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준 유니버스 작품들 '외모지상주의', '촉법소년', '김부장' ]
박태준 유니버스에 대해 글을 쓴다는 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나, 와이랩의 슈퍼스트링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이들 작품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작품 간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이벤트와 서사의 유의미한 갈림길을 만들어내거나, 적어도 이를 목표로 한다. 여러모로 마블의 <시빌 워> 이벤트를 모티브로 한 <테러 대 부활> 같은 작품을 생각해보라. 여기선 작품 및 캐릭터의 연결과 활용, 서사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각 유니버스의 효용과 재미, 완성도에 대해 다뤄볼만 하다. 반면 박태준 유니버스에 속하는 작품들, 그가 직접 스토리를 담당한 <외모지상주의>와 <싸움독학>, <인생존망>을 비롯해 박태준만화회사에서 만든 스핀오프 <퀘스트지상주의>와 <김부장>, <촉법소년> 등은 특정 시대와 인물을 공유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딱히 특정한 세계관이랄 것도, 그 세계 안에서의 설정 간 융합이나 서사적 갈등이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독자들이 박태준 유니버스를 즐기는 법이란 기껏해야 각 작품 주요 인물들의 전투력 티어 줄 세우기 정도다. <인생존망>의 장안철과 <싸움독학>의 김문성이 종합격투기 룰로 스파링을 하는 정도의 사건은 벌어지지만, <퀘스트지상주의>의 게임 퀘스트 세계와 <외모지상주의>의 두 개의 몸 설정, <인생존망>의 타임슬립처럼 스토리를 위해 사용된 설정들이 하나의 판타지 세계관으로 통합되길 기대하기란 어렵다. <외모지상주의>에서 박형석이 4대 크루를 무너뜨리기 위해 0세대로 타임슬립을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날의 별점과 댓글이 정말 기대되긴 한다). 다시 말해 아직까지 박태준 유니버스란 그와 그의 회사에서 만들고 몇 가지 떡밥을 공유하는 게 전부인 작품의 합집합일 뿐이다. 그러니 박태준 유니버스에 대해 글을 쓴다는 건 단순하지만 핵심적인 질문 앞에 놓인다. 어쩌면 편의적일 뿐인 박태준 유니버스라는 개념을 하나의 대상으로 묶어 인식할 공통분모란 존재하는가.
아주 사소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해보겠다. 앞서 박태준 유니버스가 특정한 세계관을 공유하진 않는다고 지적했지만, 어떤 면에선 작가 스스로 공인한 설정이 있다. 경찰이 없는 세계관. 처음엔 <외모지상주의>에서 크루 간 전쟁의 스케일이 그토록 커지는 중에도 경찰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일부 독자들의 비판과 비아냥거림에서 출발했지만, 아예 작가는 331화에서 “아니 경찰을 부르지 왜... 아 이 세계관은 경찰 없지 참”이라는 대사로 스스로를 희화했다. 이것은 비판의 수용이라기보다는 비판의 무력화다. 기본적으로 동시대 한국을 재현하지만, 여기는 장르적이고 허구적인 픽션의 세계일뿐이니 너무 진지하게 접근하진 말아달라는 요청. 이 세계에서 어떤 폭력과 범죄가 벌어지든 그것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니 그냥 즐기면 된다는 제안. 문제는 이것이 그저 장르적으로만 즐기고 말 수 있는 설정이냐는 것이다.
