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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아이돌 성공시대, 이 열렬한 ‘사랑'은 어디서 오나

'세븐 페이츠:착호',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그리고 '가상아이돌 김준익' 까지 아이돌 만화를 톺아보자

2023-06-23 조경숙

만화와 아이돌이라는 오래된 인연

아주 오래전부터 만화와 아이돌은 공생 관계에 있었다. 아이돌을 향유하는 팬덤 문화가 만화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H.O.T를 위시한 1세대 아이돌 때부터 팬들은 아이돌을 팬아트로 그려 향유하고, 아이돌을 캐릭터화하여 팬픽과 같은 2차 창작의 요소로 삼았다.  지금은 좋아하는 아이돌의 '포카(포토카드)'를 수집하여 꾸미는 게 팬 문화의 정석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와 같은 공식 ‘포카'가 없을 적에는 팬아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만화는 팬들이 아이돌을 향유하는 하나의 형식이었다. 팬들은 저마다 아이돌 멤버들을 캐릭터로 만들고, 그 캐릭터들에게 이런저런 설정과 배경을 부여해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향유하기도 했다. 매월 정기적으로 열렸던 만화축제 <코믹월드>에도 언제나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2차 창작물을 판매하는 부스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곤 했다. 근래에 와서는 팬들뿐만 아니라 아이돌 기획사에서 적극적으로 웹툰을 차용하기도 했다. 하이브에서는 그룹 방탄소년단의 세계관을 확장하기 위해 웹툰 <세븐 페이츠:착호>를 기획하여 네이버웹툰에 연재한 바 있다.


 

[ 그림 1, <세븐 페이츠:착호> 표지 (이미지 출처:네이버웹툰) ]


아이돌 문화에 만화가 뿌리내린 만큼, 만화 안에도 아이돌을 주제로 하거나 연예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다. 1990년대 만화잡지에서 연재를 시작한 천계영 작가의 <오디션>이나 하시현 작가의 <프리티> 등이 대표적이다. 웹툰에서도 아이돌을 다채로운 소재와 접합시킨 신선한 작품이 많다. 사생팬에게 쫓기는 연예인을 다룬 스릴러 웹툰 <사생>, 판타지와 아이돌을 결합한 <괴물 같은 아이돌>, 아이돌보다 팬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낸 <성공한 덕후>와 <우리가 사랑하는 방법> 등. 그런가 하면 <라일락 200%>처럼 아이돌이나 아이돌 연습생이 현실적으로 어떤 환경과 어려움에 놓이는지 구체적으로 조명한 작품도 있다.

‘돌판’에서의 만화와 만화에서의 아이돌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돌판’의 만화는 그 무엇보다도 ‘아이돌을 위한, 아이돌에 의한, 아이돌의’ 작품이다. 아이돌 이외의 등장인물은 비중 있게 등장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연예 산업을 다루는 것보다도 아이돌 멤버 한 명 한 명의 캐릭터와 그 캐릭터들 간의 관계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팬-만화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돌을 주제로 한 만화 작품들은 아이돌 그 자체보다 아이돌을 둘러싼 산업과 그 주변의 이해관계를 복잡하게 엮어 흥미로운 서사를 만든다. 이런 서사를 구성할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팬이 중요하다. 팬들은 아이돌 문화에 적극 참여하는 수용자이자 스스로 담론을 생산하는 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사의 중심에 아이돌이 있는 한, 사건을 증폭시키거나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 그 어디에 팬이 개재되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팬들은 그 어디에 있어도 자연스러운 이야기 흐름을 만들어 내는 ‘감초’ 같은 존재다.

그러나 팬이 중요한 만큼, 팬을 서사의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팬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웹툰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이하 데못죽)>과 <가상 아이돌 김준익(이하 김준익)>과 같은 작품이 실제 팬덤 문화를 뼛속 깊이 파악하고 있고, 이를 아이돌 서사에 사실적으로 반영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 그림 2, 좌)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웹툰 표지(이미지 출처: 카카오페이지), 우)가상아이돌 김준익 웹툰 표지 (이미지 출처: 리디) ]


