 냄새였지만) 나는 문득 다시 그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빠져든다.
그런 것이 어쩌면 예술의 힘이 아닐까 한다. 어린 시절에 듣던 노래나 읽었던 이야기를 접하면 언제든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되는 경험, 자유롭게 꿈 꿀 수 있는 환상의 세계에서 잠시 현실의 버거움을 내려 놓고 유영하는 기분, 많은 심리 치료의 기법에서도 마음을 느슨하게 만드는 퇴행은 중요한 요소로 사용된다. 익히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좌절되었던 유아적 소망들을 현실에서, 혹은 가상에서라도 만족하는 일이 치유에 중요하다고 보았다. 무의식에 존재하는 욕망들과 공격성,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형상과 음율 등 예술은 그런 우리의 소망들을 건강하게 표현하고 드러내는 방법이다. 미술과 음악은 인류의 존재와 늘 함께 해 왔다. 태고의 인류가 거주했던 동굴의 동물 그림이나 구전되어 오는 시와 노래들, 운율과 함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현실 세계에 맞서는 두려움과 걱정을 잠시 잊게 하고 환상의 힘을 갖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속한 세계에서 우리의 마음은 그런 환상과 현실들이 뒤섞여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화 속에서는 우리는 로봇처럼 거대해져 지구를 지킬 수도, 램프의 지니를 만나 큰 부자나 왕자가 될 수도, 나와 가족을 괴롭히던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는 영웅이 될 수도 있다. 예술은 그렇게 소망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요즘 인기 많은 웹툰 중에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이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내용들이 많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잡지에 연재하거나 만화책을 출간해야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볼 수 있었던 시대와 달리 요즘은 누구나 만화를 그리고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다. SNS에 자신의 일상 이야기나 전문적인 분야의 이야기들을 연재하는 아마추어 작가들도 많고 웹툰 플랫폼에도 누구나 자신이 만화를 업로드하여 연재할 수 있다. 그 중 많은 호응을 얻은 작품들은 정식 연재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그러다가 본업을 잠시 접어 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 분들도 드물지 않게 있다. 그런 웹툰이 드라마, 영화 등 새로운 콘텐츠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 ‘팔호광장’ 작가 인스타툰(출처_인스타그램 @palhosquare)
누군가의 그림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또한 같은 그림도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집-나무-사람을 그리게 하는 검사나 추상적인 그림을 나름대로 해석하게 하는 로샤 검사 등 투사적 검사를 통해 현재 내담자의 마음 상태를 추정해 보기도 한다. 마음이 힘들 때 괴로운 것 중 하나는 모호함이다. 내 마음이 괴로운 원인과 모습이 명확하지 않고 막연한 불안과 불쾌한 기분이 계속되다 보면 주변의 자극들이 부정적으로 지각되는 왜곡이 일어나고, 그래서 더 마음이 힘들어지는 악순환을 경험하게 된다. 때로는 그 마음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환기(ventilation)하는 것만으로도 회복에 도움이 된다. 그 과정에서 그 안에 숨은, “아, 나는 화가 났던 게 아니라 걱정했던 거구나.”, “나는 슬펐던 게 아니라 억울했던 거였구나.”처럼 다른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많은 상담가들이 감정 일기를 권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되돌아보면, 감정 뿐 아니라 그동안 왜곡해서 바라보았던 현실의 문제들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서툰 그림으로나마 내 일상과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일상 웹툰의 장점이 여기에 있다. 게다가 그렇게 표현된 마음이 누군가의 공감적 반응을 얻게 된다면 치유의 효과는 더 커진다. 온라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체와 이야기로 자신의 일상을 만화로 기록하고 있다.
최근 온라인에는 자신이 겪었던 마음의 어려움과 상담, 치료의 경험들을 나누는 작품들도 많이 있다. 다양한 SNS와 블로그, 웹툰 플랫폼에는 자신이나 가족이 겪었던 우울증, 식이 장애, ADHD, 알코올 의존이나 도박 중독 등 다양한 정신 질환과 극복에 대한 웹툰들이 연재되고 있다. 이 만화들은 실제로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질병의 특성과 진단, 치료 과정에 대해 생생한 경험을 전달한다. 또한 당사자만 알 수 있는 미묘한 감정들, 치료 과정에서 부딪히게 되는 의외의 문제들과 실용적인 조언들도 도움이 된다.
△ ‘김 군’ 작가 인스타툰(출처_인스타그램 @songguk_mr.kim)
부산의 송국 클럽하우스라는 재활 시설에 등록하게 되어 여러 가지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중 재능을 발견한 담당 사회복지사님의 권유로 만화를 그리게 된 김 군 작가님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의 따돌림과 질병 치료 과정에서의 상처들을 딛고 치료와 재활의 과정을 그려 낸 작품들은 SNS에 꾸준히 연재되고 있다. 지금은 어느덧 두 권의 책을 출간하게 된 김군 작가님의 창작기는 입원 치료와 급성기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재활 치료에 힘쓰고 있는 환자분들에게 큰 희망을 전달한다.
정신보건사업에서도 웹툰의 역할이 넓어지고 있다. 각 지역의 정신건강복지센터 등 정신 보건 관련 기관에서는 아마추어 웹툰 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정신 질환에 대한 내용을 좀 더 간결하고 친근하게 전달하며 편견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한 많은 기관에서 정신 건강 웹툰 공모전 등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 건강과 관련된 문제들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행사들을 온라인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 ‘팔호광장’ 작가 인스타툰(출처_인스타그램 @palhosquare)
내가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도 개인적으로 뜻하던 일이 좌절되고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연재하기 시작한 정신 의학과 심리학에 대한 만화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셨고, 지금까지 활동을 계속하며 고정적으로 일간지와 시정 소식지 등에 연재하는 행운도 얻게 되었다. 늘어나는 구독자와 소통을 통한 응원에서 얻는 성취감과 자기 효능감은 덤으로 얻는 행복이었다. 만화에서 위안과 용기를 얻었다는 댓글과 메시지를 받을 때는 가슴 벅차오르는 보람도 느꼈다.
누구나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만화는 더 그렇다. 누구나 어린 시절 지루한 수업 시간에 책 모퉁이에 삐뚤빼뚤 낙서를 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낙서들로 나를 한번 표현해 보고 기록해 보면 어떨까? 내 마음과 주변의 사람들, 내가 경험한 것들을 자유롭게 나의 방식대로 표현하다 보면 다시 나를 바라볼 수도, 세상과 새롭고 넓게 소통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