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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유니버스', 우리 <외지주> 그런 애 아니에요

다각도로 살펴본 '박태준 유니버스' - 긍정편, 긍정적인 시각으로 대표작품인 '외모지상주의'를 살펴보았습니다

2023-09-12 최윤주

[ 박태준 만화회사의 대표 작품 '외모지상주의' ]


못생기고 뚱뚱하다고 괴롭힘을 당하며 루저 인생만 살아온 내가 잘생겨졌다는 이유로 인싸가 됐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완벽한 외모와 몸을 지닌 사람이 되어 깨어난다면?(1)

 

박태준 작가의 데뷔작이자 박태준 유니버스의 출발점 <외모지상주의>(이하 <외지주>)가 던지는 질문 앞에서 당신은 뭐라고 답을 할지 궁금하다. ‘뭐, 박태준? 그거 외모지상주의 성찰한다더니 따라가는 만화 아니야?’ ‘아니, 학교 폭력 비판한다더니 일진이랑 노는 만화지.’ 혹시라도 이런 대답을 떠올렸다면, 이 글은 바로 당신을 생각하며 쓰는 글이다. 박태준과 <외지주>에 대해 악명 높은 소문만 들어온 당신, 연재 초반에 좀 읽다가 재미없거나 거북해 하차한 당신 말이다.

지적대로, <외지주>는 외모지상주의와 학교 폭력을 비판하려는 자세를 취하며 시작한 작품이 맞다. 하려던 이야기에서 미끄러진 것도 맞다. 하지만 이를 배반이나 실패라는 말로 표현하는 일은 무색하다. 카멜레온처럼 모습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본모습이라는 듯, 장기간의 연재 과정에서 창작 방식의 무수히 많은 시도와 변화를 거쳐온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지주>가 ‘외모지상주의 만화’와 ‘일진 만화’라는 당신의 평가는 틀린 말은 아니나 충분치도 않다. 누구나 명절날 친척들이 자신이 다섯 살 때쯤 저지른,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실수를 평생토록 놀리면 몹시 민망하고 섭섭해지지 않던가. ‘외모지상주의’를 제목으로 지은 원죄로 <외지주>는 충분히 오래 고통 받아왔다.

이쯤이면 오해와 편견을 덜어낼 때가 됐다. 곧 연재 10주년도 앞둔 마당에, 이제는 <외지주>를 정확하게 읽어줬으면 좋겠다. <외모지상주의>보단 <외지주>라고 부르는 게 익숙해져버린, 이 판타지액션느와르(...?) 웹툰을 말이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는 나부터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삐딱한 시선으로 <외지주>를 판단했었다. 그 과오에 대한 깊은 사죄, 그리고 작품에 대한 애착을 담아서 아마도 당신이 몰랐을 <외지주>를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그’ <외지주>(1) 외모지상주의와 학교 폭력 비판하기

작화부터 소재, 연출법, 그리고 장르까지. 끊임없이 변화를 거쳐온 <외지주>의 창작 방식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당신도 아는 ‘그’ <외지주>다. “못생기고 뚱뚱하다고 괴롭힘을 당하며 루저 인생만 살아온” 주인공 박형석의 시선에서 외모지상주의의 불공평함과 학교 폭력으로 인한 모멸감을 그려낸 것이 핵심이다.

‘작은 형석’이라고 불리는 본래 몸과 ‘큰 형석’이라고 불리는 새로 얻게 된 몸은 극단적으로 다른 외형과 가능성을 지녔다. 그러한 차이를 이등신과 팔등신으로 표현해 과장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만큼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두 몸을 오가며 경험하는 낙차가 크기 때문에 불공평한 상황을 보다 극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똑같은 상황을 서로 다른 몸으로 두 번씩 겪을 때 외형에 따라 너무도 달라지는 주변인들의 태도를 비교하며 불공평함을 실감하는 것이다. 이러한 극적 장치는 연재 초반에 적지 않은 독자들이 작품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첫 번째 창작 방식은 큰 형석이 작은 형석과 마찬가지로 작고 못생긴 친구 덕화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축제’ 에피소드나 외모가 곧 필요조건인 연예계를 다룬 ‘PTJ 엔터테인먼트’ 에피소드, 못생겼다고 버림받은 ‘유기견 이누’ 이야기 등에서 활용되었다. 외모지상주의를 성찰하고자 했던 처음의 취지에 가장 부합하나 연재 중반부터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지만 욕망과 상상력, 문제의식이 뒤엉킨 강렬한 도입부를 열어줬다는 점에서 그 존재감이 크다.

