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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연재 작가가 마감하는 법

양세준 만화가를 통하여 주간 연재 작가의 노하우를 알아봅니다.

2023-04-07 양세준


주간 연재 작가가 마감하는 법

웹툰은 못그려도 된다?

웹툰은 독자와의 공감대 형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서 기존의 출판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화 완성도에 신경을 덜 써도 된다는 이야기. 한때는 마치 정설로 받아들여져서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을지 몰라도 지금의 웹툰 독자들이나 지망생에게 이런 말을 하면 비웃음을 듣게 될 것이다. 2022년 현재는 과도한 완성도 경쟁에 지쳐 건강을 해치고 휴재에 들어간 웹툰 작가들이 부지기수인 시대다.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노블코믹스가 늘어나면서 웹툰계는 급격히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제작 시스템을 재편하였다. 스토리부터 작화 완성까지 공정별로 직군이 분화되는 추세가 뚜렷하고, 이 과정에서 상향 평준화된 원고 완성도를 따라 독자들의 눈높이도 함께 올라갔다. 작화를 맡는 작가에게는 그만큼 표현의 허들이 높아진 셈이다.

언젠가는 AI의 발전이 고된 반복 작업에 지친 작가들을 구원할지 모른다. 그때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나 역시 그 답을 찾고 있는 작가 중 하나일 뿐이지만, 2007년 데뷔한 이래로 아직까진 단 한 차례도 예고없이 지각 연재나 휴재를 하지 않았던 나름의 노하우는 있다. 딱히 특별할 건 없지만 그동안 마감을 지키기 위해 늘 염두에 두는 내용들을 적어 두니 함께 고민하는 동료들에게 참고가 되길 바랄 뿐이다.

계획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다.

A는 기말고사를 한 달 앞둔 고교생이다. 시험과목은 열 과목. 30일 남았으니 3일에 한 과목씩 공부하면 된다. 그러나 그 사이 친구 생일도 있고 컨디션이 안 좋았던 날도 있어서 며칠을 그냥 보내고 어느새 20일이 남았다. 이제 이틀에 한 과목이다. 하지만 막상 해 보니 역시 공부하는 데에 3일은 잡아먹는 과목이 몇 개나 있었고, 남은 시간은 10. 이제 미션은 하루 한 과목?! A가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시험 날 아침, 학교 가는 차 안에서 처음 보는 시험 범위를 읽고 있다.

A와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시험을 망치는 고교생의 전형적인 패턴이기 때문인데, 사실 마감을 앞둔 우리도 매번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

주간연재 중인 웹툰 작가 B는 이틀 안에 80컷 원고의 펜터치를 마쳐야 한다. 그러니까 오늘 펜터치해야 하는 작업량은 40. B는 여덟 시간의 작업 시간을 확보하고 시간당 다섯 컷의 펜터치를 하기로 했다. 계획은 완벽했지만 늘 그렇듯 시작하는 단계에선 손이 풀리지 않아서 한 시간이 지났을 때 B는 아쉽게도 세 컷 밖에 그리지 못했다. 이제 B는 마치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고교생 A가 그랬듯 다시 처음부터 작업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또 한 시간 후, B는 작업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 한 시간에 한 번, 계획 세우는 데도 10분은 걸릴 테니 계획을 수정하는 데만 총 한 시간을 넘게 썼다. 결국 B는 작업 일정만 수정하다 오늘 하려던 양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과연 내일은 다를까?

B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시간 관리법에 정답은 없겠지만 내 방식을 소개하자면, 한 번 세운 계획은 되도록 수정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

나는 한 시간동안 세 컷 밖에 그리지 못해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나면 약속된 여섯 번째 컷을 그리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두 시간이 지나면 11번 컷을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났을 땐 16번 컷을 그린다. 무조건 계획한 5컷을 그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중간에 비워진 컷들은 일단 남겨둔 채 지나간다. 그러다 보면 손이 풀려서 작업 속도도 올라가고 어떤 페이지엔 회상 씬이 많거나 스케치업 배경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해결되는 컷이 많아 시간이 남기도 한다. 그때 지나온 페이지로 돌아가서 빈 컷을 메꾼다. 여덟 시간이 흐른 뒤 중간중간 비어진 컷이 남아 있다 해도 마지막 페이지까지 전혀 손대지 않은 곳은 없다. 마지막에 한 시간 정도는 추가 작업 시간을 두고 빈 컷을 작업해 넣는다.

