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P.X에서는 면세주류를 판다. 일반적인 소주, 맥주 뿐만 아니라 가격대가 꽤 있는 양주도 판매하는데 간부 명의로만 살 수 있어 병사 시절 간부 명의를 빌려 윈저나 스카치 블루, 골든 블루 등의 18년산 위스키를 사오곤 했다. 위스키에 대한 인지도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간부들도 관심이 없어 쉽게 양주를 구할 수 있었다. 양주는 10년 전만 해도 아주 특별한 날에만 마시는 사치로운 술로 인식되었다. 대표적인 양주인 발렌타인과 로얄 살루트가 <기생충>에서 등장한 것으로 그러한 양주의 사회적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양주가 보편화되었고 현재는 마트 소주 판매량을 역전할 정도로 위스키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이러한 급증의 원인은 크게 2가지인데 첫 번째는 코로나로 인해 혼술족(혼자 술을 먹는 개인)이 늘었다는 것이다. 바bar에서는 한 잔에 만 원씩 받는 위스키를 대형마트에서 사면 약 10분의 1 가격으로 살 수 있다. 싼 술이라고 생각되는 소주보다 유인 가격이 월등히 좋다. 두 번째는 음주 문화의 변화이다. 최근 20~30대의 음주 방식이 굳이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고 가벼운 자리를 선호하게 되면서 높은 도수의 술보다 낮은 도수이면서 더 맛있는 술을 찾게 되었다. 그 술 중 대표적인 것이 칵테일의 종류인 하이볼이다. 하이볼은 제임슨이나 산토리 정도의 싼 위스키로 만들므로 적당한 가격대에 하이볼이 만들어지게 되고 이에 따라 가벼운 술자리에서 하이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위스키와 같은 양주가 보편화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 보편화와 별개로 위스키가 고급술인 이유를 실제로 겪어본 사람은 여전히 적다.
커피나 술 등의 음료 종류가 명품이 되는 핵심은 보통 ‘향’이다. 향의 풍부함이 비싼 음료를 결정하는데 주요 요인이 되는데 위스키의 경우 기본적으로 바닐라향과 캐러멜향에 위스키 종류에 따라 과일향, 육두구향, 정향, 계피향 등의 다양한 향이 코를 댔을 때 한 번, 입 속에서 한 번, 목으로 넘기며 한 번 총 세 번 느껴진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향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마시는 사람이 이 향들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위스키는 단지 독한 술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향은 결국 공부하고 연습해야 알아낼 수 있기에 교양이며 교양으로써 고급문화는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마르스사의 일본 위스키 코마가타케 2020은 시음 전중후의 향이 전부 다르다. 마시기 전에 일반적인 위스키의 카라멜향과 몰트향이 은은하게 난다면 마실 때는 강렬한 과일향과 꽃향이 느껴진다. 목을 넘기고 나서는 약간의 톡 쏘는 매운맛이 나며 피니시가 여운을 주기보다는 갈수록 향이 선명해지는 특이한 술이다. 20만원 중반대의 가격대를 생각하면 가성비가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높은 가격대의 술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향을 읽어낼 수 있다면 재미있게 마실 수 있는 위스키다. 양질의 작품은 양질의 해석 능력이 있어야 진정으로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만화에서의 명품은 이와는 다르다. 대중 매체에서 파생된 문화는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전달된다. 만화와 같은 대중문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일반 예술과는 분명히 다르다. 대문화의 가치는 대중들의 인기로 좌우된다. 대중들의 인기는 보통 자극성으로 결정되는데, 이는 만화와 가요, 방송이 모두 다르지 않다. 감각적으로 어떤 중독되는 부분이 존재하며 복잡하기보단 단순명료해야 한다. 그래서 만화의 명작은 명품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드래곤볼>부터 ‘원나블’이라고 불리는 그 만화들은 명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명품인지는 따로 밝혀야 한다.
‘명작은 그 끝을 알고도 다시 보게 한다’라는 말이 있다. 명작은 한 장면의 연출, 대사. 구도가 모두 기억날 정도로 어떤 강렬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슬램덩크>의 하이파이브 장면이나, “왼손은 거들뿐”이라는 대사는 굳이 사진을 제시하지 않고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러한 이미지는 독자들의 뇌리에 깊게 박히며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남아있는 그 흔적이 대중성이다. 그러나 대중성을 확보한 것과 작품성을 확보한 것은 구분해야 한다. 미술, 음악과 같은 일반 예술에서의 명작과 대중문화인 만화에서의 명작은 다르다. 명작 만화가 모두에게 기억되는 것이라면 명품 만화는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로써의 명품은 그 안에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담겨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흔히 작품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것인데 직관성과 자극성을 중요시하는 대중 예술과는 꽤 거리가 있는 말이다. 대중성과 작품성이 배치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작품성만 존재한다면 일반 대중과 거리가 생기기에 작품성은 대중성을 확보하여 작품의 가치를 사회 전반에 퍼뜨린다. 작품성이 대중성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방식이 보통 수상受賞이다. 수상을 통해 ‘이 작품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대중은 자신의 교양을 높이기 위해 그 작품을 보게 된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교양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별된 작품을 보는 것이다.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이 흥행에 분명한 영향을 끼친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겠다.
그에 비해 한국 만화는 작품성을 고려한 시상이 존재하지 않기에 만화에 ‘명품’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무리가 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대한민국창작만화공모전’, ‘전국학생만화공모전’ ‘네이버웹툰 최강자전’ 등 여러 공모전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것이 어떤 명품과 같은 만화를 선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만화가 명품이 되기 위해서 우선되어야 할 것은 평론가와 같은 전문 평가자에 의해 평가된 작품을 플랫폼 차원에서의 홍보하는 것이 될 것이다. <기생충>의 흥행 원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전문 평가자의 평가가 대중적인 공신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이 공신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만화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소개해야 한다.