 

두 번째, ‘그’ <외지주>(2) 인싸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고교 생활

두 번째 방식 역시 당신이 아는 ‘그’ <외지주>다. 생김새 때문에 차별을 견뎌야 하는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며 호기롭게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완벽한 몸으로 사는 일이 역시나 너무 신이 났던 탓일까. 어느새 억울한 과거는 잊고 유흥과 교우 관계에 힘쓴다. ‘중간고사’, ‘체육대회’, ‘소풍’ 에피소드 등 학사일정을 따라 착실하게 친구들과의 추억을 쌓아나간다. 인터넷 방송과 피팅 모델, 아이돌 연습생 등 새로운 몸이기에 가능한 일들 또한 놓치지 않고 꼼꼼히 음미한다.

그야 그런 몸을 얻는다면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연재 초반에 해놓은 말이 있으니 독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원만한 교우 관계 속에서 일상을 즐기는 에피소드들이 진행되면서 이야기가 지나치게 큰 형석 위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정작 차별의 피해자인 작은 형석의 존재감은 줄어들었고, 줄어든 비중만큼 문제 의식 또한 희석되었다. 누군가 못된 짓을 저지를 때 매번 흉한 얼굴로 그려지는, 편견을 강화하는 연출 또한 독자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학교 폭력을 비판할 것처럼 시작해놓고 폭력을 휘두르던 동급생들과 절친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에서 ‘일진을 미화했다’며 비판이 쏟아졌다. 

여기까지가 익히 알려진 ‘외모지상주의 만화’와 ‘일진 만화’ <외지주>라 할 수 있다. 이 창작 방식 또한 첫 번째 방식과 마찬가지로 중반부 이후로 모습을 감추는데, 공교롭게도 축제와 소풍 등 학사일정이 마무리되는 시기와 겹친다.

 

세 번째, 이것은 만화인가 르포인가

하지만 학교를 떠나고도 삶은 계속되듯이, 학사일정이 종료된 뒤에도 연재는 계속되었다. <외지주>의 성격이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 이 세 번째 연재 방식이 도입된 뒤부터다. 연재 중반에 접어들면서 <외지주>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보고하는 일종의 ‘르포’ 형태를 취한다.

얼핏 들으면 외모지상주의와 학교 폭력을 비판하려던 첫 번째 방식과 유사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소재부터가 확연히 구분된다. ‘불법 또또’, ‘사이비’, ‘동물 학대’, ‘청소년 가출팸’ 등 이전의 <외지주>라면 생각 못 할 다양하고 규모 있는 문제적 상황이 재현되었다. '불법 또또' 편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배경이 학교도 아니었다. 마약을 이용해 성도들을 착취하는 사이비나 유기 동물들을 학대하는 이야기쯤에 들어서면 일진 만화 이전에 학원물이라 할 수 있기는 한 건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기다 사건을 국민일보나 대전일보 등 실제 기사의 발췌문과 함께 제시하며, 첫 번째 방식처럼 1인칭 독백이 아닌 3인칭 서술 방식을 취함에 따라 한층 더 르포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르포형으로 그려진 에피소드들은 다른 연재 방식의 에피소드들 사이에 알알이 박혀 <외지주>를 변화시켜나갔다. 특히나 학교 밖을 배경으로 ‘사이비’ 에피소드가 그려지면서 작품의 무대가 확장되고 서사의 규모도 대폭 커졌다. 문제는 너무나 극적인 확장으로 인해서, 성실한 취재와 의욕적인 재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뭘 하고 싶었던 것인지 가장 모호한 구간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하면 오늘날의 <외지주>는 바로 이 르포형 연재 덕에 가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 번째, 낭만이란 것이 세상을 지배할 때

대망의 네 번째, 마지막 창작 방식은 멋으로 그리고 멋으로 쓰는 낭만주의적(?) 창작 구간이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경고하자면 이즈음부터 그려지는 모든 것이 뜬금 없다. 