데못죽, 팬의 시선을 내재한 아이돌의 등장

<데못죽>은 아이돌을 다룬 만화 중에서도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데못죽>은 본래 카카오페이지에서 웹소설로 연재되던 작품으로, 최근 카카오웹툰에서 웹툰으로 제작되어 연재 중이다. 카카오페이지에서 무려 4억 뷰를 넘어선 <데못죽>의 인기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지난 5월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서 '데못죽'만을 위한 팝업스토어가 열린 것도 놀라운데, 팝업스토어가 운영되는 일주일 동안 무려 1만여 명이 다녀갔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 팝업스토어에서는 <데못죽>의 주인공이 활동하고 있는 그룹 '테스타'의 응원 현수막이나 멤버들의 캐릭터 인형, 담요, 포토카드 등이 판매됐다. 이 품목들은 실제 아이돌 기획사에서 팬들을 대상으로 판매하곤 하는 공식 굿즈들과도 유사하다. 작품 속의 그룹인 '테스타'가 마치 실제 활동하는 아이돌인 것처럼, 이들을 응원하는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테스타' 멤버들을 주연으로 세운 팬아트, 팬픽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기 때문에 '테스타'는 '활자돌'이라 불린다. 말 그대로 활자에서 살아 숨 쉬는 아이돌이라는 뜻이다. 이런 신조어가 나타날 정도로, <데못죽>은 실제의 사람을 그려내듯 주요 캐릭터를 한 명 한 명 세밀하게 그려냈다. 멤버들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성격의 장단과 태도 등 팬들이 아이돌을 볼 때 분석하곤 하는 요소들을 주인공 '박문대'의 눈을 통해 비춘다. 마침 회귀한 문대에게는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이들의 아이돌 능력치(끼, 노래, 춤 등)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박문대의 눈은 아이돌을 오래 향유해 왔던 '골수팬'들의 눈과 다름없다. 멤버들의 능력치를 등급에 따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방송 프로그램을 조율하는 PD가 원하는 것, 루머를 벗어나는 방법 등 '돌판'에서 꾸준히 반복되어 왔던 '클리셰'를 통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회귀자 박문대에게 특혜로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박문대로 다시 생을 살기 이전의 '류건우'가 쌓아 온 경험치다. 아이돌 팬들 대신 사진을 찍어 주는 아르바이트를 수년 동안 해 오면서, 건우가 직접 몸으로 익힌 '돌판'의 생리인 것이다.

<데못죽>에는 팬들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테스타'가 종종 등장한다. 특히 '테스타'가 데뷔하기 이전인, 아이돌 연습생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아이돌 주식회사'에서 팬들의 역할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팬들은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필사적으로 감싸고, 조금이라도 눈엣가시로 보이는 후보에겐 가차 없이 등을 돌린다. 이 과정에서 다른 팬들과 싸우느라 마음을 다치는 팬들도 있고, 온갖 역경을 물리치고 기어코 성장한 '최애'를 보며 감동하는 팬도 있다.

그러나 <데못죽>은 팬들을 단순히 그려내거나 서사의 요소로 활용하는 것을 넘어선다. 팬 자체를 등장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팬의 시선을 내재화하여 스스로 팬과 아이돌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이돌 '박문대'를 통해 사람들이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아이돌'을 그려낸다.


김준익, 팬과 아이돌의 안전거리 확보하기

반면 웹툰 <가상아이돌 김준익>은 <데못죽>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데못죽>의 '박문대'가 팬의 시선을 이미 내재화한 '완벽한' 아이돌이라면, <가상아이돌 김준익>의 '준익'은 팬들의 시시각각 달라지는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돌이다. 물론 준익도 '박문대' 못지않게 매사 모든 것에 성실히 임한다. 무대를 열심히 연습하는 건 기본이고, 팬들이 원하는 때에 라이브 방송을 재깍 열고 SNS에 '셀카'도 꾸준히 찍어 올린다. 그런 준익의 모습은 팬들에게 더없이 완벽한 아이돌에 가깝다. 그러나 팬들의 반응을 매일 모니터링하고 어떻게든 팬들의 기대에 맞추려 노력하는 준익은 내적으로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김준익>의 서사는 '소희'와 '준익' 두 축으로 전개된다. 소희는 준익이 속한 트루퍼즈의 팬으로, '최애'는 준익이다. 시시때때로 준익의 사진이나 쇼츠 영상 등을 직접 편집하고 만들어 게시한다. 몇 시간이나 길바닥에서 대기하며 공개방송에 참전하기도 하고, 하루 종일 사진을 편집하기도 한다. 아무런 대가 없이 오로지 아이돌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파고드는 노동인 셈이다. 보기만 해도 설레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덕질'이지만, 이 마음은 때로 커다란 공허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이돌을 좋아해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스스로 하고는 있지만, 시급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정작 자신의 '현생'은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따금 우울에 빠져든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대체 뭘까, 이렇게 좋아했다가도 이렇게 허망해져도 되는 걸까. 그러나 한순간 '현타'가 찾아오더라도, 다시 '준익'을 보면 마냥 즐겁다.