명품은 읽어내야 할 것이 많아야 한다. 위스키 한 모금에서 수많은 향과 맛이 느껴지는 것처럼 명품 만화는 장면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수많은 메시지가 존재한다. 그 메시지는 어떤 복잡한 구도나 수많은 선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간단한 표정에도 수많은 심리가 들어갈 수 있으며 컷 간 연결성이나 종이와 디지털과 같은 매체를 활용한 편집을 통해 기존 방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장면이 만들어질 수 있다. 국내 작품에서도 이러한 명품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은 충분히 존재한다.
국내 작품 중에 명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고를 때 <호랑이형님>, <지옥>, <비질란테> 등 여러 후보들이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두 작품만 소개하고자 한다. 국내 만화 중 전투씬으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박용제의 <쎈놈>의 장면이다. <쎈놈>은 액션의 흐름을 한 컷에 담아냄으로써 액션 연출의 방식을 스스로 창조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명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전하는 신체를 위주로 표현하는 곡선적 액션은 배경을 최소화하고 회전의 흔적을 선으로 표현하여 직선적 움직임보다 훨씬 유려하면서도 역동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드러낸다. <쎈놈>은 컷 프레임을 지우고 단일 인물만 화면에 넣어 효과음의 변형이나 바람을 이용한 연출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데, 강조하는 움직임을 명확하게 표현함으로써 인물의 동세가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스크롤 식의 읽기 방식을 활용한 연속 컷이나 투시와 같은 연출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액션 만화로써 눈에 띄는 지점이다. 액션 장면 하나에도 이러한 여러 흔적이 보이는 것은 분명 명품이라고 할 만하다.
하일권의 <안나라수마나라>를 보면 명품 만화란 무엇인지 윤곽이 더 명확하게 잡힐 듯 하다. <안나라수마나라>는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와 아이가 되고 싶은 어른 사이에서 가난이라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주제를 바탕으로 뛰어난 연출을 보여준다. 개인의 트라우마가 만화에서 어떻게 외모로 발현되는지, 흑백과 색채의 연출을 통해 현실과 꿈을 어떻게 구분 짓는지 보여줌으로써 만화 연출이 화려한 자극이 아닌 감정선을 이끄는 작가만의 관점임을 드러낸다. 꽃과 돈다발 등으로 화려하게 나타나는 만다라는 본질을 속이는 마술과 합쳐져 만화만이 드러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수많은 연출 기법이 충돌하지 않고 의도한 대로 흘러가면서 주인공 윤아이의 시선으로 이야기는 ‘말해진다’. 만화가 문학文學이 되는 것이다.
만화가 문화를 넘어 문학이 될 때 만화는 재미를 주는 책이 아닌 우리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으면서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삶이 된다. 문학비평가 모리스 블랑쇼가 말한 것처럼 문학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면서 모든 것을 말하는 텍스트다. 문학은 우리에게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타인의 삶이 우리에게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무엇을 배우는가. 타인의 삶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든 배울 수 있다. 그 어떤 것이든 담겨있는 것이 문학이며 명품 만화이다. 명품 만화에서 무엇을 배울지는 우리의 시선과 대화에 달려있다.
명품 만화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홀리지만 뜯어볼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는 만화이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시선을 온전히 담으려는 노력이 결과로 나타난 만화, 그런 진짜는 티가 나는 법이다. 진짜 명품은 가짜와는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 철학자 벤야민이 말한 그 오리지널의 아우라가 명품에 존재한다.
안타까운 점은 작품성만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화를 명품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칼부림>은 인조 ‘이괄의 난’ 시기를 섬세한 펜터치를 통해 한국적으로 재현한다. 시대적 배경이 돋보이는 고증과 인물 간의 대화뿐만 아니라 동양화다운 여백의 미는 그 어느 것 하나 예술적으로 빠지는 것이 없다. 다만 대중성이 없을 뿐이다. 만화적 과장 없이 현실에 치중한 정통 사극은 역사에 관심이 있다고 한들 그 지루함을 견디기 어렵다. 담백함은 밋밋하다. 밋밋하니 찾게 되지 않는다. 흥행 요소가 없는 작품은 마케팅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스크롤 밑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화로써의 명품은 연출, 스토리, 구도, 마케팅, 매체기술 등 모든 것을 포함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명품 만화는 매체 문학이자 대중문화이자 순수 예술로, 모든 것을 갖춘 현대 장르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시대적 지점을 알려주는 기준이자 하나의 열린 세계이다. 세계는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에 말을 걸어야 세계는 그제야 대답해준다. 그 우리와 세계와의 담화가 해석이다. 재미를 넘어선 세계에 대한 해석이 명품 만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이동진 평론가는 교양을 쌓기 위해선 먼저 명작 영화부터 억지로 보라고 권한다. 만화에도 이렇게 억지로 보기만 해도 교양이 쌓이는 만화를 선정하고 대중들에게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만화가 천대받던 대중문화에서 고급 예술로 나아가 명품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방향이다.
< 침고자료 >
* 천인성, ‘아재 술’ 양주? 대형마트서 ‘국민 술’ 소주보다 더 팔렸다. 중앙일보, 2023.03.19.,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48214, 2023.08.14.검색
* 김성욱, 2022, 『초보 드링커를 위한 위스키 안내서』, 성안당.
* 발터 벤야민, 심철민 역, 2017,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b.
*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역, 2010, 『문학의 공간』, 그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