<외모지상주의>처럼 공인된 설정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박태준 유니버스에서 공권력은 무능하거나 무력하거나 불의하다. <외모지상주의> 초기나 <인생존망>과 <싸움독학>, <촉법소년>과 비교해 훨씬 개그적인 요소가 강한 <퀘스트지상주의>에서조차 기본적으로 서울 동서남북으로 나뉜 각 학교의 물리적 다툼에서 공권력의 모습은 보기 어려우며, <촉법소년>은 대놓고 법과 공권력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 해당 작품의 공식 소개는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은 X 같은 법들로 가득하다.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고도 처벌받지 않았던 촉법소년들. 그 X 같은 법의 결과물들에게, 지금부터 복수를 시작한다.’ 주인공인 김부장이 국가 비밀요원 출신으로 설정된 <김부장>에서도 정작 강국철이 이끄는 국가특수임무부는 국가의 안전이 아닌 강국철 사익과 고집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세계에서 주인공들에게 가능한 건 오직 각자도생뿐이다. 세상은 정의롭지 않으며, 직접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주인공 박형석이 약한 몸과 못생긴 얼굴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다가 새로운 몸으로 바뀌자 모두에게 호의를 경험한다는 초기 <외모지상주의>의 설정에선 그나마 겉보기로 사람을 평가하고 함부로 대하는 세계에 대한 비판적 전망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젠 몸이 바뀌기 전 원래 박형석마저 다이어트와 심지어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으로 잘생기고 상당히 강한 주인공으로 탈바꿈했다. 말로만 학원 액션물이고 실제 스케일로는 전국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의 폭력배들의 패권 싸움이 되어버린 <외모지상주의>에서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옹호, 학교 내 인싸/아싸의 차별 문제는 이제 부차적인 게 되어버렸지만, 결국 원래의 박형석이 주인공의 지위를 얻기 위해 필요한 건, 그가 약하고 못생길 때도 지니고 있던 미덕 때문이 아니라 ‘노오력’을 통한 환골탈태 덕이다. 이 서사를 가장 밀어붙인 <싸움독학>의 유호빈 역시 빡고에게 무참한 굴욕을 당한 뒤 빡고가 아닌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며 특훈에 돌입해 빡고에게 승리하고, 그가 유튜버로 지니고 있던 인지도와 영향력을 흡수한다. 이 세계에서 박형석과 유호빈이 비교적 선한 인물이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박형석은 소시민적인 인물이지만 4대 크루 해체라는 명분 아래 온갖 화려한 삶을 경험 중이며, 유호빈 역시 가난을 피하기 위해 시작한 ‘싸움독학’ 채널로 시작해 이젠 ‘인싸’들의 집합체 유호빈 컴퍼니의 대표가 됐다. 이들 서사의 쾌감은 선에 의한 악의 징벌이 아닌, 약자가 기존의 나쁜 강자를 짓밟고 그 위에 서서 강자에게 허용되는 자원을 누리는 상승의 욕망에 기대고 있다. 원래 주인공이 전설의 요원으로 설정된 <김부장>에선 이러한 효과를 위해 초반에는 무기력한 중년 남성 코스프레를 해야 한다. 중요한 건 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감히 진짜 강자를 몰라본 양아치들을 혼내주는 ‘참교육’의 정서다.
이러한 ‘참교육’ 썰의 쾌감을 가장 극대화한 <촉법소년>은 단순히 법 사각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서사가 아닌 법 너머의 사적 복수와 폭력의 서사로 진입한다. 학교폭력 피해자인 이윤성은 그를 괴롭히다 못해 집안까지 풍비박산 낸 가해자들이 촉법소년이라는 이유로 느슨한 처벌을 받자 그들을 직접 찾아가 복수한다. 여기서 박태준 유니버스를 연결하는 것은 약자였던 이윤성이 <싸움독학>의 유호빈에게 싸움을 배웠다는 설정이 아니다. 호빈이 왜 싸움을 배우려는지 묻자 윤성은 “법이 좆 같아서요”라 답한다. 즉 호빈이 싸움 기술을 전수한 건, 그가 무능하고 심지어 가해자 편에 서는 공권력의 세계를 함께 살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저 장르적으로 즐기기 위해 제시되었던 <외모지상주의>의 경찰 없는 세계관은 돌고 돌아, <촉법소년>에 이르러 권리만 있고 책임은 지지 않는 촉법소년 일반에 대한 사회적 혐오와 결탁한다. 촉법소년의 지위를 벼슬처럼 누리는 소년범의 이미지란 상당히 과대표된 것이지만, 모두가 힘들고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촉법소년은 모두 공정한 경쟁을 해치는 무임승차자가 된다. 윤성이 아무리 악마 같은 가해자들을 찾아 징벌한다 한들 <촉법소년>에서의 복수극은 정의에 대한 전망을 조금도 남기지 못한다. 복수의 쾌감은 정의 구현이 아닌 무임승차자들에게 딱 그만큼의 몫을 배분하는 것에 있기에. 흔히 사이다 서사라고 하지만 과연 형석, 호빈, 윤성처럼 강해져야만 복수가 가능한 세계라는 게 정말 통쾌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별로 의미가 없다. 가해자였던 인물이 과거의 피해자 몸에 들어가 자신의 격투 기술로 피해자의 인생을 구제한다는 <인생존망>의 서사가 실은 기만적이지 않느냐는 의문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호혜적 세계가 아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만’ 구하는 각자도생과 능력주의적인 세계는 이미 독자들도 공유하는 것이므로.
