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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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의 ‘자기애’ 시대, 확장되는 웹툰 IP를 바라보며

웹툰 IP가 확장되어 가는 가운데 이제는 다양한 만화의 IP를 ‘만화적’으로 확장해야 한다

2023-08-31 문종필

소년은 사냥에 대한 열성과 더위에 지쳐 이곳에 누워 있었으니, 그곳의 생김새와 샘에 끌렸던 것이다. 그는 갈증을 식히려다가 그사이에 또 다른 갈증을 느꼈다. 물을 마시다 물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그것에 끌려 실체 없는 희망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실체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보며 찬탄했고, 파로스산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꼼짝 않고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1)


웹툰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본다면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수록된 「나르킷수스와 에코」에 등장하는 소년의 표정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에 비친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소년의 모습처럼 동시대의 웹툰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2023년 2월 17에 오픈한 웹 예능 〈웹툰싱어〉가 그렇다. 이 예능프로그램은 대중들에게 인지도 있는 웹툰 작가가 초청되고 그 웹툰에 어울리는 음악을 K-POP 가수가 선정해 감칠맛 나게 노래 부른다. 단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두 팀으로 나누어 경쟁한다. 어느 팀이 웹툰과 잘 어울리게 노래를 부르는지 우열을 가리기 위함이다. 물론, 여기서 팀을 나누어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것은 의미 없다. 이러한 기능은 단지 오락에 불가할 뿐이니 그렇다. 이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웹툰’이라는 하나의 생명체가 영상이나 특정한 가수에 의해 새로운 형식으로 변주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장면을 웹툰 작가가 흐뭇하게 바라보며 벅찬 표정을 짓고 있으니,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등장하는 「나르킷수스와 에코」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후 위기와 부조리한 계층 간의 구별 짓기를 문제 삼은 이온균 작가의 〈택배기사〉, 말랑말랑한 이혜 작가의 로맨스 판타지 〈이번 생도 잘 부탁해〉, 애니메이션은 물론 게임까지 확장된 SIU 작가의 〈신의 탑〉, 인지도 있는 웹툰 작가를 초청해 하나의 축제장으로 만들어주는 예능프로그램 〈웹툰 싱어〉는 원작에 해당되는 웹툰이 2023년 상반기에 확장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 그림 1, TVING 오리지널 예능 프로그램 '웹툰싱어(Webtoon Singer)'


성능 좋은 복사기나 카메라의 결과물처럼 동일한 것에 대해 탐닉하는 현상은 아니지만, 웹툰이 변형된 형태로 대중들에게 소비되고 있으니 작가는 자신의 자식과 같은 결과물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웹툰은 ‘자기애’를 마음껏 과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국만화사에서 이런 시기는 이미 너무나 익숙하기도 하지만, 두 번 다시 이런 호황기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한때 주류 담론이었던 영화도 문학도 늘 주도권을 쥐고 서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방식이든지 선두에서 밀려나거나 뒤처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하나의 입장일 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장르 구분이 없어지는 시대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시대 작가들은 문학이든, 영화이든, 웹툰이든, 만화이든 여러 영역의 장점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흡수해 자신만의 결과물을 만들어 발표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지 특정한 장르가 아니다. 쓸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장르만을 탐닉하는 것이 작가나 비평가에겐 효율적이겠지만, 여러 장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도 이 시대의 표정이다. 따라서 웹툰이 다른 장르와 결합하는 것은 낯설지 않다. 다만 다른 장르와 비교해 확장이 빈번히 일어난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막대한 자본이 웹툰과 결탁해 대중들에게 소비되고 있으니, 이러한 영향력이 한순간에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하는 것처럼, 동시대는 웹툰 시대이니 어떤 때보다도 노를 힘차게 저어야 할 것 같다. 지금 밑천을 벌어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오히려 중요한 것은 웹툰 IP의 확장 자체보다도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효과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웹툰이 동시대에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웹툰 IP 확장이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마냥 응원할만한 일은 아니다. 좋은 작품과 좋은 작가는 한정되어 있고, 이야기의 소재라는 것도 늘 매번 쏟아지는 것이 아니다. 일부의 회사가 아무리 시스템을 구축해 이야기를 찍어낸다고 하더라도 습관처럼 반복되면 독자들은 금방 알아차린다. 절박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는 작가의 삶 속에서 온전히 재생될 때 오히려 더 빛난다. 하지만 이야기가 공장처럼 시스템화된다면 언젠가는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대중들에게 잠시 통하는 고만고만한 내용으로 눈 높은 독자들을 설득시키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2차 대전을 종결한 잔혹하고 압도적인 무기의 역사를 다룬 디디에 알칸트, 로랑 프레데릭-볼레, 드니 로디에의 『원자폭탄』은 2022년에 국내에 번역되었지만 이미 2019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2023) 보다 3년 먼저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서로 다른 장르여서 장단점이 있겠지만, 원작(물론, 원작은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이다)으로 따지자면 만화가 영화보다 앞선다. 그러니 『원자폭탄』의 저자 입장에서는 장르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자신의 작품이 복사된 것이니 흐뭇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국내로 시선을 돌려 『원자폭탄』처럼 무게감 있는 작품들의 변주가 국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화계는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좋은 작품을 변주하기 위해 애쓰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 ‘어떻게’에 더욱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도래했다고 본다. 이제는 유행이 아닌 ‘어떻게’ 잘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될 듯하다. 힐링이나 위로 위안 연애와 같은 너무나 식상한 소재에 침몰하기보다는 참신하고 값진 것들에 손길을 뻗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웹툰을 급속도로 소비하고 있으니 우물이 곧 말라버리고, 갑자기 말라버린 우물을 바라보며 만화계는 언젠가는 큰 실수를 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처럼 웹툰 IP 확장은 불가능해진다. 웹툰은 더 이상 우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지 못할 것이다.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실체로 여겼던” 역사로 인해 스스로 자멸할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그림 2, 네이버웹툰 라마 작가의 '내일' ]


