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의 을은 체제 내 갑질의 꿈을 꾸는가?
- 웹툰이 강자의 폭력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필자같은 ‘사대남’들이 술자리에서 가끔 하는 이야기 중에 물리적인 폭력의 트렌드가 있다. 예로부터 학원과 군대는 남성적 폭력과 억압이 만연한 장소다. 우리는 피해자가 끝까지 양순하게 남의 폭력을 삼켜 내거나, 그러다가 체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요즘’ 뉴스에 의아해하곤 한다. ‘어째서 죽을 생각까지 하면서 죽일 생각은 못 하느냐?’라는 게 우리의 본능적인 의문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신체적인 능력에서 격차가 날지라도, 폭력성을 발휘한 기회는 똑같이 누리기 때문이다. 예컨대 등굣길에 벽돌 하나를 뽑아 날 괴롭히는 놈의 뒤통수를 찍어 버리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할 정도로 상황이 극단적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과거의 학원폭력은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는 현장이긴 했어도 비교적 단발성이었다. 지금처럼 지속적이고 집요하지는 않았다. 호르몬 조절이 되지 않는 성장기의 남자란, 몸이 작고 약할 순 있어도 사악함은 똑같다. 강자 쪽도 약자가 자신과 같은 ‘야생동물’이란 사실을 모르지 않기에 폭발물을, 터질 때까지는 건드리지 않는 감각을 유지했다.
이런 술자리 대화의 풍경은 마초적이고 ‘꼰대’같다는 점에서 낙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요즘 것들은 나약하다”고 일갈하고픈 마음이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인의 유전자 풀이 슬쩍 바뀌었을리는 없잖은가. 내가 같은 세대로 태어났다면 과연 또래들과 다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적절한 질문은 다음의 것이 되어야 하리라. 어떠한 시대적 환경이 지금의 신세대가 부조리에 보다 순응하게 만들었는가? 다시 말해 1020의 시대정신은 어떻게, 무슨 이유로 바뀌었는가? 웹툰 시장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가늠하기에 좋은 공간이다. 1020 소비자의 취향이 흥행을 결정짓고, 그 또래의 창작자들이 쉼 없이 공급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은 권력의 한 예일 뿐이다. 웹툰에는 부조리한 갑질을 밥 먹듯 저지르는 강자들이 등장한다. 물론 권력을 휘두르는 반동 인물은 300년 전의 전래동화에도 나오고, 고대 신화에도 나와서 주인공이 무언가 행동하게 만든다. 하지만 현재 한국 웹툰의 이질감은 전통적이지 않다. 작품 속 학원폭력의 피해자들은 일진을 체제-시스템-로 인식한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체제를, 체제라는 이유로 인정하고 더 나아가 긍정한다. 그러므로 웹툰을 비롯한 ‘젊은 콘텐츠’ 속에서 주인공은 체제전복적이지 않다. 그들은 독자들의 대리만족을 담아 부조리한 체제를 고치려 하는 대신 체재 내의 강자가 된다. 그리고 갑질을 ‘시전’함으로써 ‘사이다’를 제공한다.
[출처] 카카오웹툰/경이로운 소문/장이
서민이 재벌에게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를 당했을 때, 부조리를 해소하는 방식은 ‘서민으로서’ 재벌을 타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재벌 집 막내아들’이 되는 것이다. 방금은 라이트 노벨이 원작인 작품의 제목을 가져다 썼지만 웹툰 원작도 마찬가지다. <경이로운 소문>에서 주인공 소문과 친구들은 일진 무리에 억눌려 있다. 부조리를 해소하는 방식은 부조리의 방식과 일치한다. 소문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얻은 싸움 실력으로 일진을 제압한다. 물론 주인공이기 때문에 일진의 억압과 착취를 승계하지는 않지만, 그 정의는 일진이 그에게 매를 맞고 두려움을 느낌으로써 성취된다.