학원물이지만 등교하지 않을 때가 더 많으며, 인플레이션을 거듭한 전투 능력은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지 오래다. 학사일정이 끝나기 전까지는 싸워도 콘크리트를 부수는 일은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맨손으로 철장을 구부리더니 이제는 싸움만 했다 하면 건물 내외벽이 사방팔방 박살난다.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 전반이 변화했고, 그 전에 근본적으로 장르 자체가 바뀌었다. 일상적 개그를 가미해 학교 간 혹은 동네 간의 서열 싸움을 그려내던 '학원물'에서, 조직과 조직 간의 싸움과 연대를 그려낸 의리와 눈물로 범벅된 느와르물로 변모했다. 그저 강해지는 것만이 중요한 왕도물 형태의 판타지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나 이 과정에서 인물의 성격과 작품의 시공간 배경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점이 관건이다. 이를테면 비열한 관상으로 등장해 초라하게 퇴장한 불법 또또 주동자 김기명은 느와르적 연출을 통과하면서 이 시대에 살아남은 마지막 낭만이 되었다. 장르가 느와르와 판타지로 본격화되면서 배경 연출 또한 널을 뛴다. 분명 201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시작했던 작품인데, 느와르 구간에 이르러선 드라마 <야인시대>의 한 장면처럼 후미진 골목과 전차(서울 강서)가 들어서고, 판타지 구간에선 영화 <아바타>를 방불케하는 거대한 협곡(경상도 대구)이 등장한다. 인물의 성격, 시간과 공간, 이들이 싸움을 하는 이유까지 무엇 하나 일관적인 것이 없다.

이 모든 전개와 연출은 현실의 상식을 기준으로 한다면 시공간의 논리가 붕괴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작품이 산으로 간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오히려 이전보다 지금이 더 일관성 있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전에는 사회 문제 고발하랴 고교 생활 즐기랴 정신없이 바빴고, 그때마다 작품의 방향성이 뒤집히면서 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의 <외지주>는 오로지 장르적 쾌감만을 위해 그려진다. 설정의 아귀와 흐름의 논리를 따지는 대신 그때 그때의 장면에 몰입해 보면, 극단적으로 뒤바뀌는 인물들의 성격과 배경이 최적의 연출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저 재미만 있을 수 있다면 설정과 현실성 따위는 붕괴되든 박살나든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패기마저 느껴진다. 비열한 범죄를 일삼던 인물들이 기억을 상실한 듯 의리와 정의를 외치는 근거? 1990년대에 전차가 다니고 서울 강서구 한복판에 동해보다 푸른 바다가 파도 치는 이유? 뭘 묻는가. 그것이 낭만이니까 그렇다. 그 편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나가며

초기의 문제 의식에 담긴 어쩌면 선량했을 의욕과는 별개로, 초중기의 <외지주>는 무엇을 재현하든 그 방식이 거칠고 납작해 보는 이를 아슬아슬하게 했다. 하지만 변화해온 창작 방식을 따라 이제는 걱정을 내려놓은 지 오래다. 장르 문법에 충실한 만화 속 세계를 재현하느라 바빠 '현실'을 재현한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무시하기 힘든 설정 오류와 배경 왜곡이 따라왔지만, 뭐... 충성스레 <외지주>를 정주행해온 독자라면 이것이 붕괴가 아님을 안다. 이것은 붕괴가 아니라 재건이다. 그저 그런 현실성이 아닌, 재미와 낭만의 논리 안에 새롭게 설계된 세계. 적어도 내게는 지금의 <외지주>가 훨씬 편하고 재밌다.

물론 이러한 방식으로 그려지는 <외지주>가 이전의 것보다 재미있는가는 지극한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평가다. '요즘이 제일 재밌다'는 긍정적인 댓글은 바뀐 창작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은 독자들이 이탈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전부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외지주>는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던 '그' <외지주>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더는 <외지주>를 외모지상주의와 엮지 말아주길. 정말로 <외지주>는 외모지상주의 같은 것을 비판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지금 큰 형석이 납치당해 생채 실험을 당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작은 형석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도 겁 먹어 울음을 터뜨릴 만큼 무시무시한 크기의 인조인간과 싸움을 앞두고 있다! 네, 무슨 소리냐고요?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걷다보니 아뿔싸 국경을 넘은 것처럼, 장기간 연재하다보니 웬 걸 모르는 세계에 도착해버렸는데 아직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 만화의 종착지는 과연 어디일까? 언젠가 거대한 심해 생물이 사는 수심 한가운데나 용암비가 내리는 행성에서 완결을 맞는다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박형석과 친구들이라면 그곳에서도 거뜬히 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자 역시, 머리를 비우고 작품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면 그때도 재미와 낭만, 혹은 그 이상의 무엇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상태니 <외지주>를 '고작' 일진만화로 바라보는 시선 또한 이제는 거둬가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게 일진이라면, 이 지구에 일진 같은 건 없다.


1) '박태준 유니버스', 윤리적이지도 않고 참신하지도 않고

2) '박태준 유니버스', 우리 외지주 그런 애 아니에요

3) 박태준 유니버-셜 스튜디오 체험기


* 각주

(1) 네이버웹툰 <외모지상주의> 작품 소개의 말



필진이미지

최윤주

만화평론가
2021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대상
2019 만화평론공모전 신인부문 대상, 2020 만화평론공모전 기성부문 가작