내가 〈웹툰싱어〉에서 눈여겨봤던 웹툰은 〈내일〉이었고 이 작품을 더 값지게 만들어준 ‘서도밴드’에 눈길이 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정작 〈내일〉을 그린 작가도 아니고, ‘서도밴드’도 아니었다. 물론, 〈내일〉은 “동시대에 자주 호명되고 있는 반려동물, 퀴어, 성폭행, 무차별적인 악플, 학폭, 외모, 임산부, 성노동, 독고 노인 등의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위안부 할머니들과 한국전쟁 당시 목숨 걸고 싸웠던 젊은 청춘들까지, 기본 틀을 유지한 채 세대를 넘나들며 시즌 드라마처럼 소재를 확장(2)”해 나간다는 측면에서 독자들에게 상당히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 작품 자체가 조금은 싱겁게 느껴졌다. 각각의 ‘인물’들에게 공감해 읽는다면 애틋한 감정을 품을 수 있지만, 읽고 나서는 패턴화 된 형식과 예측 가능성 때문에 솔직히 조금은 지루했다. 정확히 말해 라마의 작품을 『원자폭탄』과 같은 만화와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웹툰싱어〉는 이런 만화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웹툰 〈내일〉을 읽은 서도밴드가 안예은의 〈홍연〉(2016)을 부른 것이다. 서도밴드가 이 노래를 부른 것은 〈내일〉 ‘바람꽃’ 편 이야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수로 소중한 자식을 잃어버린 엄마의 사연을 담은 ‘바람꽃’ 편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을 나타내는 붉은 실”이 등장하기 때문에 서도밴드는 자식과 다시 조우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안예은의 홍연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홍연’은 끈끈한 인연을 상징하는 ‘붉은 실’을 의미한다. 그러니 만화와 노래가 ‘붉은실’이라는 키워드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수 안예은의 〈홍연〉(2016)이 직접 작사 작곡한 수준작이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 노래를 서도밴드는 자신의 팀에 맞게 신명 나는 연출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니 이런 퍼포먼스가 ‘웹툰’을 당연히 더 빛나게 했다. 〈웹툰싱어〉 프로그램 자체는 ‘웹툰’을 기준점으로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웹툰의 입장에서는 반길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이다. 웹툰이 주인공이라면 가수가 조연인 셈이다. 웹툰이라는 주인공을 위해 초대 손님으로 K-POP 가수들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물론 K-POP 가수들도 주목받겠지만 웹툰에 무게중심이 쏠린다. 한국만화사에서 만화가 이런 대접을 받았던 때가 있었을까. 만화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관성의 형태로 작동한다는 측면에서 이런 ‘흔적’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당대의 웹툰은 이런 편견을 무마시키기에 충분히 파급 적이다. 


여기서 고민거리 하나가 생긴다. 동시대의 인기 있는 웹툰과 K-POP 가수와의 결합을 통해 한국 노래와 웹툰을 동시에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은 옹호받아 마땅하지만, ‘만화’가 아닌 ‘웹툰’이라는 명명 행위로 인해 일부의 작품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연구자가 ‘웹툰’의 시작점을 논했던 것처럼, 웹툰의 소비층은 대부분은 젊은 독자들에 한정되어 있다. 10대에서 30대 초반 정도의 그룹이 여기에 들어온다. 물론, 웹툰을 읽었던 세대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어른이 된다면 이 문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세대의 감각보다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매체’의 차이다. 