이렇게 하면 전체적으로 손이 돌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한 부분에 집착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초기에 손이 느려서 작업이 진행되는 속도가 붙지 않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계획을 수차례 수정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혹시 내가 대단히 계획적인 사람이라 가능한 것으로 오해할까 봐 밝혀 둔다면 나는 계획을 세우거나 지키는 것을 정말 힘들어하는 타입이다. 다만 마감이란 건 원래 계획 없이는 진행되기 어렵기 때문에 딱 한 번만 계획을 세우는 편이다.

시간 관리에서 스케줄 계획의 수정은 금물이다. 수정이 가능하다는 선택지가 남아 있는 한 작업 일정은 결코 지켜지지 않는다.

만화 연재는 실전이다.

프로야구 선수 C는 직구를 매우 잘 던지지만 변화구에는 아직까지 자신이 없는 투수다. 프로 무대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선 다양한 공을 잘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 C는 중요한 시합 중에 자신 없는 변화구를 마구 던져 본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C는 상대 타자들로부터 안타와 홈런을 잔뜩 얻어맞다가 감독에 의해 조기 강판된다. 교체를 피하고 승리투수가 되기 위해 C는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시합 중 몇 번 변화구를 시도해 볼 수는 있겠지만 안 되겠다 싶으면 자신 있는 직구로 타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변화구도 직구만큼 잘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시합 중에 연습해서 해결할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전에선 잘하는 것으로 승부를 하고, 아직까지 아쉬운 능력은 따로 훈련을 통해 키워야 한다.

만화 원고 작업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익숙하게 그려 낼 수 있는 아이레벨 샷에 비해 로우앵글은 표현하기가 어렵다면 본 시합에 해당하는 원고에선 능숙하게 그릴 수 있는 구도 안에서 원하는 내용을 표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양한 앵글을 표현하기 위한 능력은 원고 외의 시간에 연습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나 역시 만화가로 15년 이상 생활했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모든 앵글이 한 번에 그려지진 않는다. 그래서 실제 원고에선 두어 번 시도해 보고 안 되면 망설이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는다. 한 컷을 수십 번 고쳐서 그려 낸다면 작화 시간도 문제지만, 억지로 그려 낸 컷은 부자연스러워서 독자의 몰입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다. 그렇다고 어려운 앵글이나 동세 등을 평생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연습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것이다.

좋은 투수는 자신 있는 공으로 시합을 운영하고 익숙하지 않은 공은 따로 연습하듯, 연재 만화가도 마찬가지다. 당장 보여 줘야 할 것은 완벽한 원고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최선이다.

우리가 효율에 신경쓰는 이유

만화가의 작화력이란, 마감과 가독성을 지키는 범위 내에서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완성도를 말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스타일을 설계하고 스케줄을 관리하며 클립스튜디오의 단축키와 오토액션을 설정한다. 원고 작업에 있어서 효율을 논하면 자칫 완성도에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욕심내지 말라고 해도 건강을 해쳐 가며 선 하나를 더 그으려 노력하고, 신경쓰고 보지 않으면 누구도 모를 레이어 하나를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며 밤을 새운다.

작가가 작업 효율을 신경써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 더 중요한 공정에 힘을 쏟기 위함이며, 나아가서는 작품 너머에 있는 작가의 삶을 관리하기 위함이다. 작품은 끝나도 작가의 삶은 이어진다. 부디 나의 동료들이 더 이상 건강을 해치지 않고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더 많은 마감의 전략과 노하우가 공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진이미지

양세준

만화가,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 <서북의 저승사자>, <인간의 온도> 작가
<アブナイお遊戯 (위험한 유희)>, <オッサンフォー~終わらない青春~ (아저씨4 : 끝나지 않는 청춘)> 일본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