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칼럼에는 <젤다의 전설:왕국의 눈물> 엔딩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은 여러 장르에 익숙하게 스며들어 이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 되었다. 이 셋은 주인공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지만, 빙의/환생은 아예 다른 인물이 되지만 회귀는 같은 인물이 과거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회귀 서사의 가장 일반적인 서사 구조는 현재 시점에서 실패하거나 목숨을 잃은 '나'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웹툰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의 주인공 '아리아드네'는 왕비가 되는 대관식 전날, 약혼자에게 버림받고 친언니에게 살해당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 아리아드네는 체자레 백작과 약혼하기 이전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어떠한 연유인지는 몰라도 두 번째 생을 얻었음을 직감한 아리아드네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나를 지켜야" (2화) 할 것을 결심한다.
[ 그림1, 웹툰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 표지 (출처: 네이버 시리즈) ]
아리아드네의 결심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회귀 서사는 "한 개인을 도울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절박한 자조(self-help)의 정신을 반영"(한상원, 2018)한다. 무엇보다 시간을 거슬러 회귀하는 이가 주인공 한 명뿐이기에 더욱 그렇다. 회귀 작품들의 주인공은 주변 인물들이 의아해하거나 만류하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에 의거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정한다. 주변 인물들이 주인공을 도울 때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주인공이 놓을 수 있는 하나의 '말'로서 기능할 때다. 회귀물의 주인공은 미래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며, 예견된 파국을 회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회귀물의 핵심은 주인공 그 자신에게서 시작되어 그가 스스로 끝맺어야 하는 자조(self-help) 서사라 일컬어진다.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로 보는 회귀물 서사
[ 그림2,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 이미지 (출처: 닌텐도코리아) ]
그러나 지난 5월 출시된 게임 <젤다의 전설:왕국의 눈물>(이하 <왕국의 눈물>)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회귀물 서사를 선보인다(엔딩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밝힌다). <젤다의 전설:왕국의 눈물>은 전작 <젤다의 전설:야생의 숨결>(이하 <야생의 숨결>) 이후 6년 만에 출시된 후속작으로, 초록색 옷과 모자를 입은 용사 '링크'와 하이랄의 공주 '젤다'가 함께 '하이랄왕국'을 구하는 <젤다의 전설> 시리즈 중 하나다. 이 회귀 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작에서부터 이어지는 세계관을 이해해야 한다.
하이랄왕국의 서사는 무척 방대한데, 그사이에 가로놓인 시간만 일만 년을 훌쩍 넘어설 정도다. 먼저 전작인 <야생의 숨결>에서 링크와 젤다가 퇴치해야 하는 대상은 '재앙가논'이었는데, 이번 신작인 <왕국의 눈물>에서 싸워야 하는 대상은 바로 그 '재앙가논'의 원천인 마왕 '가논돌프'다. '재앙가논'은 일만 년 전 하이랄왕국의 영걸들이 힘을 모아 봉인했는데, 시간이 지나 봉인의 힘이 약해지면서 부활해 하이랄성을 잠식한다. 젤다와 링크 등은 '재앙가논'이 부활할 것을 미리 알고 이에 만전을 기했지만 결국 패배한다. <야생의 숨결>이 시작되는 건 재앙가논에게 하이랄성을 빼앗기고 난 뒤, 백 년의 시간이 흐른 뒤다. 백 년만에 잠에서 깨어난 링크는 젤다가 억누르고 있는 재앙가논을 물리치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왕국의 눈물>은 <야생의 숨결>에서 퇴치했던 '재앙가논'의 원천, 마왕 '가논돌프'와 싸운다. 가논돌프는 재앙가논이 봉인되었던 일만 년 전보다도 더 아득한 과거에 하이랄 왕국을 세운 초대 왕 '라울'이 봉인했던 마왕이다. 하이랄대지 전역에 몬스터가 들끓는 것도, 아무리 몬스터를 퇴치해도 '붉은 달의 밤'이 되면 몬스터가 되살아나는 것도, 아무리 봉인하고 퇴치해도 재앙가논이 시간이 지나 되살아났던 것도 모두 마왕 '가논돌프' 때문이다. <왕국의 눈물>은 <야생의 숨결>에서 재앙가논을 물리치고 난 이후, 하이랄성 지하에서 기묘한 '독기'가 퍼져나온다는 제보를 들은 젤다가 링크와 함께 독기의 원천을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독기의 근원에는 아주 오래전 봉인되어 미라 상태가 된 마왕 가논돌프가 있다. 미라인 줄만 알았는데, 젤다와 링크 일행을 본 가 논 돌 푸는 돌연 독기로 이들을 공격하고, 가논돌프에 맞설 수 있는 최후의 무기인 '마스터소드'가 이 무기에 심하게 훼손되어 버린다. 그뿐 아니라 젤다는 어두운 심연으로 떨어져 버리고, 링크는 여태까지 쌓았던 체력과 스태미나 등이 모두 파괴된 채 낯선 섬에서 깨어나게 된다.
