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창작의 현재와 미래 전망
“요즘 젊은 친구들이 포토샵인가 뭔가로 만화를 하던데, 그렇게 만든 건 만화가 아니야.”
2000년대 초 어느 날 평소 존경하던 만화가 선생님이 사석에서 한 말이다. 그 때의 당혹스러웠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필자도 ‘젊은 친구들’ 중 하나였고, ‘포토샵’으로 만화 원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선배님 말씀을 면전에서 반박하기 어려워 그냥 듣고만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렇다면 내 만화는 만화가 아니란 말인가?’라는 혼란스러움과 반발심이 생겼던 기억이 난다.
과거 만화는 펜과 잉크로 종이에 그리는 수작업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정교하고 섬세한 작업 기술이 극한까지 발전해 있었고, 이는 작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부심이었다.
반면 당시 막 시작되고 있었던 디지털 만화는 제작 기법이 덜 성숙해 있었다. 수작업 방식의 장인이었던 기성 작가들 눈에는 디지털 원고가 한없이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저평가 당하곤 했다.
디지털 창작의 현재 : 도구
세월이 흘러 디지털로 만화를 제작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됐다. 일부 수작업 방식을 고수하는 작가들도 있긴 하지만, 절대 다수의 작가들이 디지털 도구를 사용한다.
디지털 도구는 크게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로 구분한다. 소프트웨어는 ‘포토샵’을 사용하는 것도 어느새 다소 구식이 되어 버렸다. 물론 디지털 이미지를 다루는 분야에서 ‘포토샵’은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이기 때문에 가급적 기본 사용 방법은 알고 있는 것이 좋지만, 이제 만화 저작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디지털 도구는 ‘클립스튜디오’이다. 또 건축 인테리어용 3D 그래픽 도구 ‘스케치업’이 배경 제작 용도로 업계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외 무료 만화저작 도구 ‘메디방페인드’, 아이패드로 작업하는 일부 작가들이 사용하는 ‘프로크리에이트’, 아직도 소수 사용자들이 애용하는 ‘페인트툴 사이’, 널리 쓰이지는 않지만 아마추어 창작자가 손쉽게 드래그 앤 드롭 방식으로 만화를 만들 수 있는 3D 만화 저작 도구 ‘코믹Po!’, Full-3D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의 천계영 작가가 사용하는 도구로 잘 알려져 있는 ‘시네마 4D’, 최근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각종 배경 및 소재 제작 용도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3D 그래픽 저작 도구 ‘블렌더’, 그리고 원래 게임 제작 엔진이지만, 미래의 만화 제작 도구로 조금씩 거론되고 있는 ‘유니티’와 ‘언리얼 엔진’ 등이 있다.
소프트웨어 |
제작사 |
특징 |
가격 정책 |
포토샵 |
어도비 |
디지털 이미지 분야의 기본 도구, 여전히 주력으로 사용하는 작가들이 상당히 있음. |
구독제 유료 |
클립스튜디오 |
셀시스 |
만화 저작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구, 혁신적이고 전문적 기능을 폭넓게 제공하며, 작가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음. |
PC 버전 영구 라이선스 유료, 모바일 버전 구독제 유료 |
스케치업 |
트림블 |
건축 인테리어용 3D 그래픽 도구, 배경 작업용으로 만화 업계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음. |
구독제 유료 |
메디방페인트 |
메디방 |
만화 저작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구, 상당히 우수한 기능을 무료 제공. |
무료 |
프로크리에이트 |
새비지 |
아이패드, 아이폰용 디지털 페인팅 도구, 아이패드로 작업하는 작가들 중 일부 사용하는 경우 있음. |
영구 라이선스 유료 |
페인트툴 사이 |
시스템맥스 |
가볍고 빠른 저사양 드로잉 도구, 기능이 간결하고 배우기 쉬움. |
영구 라이선스 유료 |
코미Po! |
웹테크놀로지 |
드래그 앤 드롭 방식으로 손쉽게 3D 만화 제작 가능. |
영구 라이선스 유료 |
시네마4D |
맥손 |
가볍고 빠른 3D 그래픽 저작 도구, 텍스처 페인팅과 모션 그래픽 기능 특화. |
구독제 유료, 영구 라이선스 구매도 가능 |
블렌더 |
블렌더 |
가볍고 빠른 3D그래픽 저작 도구, 상당히 우수한 기능을 무료 제공. |
무료 |
유니티 |
유니티
테크놀로지 |
게임 제작 엔진 |
연매출/자본금 10만 달러 미만 무료, 10만 달러 이상은 구독제 유료 |
언리얼 엔진 |
에픽게임즈 |
게임 제작 엔진 |
프로젝트 당 총 수익이 100만 달러 초과하지 않으면 무료, 총 수익이 100만 달러 초과한 이후 분기 당 매출이 1만 달러 초과할 경우 5% 로열티 지불 |
하드웨어는 거치형 액정태블릿과 휴대용 태블릿이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판상형 태블릿을 사용하는 작가도 아직 일부 있지만, 대다수 작가들은 직관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액정태블릿을 선호한다. 작업 편의성이 매우 좋지만 고가라는 단점이 있다.