[출처] 네이버영화/내부자들/우민호
원작 웹툰부터 영화화의 기획, 감독, 배우들까지 중년들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내부자들>은 전통적인 체제전복의 서사를 보여준다. 체제 밖으로 밀려난 두 주인공 – 즉 몰락한 조직폭력배와 검찰 조직에서 폐기 처분된 검사는 몸뚱이 하나 믿고 체제라는 공룡을 사냥한다. 그 결과 유력한 대선후보의 정치 인생은 끝장나고, 재벌 회장은 꼴사납게 휠체어에 탄 채 법정에 출두하며, 펜대 하나로 여론을 좌지우지하던 언론인은 팔목 하나가 잘린 채 감옥에 수감된다. 왜 전통적 서사인가? 이는 주몽 설화와도 같다. 주몽은 부여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고 체제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이 거부한 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최소한 삼국시대 사람들부터는 주인공의 신체제가 구체제에 승리를 거두는 숨겨진 결말을 알기에 설화의 내용을 더 즐기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라는 신체제는 구체제 부여와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부자들>을 1020의 주류 취향대로 재조직하면 어떨까. 아마 높은 확률로 주인공들은 체제 내에서 강자가 되어 한때 강자였던 안타고니스트들을 ‘참교육’할 것이다. 주몽 설화도 마찬가지다. 주몽의 모험이 바뀔 여지를 생각해 보자. 새 나라를 세우는 대신 부여 태자인 대소의 자리를 차지하는 모험에 성공한다면, 주몽은 부여의 체제를 이용해 요즘 식 표현으로는 ‘인실(인생은 실전 : 법률로 혼쭐을 내줌)’이나 ‘금융치료(합의금이나 벌금을 물게 하는 것)’의 맛을 보여 주지 않을까. 이 서사에서 주몽은 기존의 게임을 떠나 자신만의 게임을 펼치지 않는다. 대신 부여라는 게임 내에서 ‘나 혼자만 레벨업’하고, 그 권력을 아낌없이 누릴 것이다.
필자는 강자가 강요하는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식 - 즉 ‘사이다’의 속성이 변화한 현상을 발전과 고착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압축해 설명하는 것이, 비록 거칠지만 가능은 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전쟁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면서 변화무쌍한 체제변화와 계급이동을 겪었다. 흙수저 출신 대통령이 여럿 배출됐고,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IMF로 몰락한 신흥 귀족이 노숙자가 되어 서울역에서 잠을 청했다. 한 사람의 인생처럼, 1987년까지 6번이나 다른 헌법으로 등장한 체제 역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덧붙여 한국이 아직 중진국이었을 때까지 이 사회란, 바뀌면 바뀔수록 좋아져야 마땅한 환경이었다.
이제 한국은 선진국이 되었다. 세계 1위의 치안과 수위를 다투는 의료보험, 세련된 인프라가 정비된 환경이다. 한류 콘텐츠는 아시아 제일의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영미권 바로 다음의 지위를 노리고 있다. 프랑스나 일본을 여행한 젊은이들이 “뭐가 대단하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투덜대기 시작한 지가 이미 꽤 됐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선진국 시민’이 되기 위한 모험적 이민을 꿈꾸지 않는다. 선진국이라는 게 그토록 꿈꾸던 환상의 나라가 아니라 ‘대충 이 정도 먹고 사는’ 세상이었다는 사실 앞에서는 세계관도 바뀌게 마련이다. 이곳에 태어나서 그나마 다행한 체제라면, 부조리 역시 체제의 일부라는 점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발전한 만큼이나 안정된 체제는 필연적으로 계급과 강약이 고착된다. 양극화라고 달리 표현해도 무방하다. 어쨌거나 안정과 고착은 동전의 양면이자 한 단어인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체제순응적인 약자는 체제긍정적인 강자를 꿈꾼다. 현재 한국 웹툰이 추구하는 ‘사이다’의 기저는 프랑스의 고전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유사하다. 순박한 평민 항해사 에드몽 당테스는 독자와 가해자들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제대로 된 맛을 보여주기 위해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되어야 했다. 지금의 한국이 백작이라는 신분과, 신분에 따른 부와 지위가 위화감 없이 인정받는 19세기 프랑스와 같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19세기 프랑스와 비슷한 무언가가 우리에게 전보다 가까이 다가왔다고 할 수는 있겠다. 시대는 시대정신을 빚고 개인의 사고와 취향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작금의 현상은 ‘기성세대가 요즘 세대를 나무라는 게 맞냐, 틀리냐?’라고 묻는 따위의 영역을 완전히 초월한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정치와 담론은 시대성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작업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무엇을 주장하려 하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