여기까지가 <왕국의 눈물>의 오프닝이다. 하늘섬에서의 튜토리얼을 끝내고 대지로 내려오면, 전작<야생의 숨결>에 없었던 거대한 지상화를 발견할 수 있다. 용이 흘린 눈물이 땅에 떨어져 거대한 그림(지상화)이 되었다는 설정으로, 이 그림들을 조사하다 보면 심연에 떨어진 젤다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다. 알고 보니 젤다는 일만 년 전보다도 훨씬 더 이전의 과거, 마왕 가논돌프가 봉인되기 이전의 과거로 회귀한 상태다. 젤다는 그곳에서 하이랄왕국을 건설한 라울과 만나 젤다 시대에 있었던 일을 알린다.
그러나 미래를 예견하고 있는 젤다가 회귀했어도,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소니아는 가논돌프의 습격에 목숨을 잃고, 소니아의 힘을 획득한 가 논 돌 푸는 각성하여 하이랄대지에 몬스터들을 흩뿌린다. 라울이 다른 부족의 영걸들과 힘을 합쳐 가논돌프를 봉인하더라도, 다시 가논돌프가 부활할 미래의 하이랄왕국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 라울이 그때까지 살아있을 수도 없거니와 가논돌프에 대적할 수 있는 희망인 마스터소드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전작에서 빛을 잃었던 마스터소드가 회복될 때까지는 꼬박 백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번에 부서져 버린 마스터소드가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긴,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하다.
[ 그림3, 용이 되기 위해 마음을 다지는 젤다의 모습,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 중 (이미지출처: 닌텐도코리아) ]
이 상황에서 젤다는 결단을 내린다. 인간을 포기하고 용이 되어, 자신이 직접 마스터소드를 품고 미래로 나아가겠다고. 일만 년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을 거슬러 회귀한 건 찰나였지만, 젤다가 본래 존재하던 시간으로 다시 나아가기 위해선 억겁의 시간을 정직하게 지나와야 한다. 그래서 젤다는 몸과 마음을 포기하고, 온몸에 비늘이 돋은 용이 된다. 이마에 마스터소드를 꽂은 채로.
억겁의 시간을 걸어오는 회귀자 '젤다'
용은 전작 <야생의 숨결>에도 등장한다. 여러 마리의 용이 하이랄대지 상공을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데, 이들은 마치 자연물과도 같은 존재다. 용은 링크를 공격하지 않고, 링크도 용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없다. 화살로 쏘면 용에게서 떨어져 나온 비늘이나 발톱, 뿔 같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정도다.
그래서 젤다가 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저들은 대개 큰 충격에 빠지곤 했다.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젤다가 억류되어 있는 줄만 알았는데, 알고보니 젤다가 용이 되어 이미 우리 곁을 헤엄쳐 다니는 것 아닌가. 링크의 시점에서 젤다와 헤어진 건 길어봐야 고작 몇 개월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젤다의 시점에서 링크를 다시 만난 건 일만 년을 훌쩍 넘는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낸 이후다. 회귀자로서 젤다는 자신이 회귀했던 그 시간을 다시 꼿꼿하게 걸어 온 것이다.
웹소설이나 웹툰에서 볼 수 있는 회귀물 서사에선 회귀 자세게 종종 페널티 혹은 특권이 주어진다. 특권은 일반적으로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이고, 페널티는 현재를 미래와 바꾸려 했을 때 다른 위험이 등장한다는 설정 등이다. 그러나 회귀자 젤다의 경우, 그녀가 가진 특권과 페널티는 모두 시간 그 자체다. 영겁의 시간을 건너간 자, 다시 그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아주 오랜 시간을 견디고 난 뒤엔 비로소 마왕 가논돌프에 대적할 수 있는 힘(마스터소드의 회복)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의 약속과 함께.