박태준 유니버스의 거의 모든 작품이 네이버웹툰 요일별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건, 그래서 작품의 완성도 덕분만은 아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박태준 본인이 직접 스토리를 담당한 <외모지상주의>와 <인생존망>, <싸움독학>과 비교해 나머지 작품의 몰입도와 반전, 복선 회수 등의 서사적 테크닉은 훨씬 부족하다. 대신 이 세상을 오직 각자도생과 제로섬게임으로만 여기고 경쟁에서 이긴 자들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 공정이라 생각하는 시대에, 독자들이 믿고 있는 세계를 재현하고 대리만족시켜주는 방법만큼은 각 작품이 공유하고 있다. 실제로 강자보단 약자에 가까울 독자들조차 약자가 약자로서 세상에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고 쟁취하는 것보단, 약자의 지위를 극복해 강자가 되어 기존 강자의 몫을 뺏는 게 더 온당하다고 여긴다. 상승의 쾌감을 위해선 불평등한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형석이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나 단칸방에서 오붓하게 대화를 나눠봤자 <외모지상주의>가 가난과 외모를 넘어서는 평등에 대한 이념을 남길 수는 없다.
하여 지금 박태준 유니버스에 대해 비평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작품이 재미있느냐 없느냐, 성공적이냐 성공적이지 않느냐, 윤리적이냐 비윤리적이냐는 질문을 넘어선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의 세계를 재밌고 통쾌하다고 여기는 세상과 대중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들 작품에서 인간의 권리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배분되는 것이 된다. ‘그’ 나무위키에서조차 서비스컷이 많다고 이야기되는 <퀘스트지상주의>나 <인생존망> 등에서 예쁘고 섹시한 여성 캐릭터가 조금씩 강자가 되는 주인공에게 배분되는 자원이자 트로피 역할을 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예전의 남성향 만화에서도 여성의 성적 대상화는 이뤄졌지만, 박태준 유니버스에서의 여체란 당신도 능력이 있다면 정당하게 획득할 수 있는, 아니 획득해야 정당한 욕망의 대상으로 제공된다. 이쯤 되면 박태준 유니버스를 즐기는 세계라는 것이 병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거 박태준 작가는 본인 블로그를 통해 “제가 생각하는 만화는 오직 재미있는 것 하나”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설계한 박태준 유니버스가 오직 동시대 독자들이 재밌어할만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처럼 노골적인 세계관을 구현한 것인지, 본인부터 일종의 확신범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은 별로 관심도 없다. 의도와 상관없이 박태준 유니버스는 독자들의 확신과 공명하며 진정한 의미로 확장되는 중이다. 바로 그 이유로 그와 박태준만화회사의 작품들은 윤리적으로도 의문스럽지만 재미란 면에서도 조금도 흥미롭지 못하다. 예술작품의 상상력이란 지금 이곳에 없지만 믿고 싶고 믿음을 주는 사회적 각본을 제공하는 것에 있다. 현 시대 독자들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으로서의 능력주의 세계관을 구태의연하게 재현하는 이 세계에 과연 어떤 만화적 상상력이 있는가.
1) '박태준 유니버스', 윤리적이지도 않고 참신하지도 않고
2) '박태준 유니버스', 우리 외지주 그런 애 아니에요
3) 박태준 유니버-셜 스튜디오 체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