웹툰의 ‘연재’ 방식은 상당히 긴 서사를 담보한다. 라마 작가의 〈내일〉처럼 회를 거듭하며 연재할 수 있다. 작가에게 열정만 있다면 지속해서 지면을 채울 수 있다. 물론, 만화책 한 권 정도 분량의 웹툰도 많지만, 실제로도 마영신의 〈아티스트〉처럼 정당한 볼륨과 재미로 무장하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작가는 분량을 늘릴 수 있다. 웹이라는 공간의 확장성 때문이다. 하지만 종이 매체는 일정부분 제약이 있다. 이런 차이로 인해 종이책으로만 다룰 수 있는 매력적인 ‘감정’과 응축된 표정을 웹툰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내가 아직 그런 작품을 읽지 못한 것일 수 있고 개인적인 취향으로 이런 예의 없는 발언을 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매체 차이가 창작자들에게 무의식적이면서도 심미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할 것 같다. 기성세대는 이미 익숙하지만, 신세대들은 알지 못하는 그 지점이 지닌 장점을, 주류 만화계는 너무나 쉽게 포기했던 것은 아닌지에 관한 질문이다. 요즘은 종이책으로 출간한 이후, 웹툰으로 다시 수정해 공개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종이책 만화만이 할 수 있는 만화적 순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웹툰이라고 하더라도 인기가 없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물론, 인기의 기준은 대중인데 이런 잣대야말로 위험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웹툰싱어〉 자체는 이런 작품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균형에 있어서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웹툰 IP의 확장보다는 웹툰을 포괄하는 용어인 ‘만화’의 확장에 보다 애정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이 과정에서 웹툰은 서로 교류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데 이 방식에 대해서 침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은 류승희 작가의 작품 같은 경우도 이에 들어온다. 류승희 작가는 ‘유년’의 씁쓸한 흔들림을 『그녀들의 방』(2019)과 『자매의 책장』(2023)에서 연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소재들도 충분히 확장될 수 있다고 본다. 이하진 만화가의 『도작 중독자의 가족』(2022) 또한 고백의 형식으로 도박으로 인해 흔들리는 감정을 섬세하게 담았다. 이런 내용 또한 드라마로 제작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기후 위기 시대에 적적한 표정으로 집 앞 은행나무와 소통하며 보낸 유년의 이야기를 다룬 최인선의 『너를 그리며』(2022) 역시 짧은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다뤄도 좋을 것 같다. 10분 정도의 타임으로 만들어 독자들과 소통하면 얼마나 좋을까. 고독하고 쓸쓸한 만화를 그리는 젊은 만화가 한동혁의 『새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2022)도 충분히 다른 장르로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무슨 이유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기보다는 인기(?) 있고 특정한 ‘웹툰’ 작품 IP 확장에만 열을 올리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웹툰 이건 인기 없는 만화(웹툰)이건 모두 칸과 칸 사이의 상호 충돌로 이뤄지는 장르인데 말이다. 결과물만을 놓고 원본이 더 좋다거나 원본보다 못하다는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틈에 놓인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이 과정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특정 회사가 웹툰을 통제하고 운영하는 시기에 선택받지 못했다고 투덜거리며 지켜만 볼 것이 아니라, 일부의 용기 있는 기획자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만화의 확장을 꿈꾸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가능성을 자본이 있는 새로운 단체가 지원해주면 어떨까. 원작과 변형된 원작을 논하는 것만큼 시시콜콜한 일은 없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도 즐거운 작품 읽기에 해당되지만, 무엇인가 특별하고 의미 있는 것들을 작업하는 것이 만화와 웹툰을 위해 더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에 어느 한 만화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녀는 상처가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상처를 작품에 녹여낼 줄도 알았다.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있는 작가여서 그림을 잘 그리지 않아도 그 자체로 멋진 만화가였다. 그런데 이 만화가는 자신의 작품이 잘 호명되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인지도가 있는 나름 유명한 작가였지만 웹툰 환경 자체와 경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이렇게 좋은 작품을 왜 독자들이 외면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분명히 작품이 동시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화를 소비하는 세대가 그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만화의 매체 전환 시기에 적응하지 못한 존재들은 고독을 버텨야 했고, 버틴 시간만큼 자신의 만화 역시 낡게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말로 이것은 낡은 것일까. 시대적인 분위기가 그들을 낡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낡은 것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 오히려 반복적이고 패턴화된 만화가 오히려 낡은 것이지 않을까. 


그러니 이제는 다양한 만화의 IP를 즐겁고 재미있게 무엇보다도 ‘만화적’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특정한 공간에서 전시와 같은 보여주기식 방법보다는 웹툰(만화) IP가 다양하게 확장되었으면 한다. 이 틈을 자본과 용기 있는 기획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획자가 누군가의 입소문에 좌지우지 말고 작품 자체를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오해도 편견도 사라질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셈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화계는 “그림자에 불과한” 허상에 매달리기보다는 값지고 의미 있는 ‘작품’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1) 천양희, 「나르킷수스와 에코」, 『변신이야기』, 도서출판 숲, 2005, 38쪽.

(2) 문종필, 〈<내일> :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우리의 자세〉, 2022, 만화규장각. https://www.kmas.or.kr/webzine/review/202210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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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

글쓴이 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이 평론집으로 2023년 5회 [죽비 문화 多 평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밖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2021)과 「좋은 곳」(2022)과 「무제」(2023)을 발표하면서 만화평론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