거치형 액정태블릿은 ‘와콤’사 제품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주로 그나마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도 어느 정도 화면 크기가 적당한 16~22인치 모델을 많이 쓴다. 더 대화면인 것들은 매우 크고 가격대가 높기 때문에 작업 공간과 경제적 여건이 되는 사람들이 사용한다. PC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종류와 액정태블릿 자체가 PC 역할까지 하는 것이 있다.
휴대용 태블릿은 ‘애플 아이패드’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간단한 작업은 큰 불편 없이 할 수 있지만 본격적인 작업을 하는 데는 한계가 많다. 그래서 꼭 장소를 이동하면서 본격적인 작업을 해야 할 경우 고성능 노트북에 휴대 가능한 13인치 정도 크기의 액정태블릿을 연결해 사용하기도 한다.
디지털 창작의 현재 : 방식
만화 제작이 수작업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먼저 완성 원고를 업체에 제출하는 방식의 변했다. 과거 펜, 잉크, 종이로 만화를 만들던 시절에는 원고가 완성되면 직접 출판사에 원본 원고를 가지고 가서 제출해야 했다. 출판사는 그 원본 원고를 복제해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동안 출판사에 원본 원고를 맡겨 놔야 했다. 이 과정 중 원본 원고가 분실되는 사고도 종종 발생했다.
그러나 작업 방식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더 이상 그럴 필요 없게 됐다. 디지털 이미지로 완성된 원고를 간편하게 이메일로 보내거나 업체가 요구하는 웹하드 등의 업로드 시스템으로 제출하면 된다.
원본을 보관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 종이 원고 시절 작가 작업실에는 원고가 담겨 있는 서류 봉투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커다란 보관함이 있었다. 지금은 외장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 또는 웹하드 등에 디지털 원고를 저장해 놓는다. 혹시 모를 망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2중, 3중으로 백업 저장할 수도 있다.
협업 방식도 크게 변했다. 과거에는 대표 작가가 보조 작가의 조력을 받을 때 모든 협업 작가들이 한 날, 한 시, 한 공간에 모여 함께 작업했다. 하나의 종이 원고를 여러 사람이 돌려가면서 작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표 작가가 함께 모여 작업할 수 있는 공간과 각종 가구, 도구, 장비, 식사, 간식 등을 제공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원고가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메일, 웹하드, 채팅앱 등으로 손쉽게 주고받을 수 있다. 그래서 협업 작가들이 한 날, 한 시, 한 공간에 모일 필요가 없다. 각자 원하는 장소에서 본인이 맡은 작업을 수행하고 원고 파일을 보내면 된다. 그래서 대표 작가도 협업 작가들을 위한 공간이나 장비 등을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 또 과거에는 가까운 거리에 사는 작가들끼리만 협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거리에 관계없이 지구 반대편에 거주하더라도 협업이 가능하다.
협업 작가 간 소통도 예전에는 주로 직접 대면 방식이었지만, 지금은 이메일이나 채팅앱 등을 활용한다. 실시간 소통이 필요한 경우도 전화나 비대면 화상회의 도구를 활용한다.