준익도 소희를 안다. 정확히는 소희가 아니라 소희가 운영하는 트위터 계정 '해준엄마'를 팔로우하는 것이지만. 줄곧 '해준엄마'가 남기는 포스팅을 따라 읽고 유심히 봐두었다가, '해준엄마'가 제안한 콘셉트대로 사진을 촬영하거나 라이브 방송을 하곤 한다. 그러나 준익이 어느 날부터인가 해준엄마의 포스팅이 저조해지자 준익은 갑작스러운 불안에 빠져든다. 팬이 원하는 것이 곧 준익의 기준이었는데, 그 기준이 흐릿해지고 만 것이다.


"나도 모르는 내 모습, 내 귓바퀴의 점, 나의 네 번째 손가락이 살짝 휘어있는 것, 내가 실수할 때 짓는 표정에 대한 피드백. 그래도 그 사람들은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열심히 해야 했다... 나는 팬 분들의 기대와 사랑에 부응해야 하는 아이돌이니까..."(<가상아이돌 김준익> 21화 중)


준익은 팬의 기대에 부응하려다가 어느 순간부터 평정심을 잃고, 소희도 '언제든 부담 없이 떠나보낼 수 있는' 아이돌만 '덕질'하려 한다. 아이돌과 팬의 관계에서는 아이돌이 언제나 '갑'일 것만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팬들의 무급 노동에 기대어 성장하는 아이돌에게 팬이란 중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한없이 사랑을 주다가도 한순간 돌아설 수 있는 냉혹한 사람이다. <김준익>은 팬과 아이돌의 관계라는 복잡한 속내를 끈질기게 따라간다.


제삼의 시점을 제공하는 아이돌-만화

<데못죽>과 <김준익>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아이돌과 팬을 그리지만, 결국 이 두 작품이 추구하는 방향은 비슷하다. 팬의 시점을 아이돌 안으로 옮겨오거나(<데못죽>), 각각의 시점을 교차시키는(<김준익>) 것. 이들은 무대 위에 아이돌만 바라보지 않으며 동시에 무대 아래 팬들만 남겨두지 않는다.

이런 만화는 비단 <데못죽>과 <김준익>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리디에서 연재를 시작한 <기레기와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유추되지만) 죽은 연예계 기자의 영혼이 새로 데뷔한 아이돌 멤버 곁에서 연예 생활을 코칭하는 설정이다. 이 작품 역시 새로운 시선을 통해 연예계를 바라보게 한다는 데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들은 모두 아이돌 산업을 지탱하는 중요한 주체들을 세워 그들을 이해하는 발판으로서 새로운 시점을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들은 팬덤 문화를 그저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아이돌과 만화가 아주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온 것처럼, 아이돌-만화의 양상도 다채롭게 변주된다. 이전에는 아이돌의 성장 서사가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아이돌 산업 자체가 메인이다. 무엇보다 지금 아이돌을 다루는 만화 작품들은 아이돌 산업과 팬덤에 대한 끈질긴 애정으로 바탕으로 한다. 이 작품들은 아이돌과 팬덤을 단순한 소재로써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지닌 동시대성을 성실하게 탐구한 결과다. 우리 시대에 아이돌이란, 그리고 아이돌을 '덕질'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아이돌을 향해 쏟아부어지는 이 열렬한 사랑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작품을 경유하여 다시 우리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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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숙

만화평론가, 테크-페미 활동가
⟪아무튼, 후드티⟫ 저자, ⟪웹툰 입문⟫ ,⟪웹툰 내비게이션⟫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