일반적으로 회귀자들의 서사에는 복수로 인한 통쾌함이 극대화된다. 미래를 이미 예지하고 있는 주인공이 그 자신을 구원하게 위해 회귀자로서의 특권을 발휘하는 것이 회귀 서사의 묘미다. 그러나 <왕국의 눈물>에는 그런 쾌락이 없다. 오히려 회귀자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시간의 무게를 진다. 용이 된 젤다는 시간이 형상화된 모습, 그 자체다. 용이 우리 곁을 헤엄쳐 다녔듯 시간은 우리와 뗄래야 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지만, 그 용에게 누적된 세월만큼이나 아주 오래된 것이다. 훌쩍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가볍지만 동시에 한없이 무겁고, 늘 갱신되지만 아주 오래된 것. 그것이 바로 시간이며, 그 시차를 견뎌내는 것이 <왕국의 눈물>에서 보여주는 회귀자 '젤다'의 모습이다.
회귀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젤다가 억겁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링크도 그저 손 놓고 있던 건 아니다. 과거에 머문 젤다에게 훼손된 마스터소드를 보낸 건 다름 아닌 링크다. 이후에도 링크는 젤다가 용이 되면서 떨어뜨린 눈물-지상화를 따라 젤다의 기억을 쫓아가고, 마구간에서 퍼지는 젤다 목격담을 따라 젤다를 찾아나선다.
과거 하이랄 왕국을 세웠던 초대 왕 라울도 영혼 형태로나마 링크를 돕는다. 라울은 독기에 잠식되어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링크에게 자기 오른팔을 내어주고, 여러 사당을 세워 과거 라울이 지니고 있던 조나우 기술과 유적 등을 링크에게 전수한다. 라울은 머나먼 과거에 이미 생을 다했지만, 회귀한 젤다와 만난 이후 언젠가 링크가 나타날 그날을 위해 자신의 정수를 모아 둔 것이다. 은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회귀자를 통해 과거(라울)와 현재(링크)는 대화를 나눈다. 심지어 몸을 나누기까지도 한다.
<왕국의 눈물>은 기존 회귀물 서사와 전혀 다른 전개를 선보인다. 무엇보다 <왕국의 눈물>의 회귀는 자조(自助)가 아니라 공조(共助)다. 일반적인 회귀물에서는 회귀자가 모든 열쇠를 쥐고 있지만, <왕국의 눈물>에서는 회귀자 젤다 이외에도 여러 인물이 필요하다. 과거에 존재했던 라울, 현재에 머무는 링크, 그리고 링크를 돕는 부족의 영걸과 과학자들까지도. 이 모든 사람이 힘을 모을 때 비로소 과거에서 현재로 끈질지게 이어지는 거대한 숙적을 물리칠 수 있다. 여기에서 회귀자 ‘젤다’를 추동하는 닻은 욕망이 아니라 신념이다. 모두가 함께 하는 하이랄왕국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 말이다.
아직 우리에겐 못 본 '회귀'가 남아있다
'회빙환' 설정을 차용한 작품들은 (당연히) 저마다 다르다. 비슷한 서사구조와 전개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세부적인 설정과 캐릭터의 매력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그런데도 이들 작품은 대체로 회귀자의 기본 설정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거의 모든 작품의 회귀자는 자신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과거 실패한 자신을 연민하며 회귀한 이후엔 다른 생을 쓰려 한다.
그러나 <왕국의 눈물>은 이와 다르다. 젤다는 자신의 시간이 아니라 하이랄왕국의 시간축을 따라 회귀하며, 다른 등장인물들과 함께 왕국을 구원한다. 일반적인 회귀의 목표는 복수와 성공이지만, 젤다의 회귀에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스며들어 있다. 물론 개인의 역사에서 회귀하는 것과 왕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 그 사이에 우열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왕국의 눈물>은 지금껏 주인공의 회귀와 그로 인한 쾌락에 과히 집중한 나머지, 회귀물로 열어젖힐 수 있는 다른 이야기를 놓쳤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회빙환' 설정을 차용하는 작품들의 서사구조는 어느 정도 유형화되어 있는 데다 전개 역시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빙환'은 여전히 재미있는 소재다. 작품들이 두터운 동질성을 공유하기에 오히려 아주 작은 이질감이라도 독자가 금세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아마도 기존의 흐름을 변주하여 작품이 그 자신의 고유한 호흡으로 다가오는 순간을 이미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왕국의 눈물>은 ‘회귀’라는 설정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가능한지 거대한 상상력을 펼쳐 낸 역작이다. 그렇다면 웹툰/웹소설은 또 어떤 이야기를 선보일 수 있을까. 많은 독자가 ‘회빙환’은 이제 지겹다고들 하지만, 아직 ‘회빙환’의 봉우리는 터지지 않았다. '회빙환'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뻗쳐 나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더 많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