비대면 화상회의 도구를 활용해 각자 다른 작품을 하는 작가들이 함께 작업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화요일 마감인 여러 작가들이 작업에 가장 몰입해야 하는 월요일에 서로 심리적으로 의지하기 위해 비대면 화상회의에 접속해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작업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작업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하고, 친분을 쌓기도 한다.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게 된 것도 매우 중요한 변화이다. 과거 수작업 시절에는 말 그대로 ‘그려서’ 만화 원고를 만들었다. 물론 ‘스크린톤’이나 ‘배경톤’ 같은 것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만화를 그린다.’라는 표현이 당연했을 정도로 하나하나 그렸다.
그러나 만화 제작 방식이 디지털로 전환된 이후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사진을 가공해 배경으로 쓰거나, ‘스케치업’으로 만든 3D 이미지를 배경으로 쓰기도 한다. 매번 그리기 번거로운 말풍선, 그림글자, 효과 연출, 소품, 엑스트라 등도 소재를 활용해 빠르고 손쉽게 원고에 적용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주요 캐릭터만 그리고 그 외 요소들은 갖가지 소재를 ‘조립해서’ 원고를 만드는 단계까지 와 있다. 주요 캐릭터를 그릴 때도 3D 캐릭터로 동작을 먼저 연출하고 그 위해 덧그리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작가의 노동 강도는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졌고, 각 작업 파트를 담당하는 전문 작가의 역할과 기술이 더욱 뚜렷하게 구분되면서 더 적극적인 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래픽 도구의 다양한 기능을 원고 후반 작업에 활용하게 되면서 수작업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갖가지 효과를 원고에 적용할 수 있게 됐고, 결과물의 시각적 완성도가 대폭 향상되었다. 최근에는 원고의 후반 효과 작업만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작가도 다수 등장해 활약하고 있다.
디지털 창작의 미래 전망
작가의 단독 작업이었던 만화가 본격적인 디지털 창작 시대로 접어든 이후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게임처럼 다수의 창작자가 각자 전문 역량을 바탕으로 협업하는 방식으로 급속 전환되고 있다. 물론 앞으로도 단독 작업하는 작가가 존재하겠지만, 효율성과 수익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대다수 상업 작품은 디지털 창작 시스템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협업 방식을 더욱 추구할 것이다.
특히 더 다양한 소재가 만들어지고, 공유되고, 활용될 전망이다. 온갖 브러시 소재, 배경 소재, 소품과 엑스트라 소재, 효과 소재, 3D 이미지 소재가 무료 또는 유료로 유통될 것이며 이를 활용해 조립하듯 원고를 제작하는 방식이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주요 캐릭터는 계속 사람이 직접 그릴 가능성이 높지만, 이 또한 원한다면 3D 소재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 사실상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소재를 조립해 만화 원고를 만들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무엇보다 AI 생성기 활용이 본격화될 것이다. 작품 아이디어를 AI 생성기에 입력해 아이디어 마이닝, 프리 프로덕션, 초벌 스토리 등을 만들어 빠르고 쉽게 작품 기획 심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작가의 기존 원고를 학습시킨 AI에게 그림 생성과 채색을 맡길 수도 있고, 충분하게 학습한 AI는 후반 마무리 작업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작가 입장에서는 다재다능하면서도 내 작업물과 거의 같은 결과물을 만드는 쓸 만한 조수를 두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미래의 디지털 만화 창작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조립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작가에게 더욱 요구되는 것은 아이디어, 기획, 스토리텔링, 미적 감각, 구성, 연출, 편집, 마무리, 협업 능력, 콘텐츠 시장에 대한 이해, 독자와의 소통 능력 등이다. 아무리 다양한 소재와 AI 생성기 등을 활용해 원고를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작가적 역량이 탁월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없다.
오늘날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사진과 영상을 촬영할 수 있지만, 누구나 사진작가나 영화감독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누구나 조립해서 만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오더라도 사람들이 돈을 내고 볼만한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프로 작가는 일반인을 뛰어 넘는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소재 활용과 AI 생성기가 더욱 일상화되더라도 작가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 그 할 일을 해야 하고, 그것과 관련된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혹시 “요즘 젊은 작가들이 소재와 AI 생성기로 만화를 하던데, 그렇게 만든 건 만화가 아니야.”라는 말을 하고 싶다면, 20년 후에는 어떻게 들릴지 냉철하게 고민해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